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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빈집은 위험합니다! (마 12:3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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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은 위험합니다! (마 12:38~45)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삶의 기회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멋진 삶의 기회는 어느 날인가 어느 순간에 마음을 바꾸고 하나님을 바로 믿을 때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이 주실 삶의 새로운 기회를 바라보며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는 상황을 극복하고 담장 너머로 가지가 무성하게 뻗어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상황에 굴복하고 움츠려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힘 중에 제일 위대한 힘은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힘입니다.
 
무엇을 선택하며,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  우리 속에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 주신 힘을 부정적으로 사용하던 긍정적으로 사용하던, 파괴적으로 사용하던 건설적으로 사용하던, 그 선택은 나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방향이던 부정적인 방향이던, 행복한 방향이던 불행한 방향이던 에너지가 흘러가는 방향의 구조를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 에너지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내 마음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이 선택은 어느 누군가가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땅의 문제는 없습니다.  문제를 보고 있는 내 심보가 문제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심보만 뒤집으면 행동도 태도도 금방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마음만 새롭게 먹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하십시오.  모든 삶의 용기의 원천은 주님이십니다.  주님 안에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낙심과 좌절에서 떨치고 일어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음이란 말의 원어적 의미는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나를 움직이게 합니까?  누가 내 마음에 상처를 주었습니까?  누가 나로 하여금 낙심하게 만들었습니까?  내 마음입니다.  내 마음이 그렇게 움직이게 했고, 내 마음이 그 상처를 받아들였고, 내 마음이 낙심을 용납했습니다.

마음은 어떤 물체의 '중심부'라는 말입니다.  내 과거의 상태를 만들었던 것, 현재의 상태를 만드는 것, 미래의 상태를 만드는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만 든든하면, 마음만 강하고 담대하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마음만 너그러우면, 마음의 풍요로움만 입으면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죽고 사는 권세가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건강한 마음 이상으로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입은 옷이 조금 허름해도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언제나 싱싱한 얼굴로 웃는 사람은 멋있습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마음과 건강한 생각은 어느 날 우연히 얻어진다거나 유전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음을 선택하는 습관에서 옵니다.
 
가만히 보면, 시험에 드는 것도 마음의 습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고 헌신하는 것도 마음의 습관입니다.  시험에 드는 사람은 수시로 시험에 듭니다.  반면에 충성하고 헌신하는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꾸준하게 변함없이 충성하고 헌신합니다.  이 마음의 습관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이 마음이 병들기 시작하면 믿지 않겠다는 사탄의 가라지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무슨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어떤 말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이 병들기 시작하면 사람과의 관계도 깨어질 뿐만 아니라 자기 믿음도 병들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옷, 좋은 화장품, 좋은 집을 선택하는 것처럼 좋은 마음을 선택하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이 좋은 습관은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혀 은혜의 힘을 입고 스스로 보물을 찾듯이 끊임없이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더 좋은 마음, 건강한 마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 해산의 고통을 하며 달려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암이 육체를 파괴하듯이 나쁜 마음, 병든 마음은 내 생명의 삶을 파괴합니다.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의 삶도 파괴시킵니다.  우울증이라는 마음의 질병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상상할 수도 없는 무서운 일들이 우리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음의 질병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원래 병은 마음의 병을 뜻합니다.  마음이 자꾸 근심하면 병이 납니다.  마음을 자꾸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병이 납니다.  그래서 마음의 질병이 우울증이나 불면증에 시달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을 건강하게 하십시오.  아름답게 하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의 소유자가 되십시오.
 
