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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가봇 (삼상 4: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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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봇 (삼상 4:1~22)


제 동생 석기신 목사가 결혼할 당시, 그때 사정이 제가 그 결혼반지를 골라서 준비해 두어야 했었습니다.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보석 상점에 가 보게 되었는데, 거기서 또 난생 처음으로 다이아몬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자세히 배우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는 다이아몬드 하면 그저 크기만 하면 좋고 비싼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다이아몬드를 감정하는 기준을 소위 '4C'라고 하는데, 그것은 carat(무게), clarity(투명도), color(색) 그리고 cut(연마가공)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 '4C'에 따라 여러 등급이 나뉘어져 있었고, 실제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니 비싼 것은 정말 약간 푸르스름하고 영롱한 빛이 나는 데에 비하여, 싼 것은 좀 누런 빛을 내는 것도 있고 속에 금이 간 것도 있었습니다.
  
즉 다이아몬드라고 해서 다 같은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그것이 얼마만큼 순수하고 오묘한 빛을 발하는가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누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비추어 주는 단체입니다.
이 지상의 각 교회는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얼마만큼 깨끗하고 아름다운 빛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빛을 완전히 상실한 경우에는 두말할 필요 없이 가장 무가치한 존재가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19절부터 22절까지에 기록하기를 "19그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잉태하여 산기가 가까왔더니 하나님의 궤 빼앗긴 것과 그 시부와 남편의 죽은 소문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20죽어갈 때에 곁에 섰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지도 아니하며 관념치도 아니하고 21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 시부와 남편이 죽었음을 인함이며 22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이가봇"이라는 이상한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 이름은 '영광이 없음'이란 뜻의 말이며,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음'을 상징한 것으로서, 엘리 제사장의 며느리가 난산 후에 지금 막 낳아 놓은 아들에게 붙여 주었던 이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소중히 여기던 언약궤를 적군에게 빼앗기고 이스라엘의 영적 리더였던 자기 시부와 남편을 하루아침에 잃고 줄초상을 당한 충격들이, 그녀로 하여금 죽기 직전에 자기 아들에게 그런 이름을 붙이게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정말 그 이름 뜻 그대로 당시의 이스라엘의 형편은 실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찾아보려 해야 찾을 수 없는 완전한 암흑기요 최악의 대공황이었습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습니까?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을 통하여 주변 이방 민족들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었던 이스라엘이 이 사사 시대 말에 와서는 어떻게 그처럼 어처구니없게도 하나님의 영광을 아예 상실한 백성으로 전락되고 말았습니까?
  
이 시간 우리는 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상실케 되었는지를 본문 말씀을 통해 두 가지로 상고해 보면서,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생활에 경종으로 삼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을 섬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사용하려 하는 교인들이 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떠나게 됩니다. 

본문 1하반절부터 4절의 말씀에 "1b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치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쳤더니 2이스라엘을 대하여 항오를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3백성이 진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4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 있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지중해 연안에 자리 잡은 호전적인 민족으로서 사사시대 초기부터 이스라엘을 괴롭혀 왔던 블레셋이 또 다시 쳐들어왔을 때였습니다.
  
그들과 대항해서 싸우러 나갔던 이스라엘은 초전에서 "사천 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배했습니다.
전장에 함께 나와 있던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그 패전의 요인이 군사력의 열세라기보다는 "여호와께서... 패하게 하신" 것이라고 일단 문제의 진단은 정확하게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 대책에 가서는 어처구니없는 유치한 발상을 해내었는데, 그것이 곧 "여호와의 언약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그것으로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왜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패전하도록 버려 두실만큼 진노하셨는지 그 이유를 되새겨 보고 회개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그저 언약궤만 갖다 놓으면 문제가 다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언약궤는 그런 목적으로 쓰일 물건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언약궤는 성소에서도 지성소에만 안치해 두어야 할, 예배를 위한 성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소에 예배하러 오는 자들에게 당신의 임재를 상기시켜 주시기 위하여 언약궤를 거기에 두도록 명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를 하나님 임재의 상징으로 보지 않고 마치 하나님이 그 속에 살고 계신 것처럼 여겼습니다.
즉 그 언약궤를 옮김으로써 하나님을 자기네들 필요한 곳으로 마음대로 데려올 수 있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언약궤는 "실로"의 성소로부터 그 전장으로 옮겨져 왔으며 엘리의 두 아들로서 제사장들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가 그 언약궤 운반과 관리의 책임자 격으로 전쟁터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2장에서 하나님께서 예언하신대로 이들은 바로 거기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어지는 5절부터 11절까지에 기록하기를 "5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6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히브리 진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찜이뇨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7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가로되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가로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8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9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어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같이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10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이었으며 11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야말로 신을 그 가시적인 상징물과 동일시하는 우상 종교 사상에 익숙했습니다.
휴대용 수호신상을 품에 넣고 다니면 어디로 가도 안전하고, 자기 밭 어귀에 나무 우상을 하나 세워 놓으면 바로 그 밭에 농사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던 백성이었습니다.
  
