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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운명인가? 소명인가? (렘 29: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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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인가? 소명인가?(예레미야 29:4-14)

지난 2003년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국에 이민을 시작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저는 그 때 마침 워싱턴 D.C에 머물러 있을 때여서 이민 100주년을 기념하는 미국 동포들의 분위기를 조금은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대대적인 행사가 많았던 중에 특별한 행사가 있었는데, 그것은 워싱턴 시내의 감리교회들이 주일 오후에 한 곳에 모여서 연합 예배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미국인들도 살기 힘들다는 고급 주택가에 크고도 아름답게 자리한 한인 감리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많은 미국의 목사들도 함께 하여서 한국인들의 지난 100년의 지나온 삶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예배 중에 설교를 맡으셨던 목사님의 설교 중에서 아직도 제 기억에 남아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제 미국에서 한 백년쯤 살았으면, 이제는 미국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스갯소리로 하시는 말씀이 아직도 밤에 잠자리에 들 때면 머리를 한국 쪽으로 두어야 잠이 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때 좀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막상 미국에 도착하니까 방향감각도 없어지고 길도 낯설어서 도대체 어디가 어딘지를 잘 알 수가 없었는데... 한국을 향한 방향을 감지해내고 밤마다 잠자리에 들 때면... 어김없이 한국 쪽에다가 머리를 두고 자다니... 아마 이렇게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자기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 한국에는 아직도 자신이 두고 온 부모 형제나 가족들과... 자신이 자라난 고향이 있다는 것... 아무리 바빠도 이런 것들은 전혀 잊어서는 안 된다는 강한 생각이 그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이제 그런 일들은 좀 그만 하자는 것이지요. 어차피 미국에 와서 미국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니까, 이제는 제대로 된 미국 사람으로 살면서... 이 사회를 위하여 무엇인가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로 공헌도 하면서 사는 것... 이것이 결국에는 우리가 몸담고 자라난 대한민국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고... 애국하는 길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지금부터 약 2600년쯤 전인 주전 597년에 예루살렘에서는 그들의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치욕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당시 그 지역의 패권을 장악한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침공해 온 것입니다. 그들은 당시에 남 왕국 유다의 왕이었던 여호야긴 왕의 권력을 무력화 시키고는 바벨론으로 사로잡아갔습니다. 여호야긴뿐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행세 꽤나 한다는 사람들... 제사장들, 기술자들, 군인들, 지식인들을 모두 끌고 갔습니다. 이때에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사람들의 숫자가 무려 일만 명이 넘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폐허로 만들어 버리고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위하여 사용하던 은과 금으로 장식한 모든 기구들 까지도 거두어 갔습니다. 우리는 이때에 일어난 일을 가리켜서 제1차 바벨론 포수라고 합니다.

그로부터 꼭 10년 후 그러니까 주전 587년에 예루살렘은 완전히 멸망을 당하고 말게 됩니다. 여호야긴 대신 왕으로 세웠던 시드기야는 자녀들이 모두 죽음을 당하고 자신은 두 눈이 뽑힌 채로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이때에도 많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 일을 가리켜서 제2차 바벨론 포수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렇듯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져 내리고 도시 전체가 불타버린 폐허로 변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그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한 번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그렇게 강하고 영향력 있는 나라는 아니어도 그들에게는 나름대로 자신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그들이 아브라함 이래로 할례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율법을 주셨다는 것... 이런 것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아무리 강하고 대단한 힘을 가졌어도 할례 없는 백성들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지켜나갔습니다. 그런데 두 번에 걸친 바벨론 포수와 예루살렘의 멸망은 그들에게는 씻기 어려운 참혹한 상처를 안겨주었습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그들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 시편 137편은 그 때의 그들의 심정을 잘 대변하는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1-4절) 
비록 낯선 나라에 끌려오기는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안식일이면 강변에 모여서 그들의 악기를 연주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바벨론 사람들을 향한 적개심이나 분노가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들을 이방사람들 앞에서 도저히 부를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 이렇게 노래합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찐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찌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찐대 내 혀가 내 입 천장에 붙을 찌로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저희 말이 훼파하라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 하였나이다.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5-9절)

비록 그들의 몸은 바벨론에 끌려왔지만,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예루살렘주변을 맴돌고 있습니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에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정도가 아니라 낮이나 밤이나 그들의 마음은 항상 무너져버린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아직도 아주 잔혹한 방법으로 자기들을 유린한 바벨론 사람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바벨론의 앞잡이가 되어서 구석구석까지 바벨론의 군대를 이끌고 왔던 에돔 사람들에 대한 증오가 여전히 그들의 마음속에 사무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반응은 참으로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사람들로부터 이제껏 한 번도 당해본 적이 없는 모욕과 수모를 한 몸으로 당하였습니다. 인간으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잔혹한 일까지도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욕과 수치를 당하고도 아무런 느낌이나 감정이 없다면, 우리를 그를 정상적인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같은 바벨론 포로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첫 번째 바벨론 포수가 있은 후, 예언자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끌려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이 완전히 망하지는 않은 시점에서 기록한 것이지요. 비록 예루살렘이 목숨은 붙어있기는 하지만, 멸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예견하면서 보낸 편지입니다.
   