모든 생명이 태양 빛을 받으면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생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을 만져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은 아주 간단한 비유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의 비유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부분의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12장 앞부분에는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른 것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병자를 고치십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안식일 논쟁이 벌어지게 되고 이로 인하여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충돌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논쟁과 충돌은 점차 격렬해져서 소위 바알세불 논쟁, 예수님을 귀신의 왕이라고 몰아붙이는 논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2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귀신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사건을 보게 된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합니다.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여기에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마태 신학에서는 메시야와 동일한 단어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사건을 두고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비방합니다.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이들의 비방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을 하십니다.
"사탄이 만일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바리새인들의 말에 일리가 있지 않느냐? 그렇게 동조하고 싶은 사람들 중에는 이런 의구심과 의심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 무당이 굿을 하여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귀신이 귀신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사건과 무당이 굿을 해서 귀신을 쫓아내는 사건은 시작이 다르고 과정이 다르고 궁극적인 목적이 다릅니다.
 
무당은 정말 귀신을 힘입어서 굿을 하고 귀신을 쫓아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권위, 성령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냅니다.  무당은 귀신에게 먹을 것을 주고 빌어서 잠시 자리를 떠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권세로 귀신을 꾸짖어서 아주 영원히 쫓아버리십니다.  무당은 귀신이 쫓겨난 것처럼 가장을 하지만 실상은 더 강한 귀신이 들어와서 사람들로 하여금 귀신을 섬기게 하도록 흉계를 꾸미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으로부터 사람들을 건져내고 자기 백성이 되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작이 다르고 과정이 다르고 목적이 다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똑같은 사건을 두고 왜 이렇게 무리들과 바리새인들의 보는 시각이 다르고, 해석이 다르고, 그들의 말이 다를까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사건을 해석하는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분이 누구인가?  우리가 그분을 어떻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12장 31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을 바알세불의 장난이라고 비방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참으로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신구약 성경 어디에도 이것 보다 무서운 말씀은 없습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의 이 죄는 성령을 모독하고, 성령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고 있다.  따라서 이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성에 대해서 대단히 관대하십니다.  인간의 실수나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하여는 참으로 인자하고 부드러우십니다.  어떤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성령의 역사를 거역하는 자들, 사단의 부하가 된 자들 앞에서는 대단히 단호하셨습니다.

마태의 가장 큰 관심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기독론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성령을 잠시 거절한 것은 용서가 있지만, 예수님을 부인하고 거절한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마태 신학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태는 예수님에 대한 무지와 오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 좋지 못한 감정으로 오늘 예수님을 거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온전히 계시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숨기고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처 깨닫지 못해서 예수님을 거역한 죄는 성령님이 임하면 다시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한 죄, 성령을 훼방한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
 
이 말은 성령을 거역하고서는 구원에 접근조차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사역의 모든 원동력이 성령의 도우심이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 나라를 섬길 수 있는 근거가 성령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님을 거역하고, 성령님의 역사를 부인하고, 성령님을 모독한다면 이미 그는 '하·포·존'입니다.  '하나님이 포기해 버린 존재'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드려야 할 기도는 이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성령님을 인정합니다.  제게서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성령님의 역사 앞에 제 마음이 강팍해지지 않게 하옵소서."

오늘 본문은 '그 때에' 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여기에서 '그 때에'는 본문에 앞서 일어났던 '바알세불 논쟁'을 말합니다.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여기에서 '이렇게 되리라'는 말씀은 미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모독하고 예수님을 거역한 사람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의 미래를 보여주는 실상입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미래가 마지막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본문은 그림처럼 선명하게 우리에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38절에서의 '그 때에' 라는 이 한마디 속에는 지금까지 설명한 모든 사건, 모든 내용이 다 담겨져 있습니다.  '그 때에'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한데 대해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귀신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을 고치시는 것을 보고 귀신의 장난이라고 했던 그들이 또 무슨 표적, 무슨 기적을 요구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마태복음 8장 이후에 우리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까?  몰려온 수많은 병자들을 모두 다 고치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바람을 꾸짖으시고 풍랑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여기에 또 무슨 기적을 보여달라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들 가운데 보면 기적을 보지 않고서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기적을 보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소중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비와 기적을 체험하고서도 전혀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제나 사람의 마음이란 부드러워지기 시작하면 점점 더 부드러워지는 것입니다.  반면에 강팍해 지기 시작하면 더욱 강팍해 지는 것입니다.  강팍한 심령이 부드러워지기 위해서는 진실한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결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려는 목적으로 기적을 행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호기심이나 채워주려고 기적을 행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오늘도 예수를 시험하고자 이적을 요구할 때에 우리 예수님은 결코 거기에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긍휼의 표현으로 당신의 능력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언제나 이적은 우리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임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을 기다리고 사모하고 경외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사랑의 표현으로 오늘도 이적과 기사와 표적을 행하여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도 예수를 믿으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적은 일어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호기심이나 채우고자 기도하고 예수님을 찾아온다면 예수님은 절대적으로 침묵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빈집 비유로 마무리가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면서 왜 빈집 비유를 말씀하시는지 궁금해집니다.  갑자기 뜬금 없이 빈집 비유가 무엇입니까?  그런데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누가'는 이 빈집 비유를 바알세불 논쟁에 이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마태 본문에서도 앞선 22절에 귀신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들을 고쳤을 때 바리새인들이 귀신의 장난이라고 비난한 연속선상에서 본문을 본다면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되어집니다.

