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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 쓰신 요소들 (삿 4:1~ 삿 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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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쓰신 요소들 (삿 4:1~ 삿 5:31) 
 
 
오늘은 드보라 사사와 관련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에훗이 죽은 뒤, 이스라엘 자손들은 다시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했습니다(1). 여호와께서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습니다(2). 이는 단순히 역사의 반복이 아닙니다. 옷니엘 때에 이스라엘의 대적은 북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메소보다미아였습니다. 에훗 때에는 요단강 동쪽의 모압이었고, 삼갈 때에는 지중해 해변의 블레셋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반복할수록 그들의 대적은 이스라엘의 삶의 터전과 점점 가까워졌고, 결국 함께 더불어 살던 가나안 본토인들이 대적이 되었습니다. 압제 기간도 ‘팔년’, ‘십팔 년’, ‘이십 년’(3:8, 14, 4:3)으로 점점 길어지고 압제 수준도 강력해집니다.

“하솔”은 여호수아의 정복 전쟁 때 진멸 당했던 성읍입니다(수 11:1-15).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 앞에서 악을 반복하는 동안, 그들은 “철병거 구백 승”을 가진 강국으로 재건되었습니다. 그들의 족장 야빈이 “가나안 왕”이라 불릴 만큼 강성해졌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3a)했다는 말은 ‘난폭하게 비틀어 짰다’는 뜻입니다. 혹독하게 보복했던 것 같습니다. 야빈 왕조의 압제 하에 있는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행인들은 대로를 이용하지 못하고 꼬불꼬불한 길로 조심스럽게 다녔습니다. 지도자감으로 보이는 남자들을 깡그리 죽여 버렸는지, 통치할 관원들이 끊겼습니다(5:6-7).

마땅히 대적해야 할 자들을 대적하지 않고 더불어 살았을 때, 이스라엘은 그들과 동화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이 심각한 압제를 받았음을 말합니다. 그들이 도전하기를 회피했던 철병거는 그들을 압제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가 마땅히 대적해야 할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대적하지 않고 사랑할 때, 하나님의 뜻을 행치 못한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삼킬 것입니다(요일 2:15-17). 기독교 신앙의 형식은 유지될지라도 내용은 모두 성경에서 이탈된 세속된 교회의 모습, 그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의 손에 파신 결과가 아닌지 두렵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의 압제를 받으면서 그들이 동료가 아니라 대적임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뼈아픈 고난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대적을 자신들의 대적으로 삼은 셈입니다. 하지만 정복당하여 쓸 만한 지도자의 씨가 말라버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대세를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요? 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그들은 다만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기점으로 구원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의 시편을 생각나게 합니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144:3).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죄짓는 자기 백성을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섭게 회초리를 내리치다가도 공포에 질려 울부짖는 아이의 모습을 측은히 여기는 어머니처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이시고 진노의 팔을 거두셨습니다. 사랑의 팔로 감싸 주시고 이제는 자기 백성을 압제한 자들을 쳐부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제 마음을 울립니다. ‘여호와여 제가 무엇이관대 …’. 여러분의 마음도 울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시대를 위하여 함께 부르짖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짖음에 응답하셨다는 사실은 동일하지만, 그분의 응답 방식이 항상 새롭다는 것은 본문에도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구원자로 쓰임 받은 사람들이 여인들과 여인들보다 더 소극적인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면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움 받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드보라를 ‘여자 선지자’, ‘랍비돗의 여자’, ‘그녀’라고 하여 여자임을 세 차례나 밝힙니다. 오늘날에도 여성이 최고 통치권자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대 근동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구원자가 여자라는 사실은 충격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에 이미 여인을 쓰셨습니다.

드보라는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일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하셨느니라”(6-7). 하지만 바락은 곧바로 순종하지 않고 조건을 붙입니다.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8). 

바락의 말이 불신에서 나온 말은 아닌 듯합니다. 히브리서가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칭송하기 때문입니다(히 11:32). 그러나 모든 사람이 배반할지라도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고 말했던 여호수아의 태도와 비교해보면 수준 차이가 느껴집니다. 여호수아는 모든 이가 하지 않을지라도 자기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겠다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졌습니다. 이에 비해서 바락은 다른 사람이 가면 자기도 가겠지만, 다른 사람이 가지 않으면 자기도 가지 않겠다는 소극적인 자세를 가졌습니다. 전투의 총사령관이 되기에는 그다지 적합해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물도 쓰셨습니다. 쓰임을 받았지만 전투의 영광을 맛보지 못하게 하셨지요.