예레미야는 보낸 편지 속에서 우리가 함께 읽었던 시편 137편에서 느끼는 느낌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사람들을 격려하였습니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하며 너희 아들로 아내를 취하며 너희 딸로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생산케 하여 너희로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5-6절) 
   
마치 바벨론이 그들이 오랫동안 살던 곳인 것처럼... 예루살렘에서 살던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이... 집을 짓고... 땅을 일구어서 밭을 만들고 열매를 거두어서 먹으라고 합니다. 결혼도 하여서 자식도 낳고... 자녀들도 장성하면 결혼을 하게 하여서 대를 이어갈 뿐 아니라 더욱 번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6절의 마지막을 보면 ‘너희로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 이렇게 말씀하였는데, 여기서 번성하라는 말씀은 창세기 1장 28장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난 후에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는데 바로 그 때에 사용되었던 단어가 다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은 비록 그들이 바벨론에 끌려오기는 했지만, 마치 처음 사람을 지으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신 것처럼 바벨론에서 살게 된 그들에게도 같은 복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살 때에도 번성하기를 원하신 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바벨론에서의 생활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는 일종의 형벌이요 심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제껏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한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 포수라는 비극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레미야는 바벨론 포수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판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더욱 큰 축복을 내리시기 위한 섭리와 계획의 한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까지 가게 된 것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7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끌려가서 살게 된 것...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의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느브갓네살과 그의 군대에 이끌려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요. 자기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비극적인 일을 당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예레미야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길에 이끌려서 이곳 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렇게 원치 않게 바벨론에 끌려와서 사는 동안에도 생육하고 번성하게 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7절을 보면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시편 137편에서는 ‘우리가 바벨론 사람들에게 당한 대로 갚아주는 사람에게 복이 있으리라...’ 어떻게 해서라도 바벨론 사람들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는 적개심이 그들의 마음속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와는 정반대로 우리가 끌려와서 살게 된 이 성읍과 이곳에서 사는 사람을 위하여 평안을 빌어주며 하나님께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소박한 목표가 있습니다. 바벨론의 성읍이 평안할 때에 그곳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평화롭게 지낼 수가 있으니까요. 그래도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생각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바벨론에서도 마치 예루살렘에서처럼 열심히 가정을 이루고 자식들을 낳으며 열심히 살아야 할 것은 물론 이고, 이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평안을 선사하고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일을 위하여 그들을 바벨론으로 보내셨다는 말씀이지요. 

예레미야는 그들이 바벨론에서 보내야하는 시간이 70년이라고 명시적으로 밝혀놓았습니다.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10절) 이렇게 말을 하지요. 역사적으로, 주전 538년에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 덕택에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숫자상으로는 잘 들어맞지는 않는 대목입니다. 그들은 길게 잡아서 60년.. 짧으면 50년 만에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머무르는 시간이 칠십년이 될 것이라고 거듭해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수치상으로 맞지는 않는 이 칠십년이라는 시간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요즈음은 우리의 수명이 길어지기는 했지만, 칠십년이라는 숫자 속에는 사람들이 세상에 태어나서 누리는 한 평생의 삶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시편 90편에는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시편90:10) 이러한 대목이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어쩌면 예레미야는 칠십년이라는 숫자를 통해서 우리가 보내는 한 평생을 상징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따라서 ‘칠십년이 차면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이렇게 말씀했을 때.... 여러분 같으면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굉장히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이렇게 반응을 하지 않았을까요? ‘칠십년 후에는 우리가 돌아 갈 수 있다네...’ 이렇게 말하면서 굉장히 기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칠십년 후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있을 사람이 있을까요? 이렇게 생각하면 기쁨과 희망은 사라지고 눈앞이 아득해지지 않겠습니까? ‘돌아가기는 가겠지만... 내 생전에는 갈 수가 없겠구나...’ 이제 그들은 평생을 낯선 땅 바벨론에서 살아야만 하는 운명에 직면한 것입니다. 
  