실제로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대하는 자세가 바로 그런 우상 숭배의 수준과 조금도 다름없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중에 들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이 도착했다고 하면서 처음에는 벌벌 떨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그들이 마음을 "대장부같이" 단단히 먹고 공격해 왔을 때,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초전박살 당하고 나머지는 삼십육계일 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 줄 줄 알았던 언약궤는 오히려 빼앗김을 당했으며, 이것이 언약궤가 이방 민족의 손에 넘어간 유일한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언약궤 자체가 당신의 임재나 도움을 보장해 주는 '휴대용품'은 결코 아닌 것을 명백히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당신이라는 존재가 그 이스라엘 백성들 원대로 이리저리 불려 다니고 끌려 다니고 하실 분이 절대로 아님을 천명하셨던 것입니다.

휴대(portable)장비가 점점 더 좋아지고 사람들은 그런 휴대용품들에 점점 더 익숙해져 갑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도 그런 식으로 착각하고서 하나님을 무슨 '휴대용품'처럼 여기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교인들이 적잖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란 대상을 자기 필요한 일에만 불러 써 먹으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사업 잘되도록 도와주는 컨설턴트쯤으로, 자기 육신 건강 지키는 보디가드 정도로, 자기 자녀 취직과 결혼이나 알선해 주는 브로커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야말로 전화 한 통만 하면 즉시 달려 와서 온갖 심부름 다해 주는 무슨 출장 심부름꾼처럼 여기는, 실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태를 아주 태연스럽게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하나님이라면 옛날 우리 조상들이 믿던 돌이나 나무의 우상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필요한 신을 휴대하기 좋은 크기로 깎아 놓고서 자기가 가는 곳 어디에든지 품에 지니고 다니기만 하면 절로 온갖 복들이 따라다닌다고 여기던 '드라빔'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아니 오늘날도 어디 무당 앞에 가서 몇 푼 복채 주고 얻어 온 부적을 여기저기 붙여 놓으면 잡귀가 물러가고 행운이 따를 것이라고 믿는 미신과 우리 기독교 신앙이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성전에 임재하고 계시며 당신께 예배하는 백성과 기도드리는 자녀들을 바로 그 성전으로 나아오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사람이 '이리로 오라, 저리로 가라'는 식으로 명령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정말 교인이라는 자들이 감히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대해도 되는 것이겠습니까?
살아 계신 이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무슨 '배달부'나 '심부름꾼'처럼 취급하는 자들이 모인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세상에 보여 준다는 것은 어림 한푼도 없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을 필요할 때 마음대로 부르고 원하는 곳으로 마음대로 옮길 수 있는 휴대용품 정도로 여기는 백성,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처럼 값싸게 취급하는 백성에게 그 영광을 두실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절대주권자이시며 유일한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이 제멋대로 써 먹을 수 있는 대상이 결코 아니라 오직 떨며 섬기는 대상이 되어야 할 뿐임을 잊지 말고, 우리 교회가 그 거룩하고도 지존한 영광의 빛을 늘 지키고 발할 수 있도록 오직 하나님을 지극히 높이고 경외하여 섬기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종의 자리를 떠나서 사람의 종이 되어 버린 목사가 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떠나게 됩니다. 

