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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부부를 보라 (행 18:1~3, 롬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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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부를 보라 (행 18:1~3, 롬 16:3~4)


바울의 곁에는 그의 사역을 도운 사람들이 많았다. 그의 곁을 떠나 섭섭한 마음을 준 사람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바울 곁에 사람을 붙여 주셨다.

로마서 16장을 보면 바울은 자신을 도와 준 수많은 사람을 추천하고 추천된 그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 중에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나오고 있는데 바울은 이 부부를 고린도에서 만났다. 세계 전도 여행 중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 만난 이 부부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오늘은 이 부부를 소개하려고 한다.


1. 이달리야에서 살았던 유대인이었다. (행18:2)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디아스포라, 즉 흩어진 유대인으로 살았다. 그런데 로마의 황제 클라우디오가 명을 내린다.(행18:2) 유대인 모두는 로마를 떠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굴라는 자기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고린도에 오게 된 것이다. 바울은 이 때 이 부부에게 가서 만난다. 바울도 고린도에 새로 도착하였고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도 새로 도착하였다. 새로운 장소에서 만난 만남은 나그네처럼 조우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만남이었다. 이는 떠돌이의 만남이었으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만남이 되었기 때문이다. 
  

2. 장막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행18:3)

행18:3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바울은 텐트 메이커였다. 장막 제조자로서 일을 하고 수입을 올리면서 일하는 자비량 선교사였다. 그런데 로마에서 내려온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가 업이 같은 것을 확인한 바울은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와 함께 거하며 일을 하였다.

함께 거하는 것은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사람의 관계는 누룩과 같아서 함께 거하면 어느 한 편이 어느 한 편을 따라 배우게 되고 닮아가게 된다. 오네시모가 바울과 옥중에서 만나 함께 거하므로 온전한 크리스챤이 되었다. 바울의 충성스런 종이 되고 싶은 만큼 바울의 감화를 입은 사람이 되었다.

한 시대의 최고의 영성인 바울과 만나는 것, 그 자체가 축복이다. 하지만 거함으로 발전된 것이 더 큰 복이다. 거룩한 영향력을 얼마나 크게 받았겠는가? 업이 같으므로 함께 하게 된 브리스길라 부부는 변화될 수 밖에 없었다.
  

3. 바울의 선교지에 함께 동행한 사람이었다. (행18:18)

바울은 고린도에서 18개월을 머물렀다.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는데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가 언제부터 크리스챤이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바울 곁에서 바울의 선교적 열정을 바라보게 된 이 부부는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때 함께 짐을 꾸렸다.

행18:18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고린도 항구 도시 겐그레아까지 동행하였고 다시 겐그레아에서 배를 타고 에베소에 건너간 바울을 좇아갔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의 선교 현장에서 동행하는데 이삿짐을 꾸려 따라간 사람이다. 그의 인생 중에서 세계 선교를 꿈꾸는 바울의 돕는 자가 되는 것이 최고의 가치였기 때문일 것이다.

선교지에 동행하는 삶은 평안한 삶이 아니다. 복음의 능력과 기적을 보고 기뻐할 때도 있지만 적대자들의 반대와 소요, 그리고 환난도 각오해야 한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바울의 현장에 동행하였으니 그들의 각오가 얼마나 특별한지를 알 수 있다. 아굴라의 이름이 독수리라는 뜻을 지녔듯이 솟구치는 새 힘, 믿음과 기도의 힘으로 전도 현장을 동행한 것이다.
  

4. 성경을 잘 알고 해석하는 사람이었다. (행18:26)

행18: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려고...”라고 하였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데려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가르쳐 준 이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아볼로다. 아볼로는 행18:24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고 하였다. 행18:25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는 자”였다. 그러나 요한의 세계만 알 따름이었다. 말씀을 일찍 배워 성경에 능한 아볼로를 볼 때 그의 가르침에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하고 더 자세히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하였다. 그러면 이 부부의 성경에 관한 깊은 통찰력은 도대체 어느 정도 수준이겠는가? 학문이 많은 아볼로를 가르쳤으니 이 부부의 지적 수준은 어느 만큼이겠는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성경에 무지한 자들이 아니었다. 한 시대의 지성인으로서, 성경 교사로 바울을 돕는 진정한 섬김의 사람이었다.

그 후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간다. 그의 최후 선교 목적지인 로마와 스페인을 가려는 꿈을 향해 간다. 이 부부가 어디까지 따랐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성경을 연구하면 그는 로마로 다시 갔다가 다시 에베소로 온 것으로 되어 있다. 바울도 그의 형제들을 다 데리고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주의 사역을 자기의 삶의 자리에서 해야될 때가 더 많기 때문에 바울은 각 지역에 사람을 두길 원했기 때문이다.
  