어느 날, 더러운 귀신이 사람의 몸에 있다가 나갔습니다.  귀신이 한 사람에게서 나가서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쉴 곳을 찾았으나 헤매고 있습니다.  어느 곳에 가서 쉴까 하고 귀신이 쉴 곳을 찾아 헤매다가 마땅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그리고 옛날에 살던 집에 와봤더니 그 집이 깨끗이 청소되고 수리되어 있는데 주인이 없었습니다.  문패도 붙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빈집이 내가 살던 집이라니.  야! 이제 내가 악하고 더러운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이 집에 살리라" 하고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그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드디어 그 집은 귀신의 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악한 세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악한 세대가 어떤 시대냐고 묻는다면 오늘 이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가 왜 악한 세대입니까?  인간들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타락하고, 음란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43절에 보면,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가서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쉴 곳을 찾았다고 했습니다.  물 없는 곳은 일반적으로 사막 지방입니다.  사막은 비가 내리지 않아서 물이 없습니다.  중동지방은 사막지대요, 광야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막에서의 싸움은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지금도 마귀는 물 없는 심령을 찾고 있습니다.  심령은 밭과 같습니다.  물 없는 심령은 사막 같은 영혼이요, 메마른 땅입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사막이요, 이곳은 귀신이 거하는 처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도 광야에 가서 사십일동안 금식하고 마귀와 싸웠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마귀가 사는 집을 물 없는 사막으로 생각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물 없는 곳은 마귀가 사는 곳으로, 물 있는 곳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한 가나안 땅이 물 있는 곳입니다.  거기는 젖과 꿀이 흐르는 곳입니다.  하늘로부터 비가 내리고, 이슬이 내리니까 땅에 초장이 있어서 양이 젖을 짜고, 꽃이 피니까 벌이 꿀을 따는 곳입니다.