12절 이하 18절까지의 말씀에 "12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에서 달려나와 그 옷을 찢고 그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실로에 이르니라 13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 곁 자기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 마음이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떨릴 즈음이라 그 사람이 성에 들어오며 고하매 온 성이 부르짖는지라 14엘리가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이 훤화하는 소리는 어찜이뇨 그 사람이 빨리 와서 엘리에게 고하니 15때에 엘리의 나이 구십 팔이라 그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16그 사람이 엘리에게 고하되 나는 진중에서 나온 자라 내가 오늘 진중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엘리가 가로되 내 아들아 일이 어찌 되었느냐 17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18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런 사건이 진행되고 있던 와중에 엘리 제사장은 "길 곁 자기 의자에 앉아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본문에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떨릴 즈음"이라고 했듯이 '언약궤를 전쟁터에 내어 보내었는데 그게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걱정으로만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 국난의 상황에서 적어도 대제사장으로서 있어야 할 곳이라면 당연히 '길가'가 아니라 '성소'가 되어야 했을 것이며, 전해 줄 소식만을 목 뽑아 기다리기보다는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있었어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무 믿음도 없이 그저 막연히 '잘되어야 할 텐데.'하고 떨고 있는 모습, 하나님 앞에 아무 간구의 자세조차 보여 주지 않고 그저 언약궤만 보내어 놓고서 '어찌 되었을까?'라고 전전긍긍하고만 있는 모습이란, 명색이 대제사장이란 사람치고는 정말 초라하고 비참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그는 애당초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백성들이 언약궤를 전쟁터에 보내 달라고 했을 때부터 그런 일을 허락하지 말았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는 언약궤가 안치된 지성소에 들어 갈 수 있도록, 그것도 일 년에 한 번만 들어갈 수 있도록 허용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 성물이며 어떻게 보관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어야만 했을 사람이고, 그것이 잘못 사용되어지는 일이 생겨난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 일을 막아야 할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백성들이 언약궤를 요구해 왔을 때 아무 거리낌 없이 내어 주었습니다.
그가 자기 조국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할 열심을 상실한 것은 그가 그 백성을 하나님 말씀대로 바로 가르칠 자세를 잊어버린 것과 너무나 짝이 잘 맞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두 아들인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가 그 하나님의 언약궤를 마치 부적처럼 함부로 사용하려 하던 백성들에게 기꺼이 부응해 주는 '사람의 종'들이 된 것은 또한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 부전자전적 행태였습니다. 
  
이들은 그저 이름만 제사장이요 직책만 사사였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위치에서는 떠난 지 벌써 오래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백성에게 가르칠 줄 모르고 그저 백성의 요구대로만 해 주려는 제사장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겠습니까?
  
당신의 종이 아니라 사람의 종이 되어 있는 제사장에게 하나님께서 도대체 무슨 이유로 당신의 영광을 입혀 주시겠습니까?
  
사장의 직속 비서들이 사장이 시키는 일은 하지 않고 회사의 하급 직원들하고 책상에 마주 걸터앉아 시시덕거리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면, 적어도 눈 뜬 사장이라면 그런 비서실을 당장 없애 버릴 것입니다.
  
대통령 보좌관으로 임명 받은 사람이 만일 대통령을 보필할 생각은 않고 자기가 국민들로부터 인기를 얻겠다고 나서서 설친다면, 대통령이 그런 보좌관을 그 자리에 앉혀 둘 리 만무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상의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종'이란 직책은 그저 타이틀로만 붙이고 있고 실제로는 순전히 '사람의 종' 노릇만 하고 있는 목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설교 시간에 "나는 여러분의 종이예요."라는 말을 제 딴에는 아주 겸손한 말처럼 하는 목사가 정말 있는 것입니다.
그런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완전히 하나님의 뜻대로만 따르고 하나님 시키시는 일만 하려 하는 하나님의 직속 비서가 없는 곳에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이 가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은 어찌되어도 이 사람만큼은 확실히 내 사람이다.'라고 믿고 맡기실만한 '충성된 종' 한 명이 없는 교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영광을 두고 싶으시겠습니까?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는 이른 바 '웰빙'(well-being)이라는 것이 각 사회 각 분야에서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원래 이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복지, 안녕, 행복'이라는 뜻이지만 이제는 '건강한 육체와 더불어 만족스러운 정신적 생활' 전체를 추구하는 어떤 라이프스타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매일 세 끼 밥 먹기에 급급해하던 옛날과는 달리 이제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게 되자 보다 '삶의 질'을 향상시켜서 인생을 즐겨 보자는 것입니다.

여기에 발맞추어서 목사 세계에서도 소위 '웰빙 목회'라는 것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웰빙 목회'라는 것이 무슨 '하나님 중심의 웰빙'일 것 같습니까?
그야말로 순전히 '사람의 만족'과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목사가 어떻게 해 주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만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는' 목회인 것입니다.
  