전투에서 영광을 얻은 사람은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이었습니다. 헤벨의 집은 하솔 왕 야빈과 화친 관계에 있었습니다(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엘은 적극적으로 하나님 백성 편에서 싸웠습니다. 그녀는 도망하는 시스라 장군을 장막으로 맞이해서 안심시켜 잠재운 후에, “장막 말뚝”을 관자놀이에 대고 “방망이”로 내리쳐서 죽였습니다. 말뚝이 두개골을 관통해서 땅에 박힌 모습은 끔찍합니다. 이 때문에 그녀의 도덕성이 비난받기도 하지만 전쟁이란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어쨌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녀는 큰 공헌을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이주민 아줌마도 쓰셨습니다.

어쩌면 백성의 지도자가 끊어진 상태에서, 그나마 그들이 최상급의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할지라도 당당하게 철병거 구백 승을 거느린 군대장관 시스라 앞에 모여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합니다. 5장 8절을 보면, “그 때에 전쟁이 성문에 미쳤으나 이스라엘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고”라고 했습니다. 최첨단 탱크 부대를 앞에두고 이스라엘 자손들 일만 명은 거의 맨주먹을 불끈 쥐고 다볼산에 서 있었습니다. 도무지 게임이 되지 않을 것 같은, 도무지 승산이 없을 것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드보라는 바락에게 말했습니다.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14) 

바락이 일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에서 내려갔을 때, “여호와께서” 시스라와 그 모든 병거와 그 온 군대를 칼날로 쳐서 “패하게” 하셨고, 시스라는 “도보로 도망”했습니다(15). 5장 20-21절은 당시의 전투 상황을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 기손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 갑작스럽게 번개를 동반한 폭우를 내리셨습니다. 기손강은 평소에는 물이 없다가 비가 오면 금방 물이 불어나고 질퍽해지는 계절천입니다. 진흙 뻘에서는 철병거가 전혀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겠지요. 시스라는 병거를 버리고 맨발로 도망해야 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대적의 가공할 만한 전투력을 단번에 무력화 시키셨고, 약속하신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시스라의 군대는 전멸했고 남은 자가 없었습니다(16).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 상황과 너무 달라서 믿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거저 듣기 좋은 약속일 뿐 현실적으로는 전혀 도움 되지 않는 말씀으로 취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성취하십니다. 다만 그 방법이 사람의 생각과 다르고 높아서(사 55:8-9), 믿음 있는 사람만 순종할 수 있을 뿐입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은 하나님께서는 홀로 승리하실 수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그 싸움에 당신님의 백성들을 동참시켜 승리를 맛보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승리를 주시기까지 그분께서 쓰신 요소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백성의 부르짖음입니다. 부르짖음이 없는 동안은 아무 일도 없었고 부르짖음이 있었을 때 하나님의 역사도 시작되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순종하는 지도자입니다. 드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듣기 좋은 말씀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이루실 줄 확신하고 순종했습니다. 셋째로, 함께 협력하는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바락은 주도적이지는 않았지만 드보라를 잘 동역했고 끝까지 시스라의 군대를 추격하여 제압했습니다. 넷째로 “즐거이 헌신”하는 백성(5:2, 9)이 있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의 미약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죽음을 무릎 쓰고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5:18) 백성들입니다. 야엘도 그런 백성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이 시대 풍조에 동화되지 않고 전투하기 원하셨습니다. 누구나 전투보다는 목가적인 여유로움을 즐기는 것이 좋겠지요(5:15-17).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전투하기를 회피했던 메로스 거민들은 “거듭거듭 … 저주”를 받았습니다(5:23).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오늘날의 교회를 향해서도 동일합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세상을 잘 지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에 유린당하고 있습니다. 세속이 교회를 침탈하고 하나님 백성을 사로잡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미약하고 열악한 환경에 있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백성의 ‘회개의 부르짖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은 여호와의 능력을 체험하고 찬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즐거이 드리는 ‘헌신’은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게 할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대적은 다 이와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는 해가 힘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이 노래가 우리의 것이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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