반면에 물 없는 사막은 황막한 광야인데 하나님을 등진 사람들이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가나안 땅으로 갔고, 이스마엘은 사막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한 믿음의 후사들은 가나안 땅을 차지했고 하나님의 뜻을 반역한 후예들은 사막을 차지했습니다.  성경은 신비하게도 사탄이 물 없는 사막에 가서 쉴 곳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쉴 곳을 찾는데 거기에 만족하지를 않습니다.  사막의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귀신이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옛날에 살던 집으로 한번 가보자."  가보니 빈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유대인들을 가리켜서 빈집으로 설명했는데 그 빈집을 수리된 빈집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여기에서 청소되었다는 말은 그 집의 더러운 것을 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리되었다는 것은 다른 것으로 깨끗하게 포장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모심으로 말미암아 우상을 철거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으로 수리를 했습니다.  저들은 신앙으로 무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저들에게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들에게 "너희들이 꼭 수리된 빈집과 같다.  너희들이 형식주의에 빠져서 외모는 경건하다만 속은 텅 비었고, 너희들이 율법을 주술 외우듯 암송하고 있다만 속에 말씀의 생명이 없고, 너희들이 외형적으로 성전을 건축하고 그 안에 있지만 너희들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고 보면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물 없는 백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불신의 사람들인데 사막과 같이 거룩한 하나님의 생수가 없는 백성들이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믿긴 믿지만 빈집과 같이 수리되어 있는 상태의 공허한 신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악한 세대에 대한 종말을 예수님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집사 직분도 받았습니다.  또 오래 되어서 권사도 되고, 장로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이러한 주인 없는 빈집과 같은 신자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글에 보니까 교인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었습니다.  빈집교인, 별장교인, 주말교인, 상주교인.  빈집교인은 어렸을 때부터 예수를 믿기는 믿었는데 속이 텅 비어 있어서 흉내만 내는 교인입니다.  별장교인은 별장에 가듯이 1년에 몇 번 가서 가끔 기분 내는 교인입니다.  주말교인은 주일에만 주님을 찾고 다른 날은 잊어버리는 교인입니다.  상주교인은 자나깨나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고 '하나님 없이는 못산다.' 이런 신앙고백으로 사는 교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에 나오면 과거의 우상을 철거합니다.  나의 부정한 습관과, 과거의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버립니다.  그래서 청소되고 깨끗이 수리된 사람들이 신자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자가 중심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셔서 성령의 전으로 자나깨나 주님을 모시고 살지 아니하면 그 집이 위험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빈집 신자의 위험을 지적하십니다.  빈집에 전에 나갔던 귀신이 저보다 더 악한 귀신을 일곱이나 끌고 들어오니 그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비참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세대가 과거의 세대보다 덜 악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옛날에는 '너 죽이고 나 살자' 하는 정도가 악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남 죽이고 자기는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너 죽이고 나도 죽고, 같이 끝장내버리자."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죽는 것도 혼자 안 죽습니다.  망하는 것도 혼자 안 망합니다.  "너도 죽이고 나도 죽는다."  이런 패역한 세대에, "나도 죽어야 한다" 이것은 양심의 고백이 아니고 인간의 극악성을 표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미국의 교회는 텅텅 비었습니다.  1년에 수천개의 교회가 문닫고 있습니다.  교회들이 술집과 룸살롱으로 팔려가고 있습니다.  그나마 남은 교회당은 노인들 몇 사람만이 자리를 지키는 빈집으로 변했습니다.  미국의 교회가 빈집이 되었다는 사실은 다른 말로 말하면 미국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떠났다는 것입니다.  수리되고 깨끗한 그리스도인의 외형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유럽의 교회들도 다 텅텅 비고 있습니다.  영국은 앞으로 40년 내에 기독교인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설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국은 지금 교회당이 비어지면서 거기에 이슬람 사원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저 물 없는 아랍을 사로잡던 악령이 이제는 기독교의 빈집을 침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믿기는 믿는데 적당히 모양만 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일곱 귀신이 언제 내 심령을 강타할지 모르니까 조심해야 됩니다.  언제 우리 가정을 넘어뜨릴지 모릅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물 없는 사막처럼 되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거룩한 성령의 생수가 속에서 흘러나오고 있는가 스스로 성찰하셔야 합니다.