원래 사람이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웰빙이란 바로 정치가들에게 주어진 책임입니다.
그래서 특히 대통령 이하 모든 공무원들은 '공복(公僕)' 즉 모든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 섬기는 '국민의 종'이라고 불리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는 목사가 자기 본연의 사명을 버려두고 사람의 종이 되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요구'는 '하나님의 말씀'과 늘 반대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웰빙을 위해서 목사가 언약궤를 좀 옮겨와 주시오.'라고 하는 요구는 '언약궤를 지성소에 두라.'고 하신 율법과 정면으로 대치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리석고 철없는 교인들 중에는 혹 그런 사람이 있다 해도 적어도 '성소를 지키는 제사장'이라면 그런 경우에 과연 어느 편에 서야 마땅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종'의 입에서는 당연히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시오. 하나님께 주일마다 빠지지 말고 예배드리시오. 하나님의 것 십일조를 온전하게 바치시오.'라고 '하나님이 주체가 되는' 말이 나와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목사의 입에서 그런 설교 대신에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행복하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돈 잘 벌게 해 주시고 오래 살게 해 주십니다.'라는 '인간의 웰빙이 주체가 되는' 말만 나온다면, 그것은 자신을 '사람의 종'으로 전락시키는 데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까지도 '사람의 종'으로 격하시켜 버리는 실로 '악하기 짝이 없는 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목사가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잠시라도 망각할 때, 목사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받들어 교인들을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면서' 이끌어 나가야만 할 책임을 이탈하는 바로 그때부터, 교회는 어두워지고 약해지고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목사가 교인의 눈치를 살피고 교인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전전긍긍하고 떨기 시작할 때, 그 교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란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쪽으로만 향하여 서서 매사에 하나님의 가르침과 뜻만을 생각하면서 그 어떤 교인에게도 그저 하나님만을 높이며 섬기도록 가르치는 목사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바로 그런 교회에 크게 부어 주시는 영광의 빛을 함께 받고 또한 세상을 향하여 밝히 비추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다이아몬드가 빛을 내지 못한다면 그 누구도 귀중히 여기지 않을 것이며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오직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뚜렷이, 밝게, 아름답게 빛낼 수 있어야만 그 존재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발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빛을 세상에 비취지 못하는 교회란, 불신 세상 앞에서 가장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존재이며 아예 없는 것만도 못한 교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지상에는 명패는 교회라고 써 붙어 있지만 이와 같은 '이가봇 교회', 즉 하나님의 영광이 이미 떠난 교회가 예나 지금이나 늘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기 심부름꾼으로 격하시키는 교인들이 모인 교회는 여지없이 그런 '이가봇 교회'가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써먹으려 하는 것이 그 얼마나 큰 신성모독인지를 깨닫고, 오직 그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신앙생활에만 온 마음과 힘을 다 바치는 성도들이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을 온 세상에 높이 드러내는 '산 위의 빛'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받들어 모시려 하는 진짜 목사가 없는 교회는 하나님께서 아무리 당신의 영광을 두시려 한다 해도 두실 자리가 없는 '이가봇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었더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니라"라고, 그 얼굴을 항상 하나님께 향하고 그 귀를 오직 하나님의 음성에 기울이고 그 손발이 그저 하나님의 막대기로 사용되어지기만을 원하는 진짜 '하나님의 종'이 있는 교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야말로 '빽빽한 구름'처럼 항상 충만한 것입니다. 

다이아몬드가 아름답다고 하지만 사실 원석 그 자체만 보면 무슨 수정 덩어리처럼만 보입니다.
범인의 눈에는 별 특별한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고 그저 평범한 돌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공사가 그것을 자르고 깎고 갈아서 잘 다듬고 나면 실로 오묘하고 영롱한 빛, 아름다운 광채를 발하게 됩니다.

교회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아름답게 반영할 수 있게 되려면 그 내면의 질이 좋아야 하고 그 외면 또한 잘 세공되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속에 금 간 데가 없는, 순전한 신앙을 가진 교인들이 모여야 선명도 높은 교회, 하나님의 빛을 밝고 깨끗하게 통과시키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겉이 거칠지 않고 매끄럽게 깎여져 있을 때, 즉 목사가 오직 하나님의 기록하신 말씀대로만 교회를 다듬고 세워 나갈 때, 그 교회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오색찬란하게 빛낼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이라는 이물질이 호리라도 들어가지 않고 그저 하나님을 떨며 섬기는 순수한 신앙만을 지키고, 사람을 섬기는 불충의 모난 것들을 다 깎아내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명령과 법도를 따라 교회의 모든 면모들을 매끄럽게 연마함으로써, 이 제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 - '세상과 천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을 비추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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