오늘 예레미야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짜피 살아생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지금 여기서... 원치 않게 끌려오게 된 바벨론에서 내가 어떻게 사는가?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예레미야는 이것을 그들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는 오늘 그들이 직면한 현실을 어쩔 수 없는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시편 137편을 읽으면서 살펴보았던 것입니다. 그 말씀가운데에는 예루살렘에 대한 그리움이 구구절절이 배어 있습니다. 여기는 내가 살던 예루살렘에 아니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는... 그들이 직면한 바벨론이라는 새로운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한 태도가 그들에게는 있었습니다. 더욱이 우리를 염려스럽게 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자기들에게 이런 아픔과 수모를 안긴 바벨론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심이 가슴 깊이 사무쳐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힘이 약해서 바벨론 사람에게 원수를 갚아주지 못하지만... 누군가가 그렇게 해 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는... 그들은 지금 자기들이 끌려와서 직면하게 된 현실을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어서... 마지못해서 살고 있는... 그러면서 틈만 난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들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슴 속에 간직한 채로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현실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지금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을 어쩔 수 없는...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어쩌면 우리가 이렇게 원치 않는 조건 곳에서 평생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여기에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하나님의 소명의 관점에서 현실을 바라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11절) 

앞의 대목은 이렇게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내게는 너희들을 향한 생각과 계획이 있다...’ 물론 그들은 칠십 년이라는 길고 지루한 시간을 그 곳에서 보내야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그들을 향한 분명한 계획과 생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레미야가 가진 현실을 향한 관점입니다. 우리가 오늘 직면한 현실이 참으로 견디기가 힘들고 어렵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하나님의 귀한 섭리와 청사진 아래에서 진행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우리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에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일들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예레미야는 지금 자기들이 서 있는 자리를 하나님의 부르심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평안과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비록 포로로 끌려온 신세가 되었지만...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여기까지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굳건하게 서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이스라엘이 비록 자기가 가진 힘으로는 바벨론 사람들을 당해 낼 수 없을지는 몰라도... 그들은 바벨론 땅에서 그들을 괴롭히는 바벨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안을 선물하는 멋진 인생을 살수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주어진 현실을 바라보는 안목이 달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혹시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을 어쩔 수 없이...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어서 뚜렷한 목적이나 소망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의 생각은 달라야 합니다. 혹시라도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 바벨론에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아무런 소망이나 살아갈만한 이유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도 우리는 우리를 여기까지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런 세상에 보내실 때에는 우리를 향한 소원과 생각과 목적이 있다는...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회를 전하고 소망을 주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현실을 대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하는 삶의 태도이고 자세라는 말씀입니다. 
   
모세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에게도 바벨론 포수와 같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인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는 히브리사람들을 위해서 나설 때가 되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인들은 그를 자기들의 지도자로 인정해 주지를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그는 애굽이나 히브리사람들에게 가지를 못하고 제 3의 지대인 미디안 광야로 숨어들어야만 했습니다. 모세의 바벨론 포로기가 시작된 것이지요. 그는 우연히 우물가에서 남자 목동들에게 곤경을 당하는 여자들을 도와줍니다. 비록 자기의 오늘이 답답하고 암담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평화와 희망을 전하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그 와중에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이 계기가 되어서 그는 이드로의 집에서 살게 됩니다. 
   
젊은 날에 그가 가지고 있던 히브리 민족을 위하여 살겠다는 그의 꿈과는 거리가 먼 생활이었습니다. 히브리민족을 거느리는 대신에 그는 양떼를 이끌고 광야의 이 구석 저 구석까지 다니면서 그들을 먹여야 했습니다. 이러기를 무려 40년을 하다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비로소 히브리민족을 위한 지도자로 부르심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생각해보면 미디안 광야로 그를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그가 보낸 40년을 오로지 양떼를 이끌고 광야를 전전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계획과 생각에 의한 것입니다. 

비록 말 못하는 짐승이기는 하지만, 모세는 양떼를 이끌면서 훗날 많은 사람들을 이끌게 되는 지도력을 거기서 배우게 된 것이지요. 또한 그는 40년 동안 광야를 헤집고 다니는 동안에 광야가 두렵지 않고, 광야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이 훗날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끌어가는 일에 소중한 도움이 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렇게 생각을 해 본다면 모세의 바벨론 포수기... 광야에서의 40년 동안의 삶 가운데에도 그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부르심이 있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다지 좋은 일은 없었어도... 어느 날 갑자기 낯선 곳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을 때... 그리고 그곳에서 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그러한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일이 무척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운명이 아니라 소명이라는 관점에서 자신들의 오늘을 새롭게 보며 살 것을 권합니다. 우리를 이곳으로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 우리를 이렇게 부르셨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이루기를 원하시는 소원과 계획이 있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소망을 그 곳에서도 간직하면서 살고 그것을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전하면서 사는 것...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 이것을 우리는 마음에 깊이 새기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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