개인이나 사회나 빈집은 위험합니다.  속담에 "빈집에 도둑이 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집을 오랫동안 비워두면 도둑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온갖 더럽고 추한 짐승들의 서식처가 됩니다.  밭에 곡식을 심지 않으면 잡초가 무성하게 납니다.  동산에 꽃을 심지 아니하면 잡초로 우거집니다.  집에 사람이 살지 않으면 온갖 더러운 것들이 집에 침투해서 집을 망칩니다.  빈집은 악한 귀신이 침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빈집 신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 심령 속에 주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시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집은 주인에 따라 집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 심령에 주님을 모십시오.  그러나 예수 믿고 은혜를 받았을지라도 그 심령이 주님을 사랑하고 헌신하지 않으면 빈집처럼 될 수 있습니다.  새 주인을 온전히 영접해야 합니다.  내가 섬기는 여러 주인 가운데 한 분이 예수님이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나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리스도가 나의 새 주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 주인을 모셨으면 주인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러운 귀신이 다시 찾아올 염려가 있습니다.  일곱 귀신이 들어올 염려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새 주인을 모신 사람들입니다.  새 주인이 집을 깨끗하게 수리해주셨습니다.  주인 없는 빈집이 되지 말고 주인을 모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주인 없는 그 집은 아무리 잘 청소되고 수리되었다 할지라도 귀신은 말합니다.  "저건 내 집이야.  언젠가는 내가 돌아갈 내 집이야."  그러나 내 안에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어 주시고 거하신다면 우리에겐 이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마음의 집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행여 빈집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오셔서 내 마음 중심에 내 영혼 왕좌에 좌정하시고 영원히 나의 주인이 되어 주시옵소서.  내 집의 주인은 오직 한 분, 예수 당신뿐이십니다.  당신이 내 집 내 영혼의 주인이심을 인정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고 교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대로 살려고 할 때 이 속에 주님이 거하셔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유명한 문학가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거리를 지나가는데 거의 폐인처럼 된 청년이 길거리에 술에 취해 가지고 소리 지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왜 이렇게 사느냐고 할 때, 청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내가 절름발이일 때 나를 고쳐주었는데 어떻게 사는지를 몰라서 이렇게 살고 있소."
 
또 길거리를 지나다가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여인이여, 왜 이렇게 삽니까?"라고 물을 때, 이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한때 귀신 들려 미쳐 살았는데 예수님이 나를 고쳐주셨오.  그런데 나는 더 이상 고독하여 살 수가 없기 때문에 다시 창녀 생활을 시작했오."
 
그 후에 예수님이 또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한 불량자가 이웃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왜 이렇게 싸웁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원래 소경이었는데 예수님이라는 분이 나의 눈을 뜨게 해서 눈을 뜨고 세상을 보니 세상이 부조리하고 모순된 것 투성이라 화가 나서 살 수가 없어서 결국 화풀이하느라 마구 싸우는 거요"

이것은 기독교인으로서 구원은 받았는데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풍자의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었습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나쁜 과거를 청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야 됩니다.
 
과거에 불경한 책을 버리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저속한 노래를 부르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세속의 친구들을 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와서 교회 친구들을 사귀어야 합니다.  아직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교인 친구를 사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빈집의 근성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시대는 청년들이 빈집처럼 되어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한 사람의 빈집 속에 들어가는 악한 일곱 귀신은 가정과 사회 전체를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때때로 온 세계를 불안에 떨게 하는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어린 시절에 들어간 악한 사탄의 세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주변에 있는 청소년이나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민족과 나라를 살리는 위대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학교에 자녀들을 맡기시겠습니까?  학교에 자녀들을 맡겼던 미국이 오늘날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던 초대 청교도의 건국 정신이 사라질 때 미국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교회에 맡기십시오.  말씀에 의지하십시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의 심령 속에 말씀으로 채워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이 역사 속에 귀신들린 집처럼 되어있는 그 집을 향해서 사탄을 내쫓아야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나아가서 그들의 심령을 사로잡은 사탄을 내어쫓고 그리고 빈집 같이 되어버린 내 이웃들이 다시 하나님의 집이 되도록 기도해 주어야 되고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시급하게 일어나야 할 운동이 무엇입니까?  복음운동입니다.  이것은 민족을 살리고, 역사를 살리고, 내 가정을 살리고, 내가 사는 운동입니다.  내 속에 살아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에게 복음을 전할 때 나도 살고 남도 삽니다.
 
남에게 복음을 주지 아니하고 한가하게 믿는 사람들, 입 다물고 믿는 사람들, 적당히 믿는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귀신이 침투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정신 차리고 내게 있는 복음을 남에게 전파해야 됩니다.  이 능력으로 빈집 되지 아니하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집으로 성전 되는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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