5. 바울에게 동역자로 불리운 사람이다. (롬16:3)

롬16:3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이 바울의 표현이 더욱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감동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저들 부부가 바울에겐 동역자였다. 그것도 친근감이 펄펄 흘러 넘치는 나의 동역자로 불리워졌다. 

동역이란 무엇인가? 같이 짐을 나누어진다는 말이다. 두 사람 중에 어느 하나가 짐을 벗어 던지는 것은 동역이 아니다. 공동 운명이 되어 짐의 무게를 같이 느끼고 같이 어깨로 메는 삶을 뜻한다. 동역이란 내가 웃으면 그도 웃는다. 내가 울면 그도 가슴 아파 운다.

금번 아시아 미션 코칭 세미나 차 태국의 치앙마이 산족 선교 현장을 보러 갔다. 두 마리의 소가 끄는 마차를 타게 되었는데, 긴 멍에를 목에 메고 우리를 끌고 가는데 어찌 한 마리의 소는 가볍고 한 마리의 소는 무겁겠는가? 오직 같이 짐을 지는 것이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사명의 동역자다. 선교의 동역자다. 바울은 그들을 함께 일하는 동역자로 생각하였다.

나는 교회 건축을 할 때 1층 식당의 이름을 브리스가홀, 아굴라홀로 불렀다. 그것은 그 식당에 들어오는 모든 성도들이 동역자가 되기를 바라는 소원이 있기 때문이다. CM으로 교회를 섬기며 세우는 동역자, 회복과 부흥을 위한 교회를 만드는 동역자, 이 민족 앞에 소망이 되는 사람들로서 동역자, 세계 선교를 이루는 동역자이기를 꿈꾼다. 

요사이 하나님께서 여기 저기 선교지를 보여 주신다. 너무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돕는 동역자, 내 교회 성도가 있다. 이것만 생각해도 힘이 솟는다.

  
6. 바울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사람이다. (롬16:4)

롬16:4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을 위하여 대신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자기의 목을 바치되 다른 사람의 목숨을 대신하여 바친다는 것은 최고의 사랑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였다. 바울의 사역과 바울의 선교, 바울의 영성이 얼마나 존귀한 것이었는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자신의 생명보다 바울의 삶을 더 귀히 여긴 것이다. 그들은 진정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안 사람들이다. 바쳐야 할 충성의 대상, 몸을 부서뜨리고 죽어도 되는 인생의 섬길 대상을 안 사람들이다. 바울은 그를 죽이겠다고 이를 가는 유대인의 무리 때문에 쫓겨갈 때도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바울을 섬기되 천사처럼, 그리스도처럼 섬기는 이들도 있었다.

갈4: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의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 여기지도 아니하여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존귀하게 여겨 할 수만 있었다면 눈이라도 빼어 바울을 주려 하였다. (갈4:15) 바울의 가시는 안질이었기에 성도들은 눈을 빼줄만큼 바울을 사랑했던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 비하여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바울의 목숨을 위해서 목이라도 내어놓는 희생과 섬김으로 충성하였으니 얼마나 놀라운 사람들인가? 부부가 함께 섬기는 것, 이 섬김도 쉬운 일이 아니다. 부부가 함께 사역자가 되는 것, 이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을 따랐다. 내가 가진 삶의 방식으로 바울을 이끌려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가는 곳을 따라가며 바울을 도우려고 하였다. 진정한 섬김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좇는 일에 있다.   

기독교의 부흥의 역사는 바로 위대한 영성가의 세워짐에 있지만 그 영성의 가치, 그 영성의 존귀함을 알아보고 진정으로 섬기며 도울 줄 아는 Follower의 출현에 있다. 교회 속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성도가 세워지지 않는다면 복음의 광채는 무력화되고 이기적인 성도를 정화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부부는 만남으로 복, 거함으로 함께 동행, 동역으로의 삶, 희생으로 산 아름다운 복음의 증인이다. 삶을 발전시키고 향상시킨 참된 신앙인이다. 

태국 치앙마이에 함께 한 성도가 있다. 태국 선교 코칭 센터는 하늘중앙교회가 많은 선교비를 들여 사역을 하는 곳인데 하늘중앙교회 조혁재, 송진숙 권사 부부가 따라나섰다. 닭을 6만 5천마리를 기르고 매일 5천개의 계란을 처리해야 하므로 시간내기가 어렵지만 목사님께 순종하고 따라나섰다고 한다. 이 부부는 교회 건축을 할 때 어려울 때마다 분위기를 바꾸어야 한다고 자신이 2억을 작정하고 1억을 들고 왔다.

“목사님, 힘내세요. 앞으로 더 할께요.” 교회의 몇몇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말을 할 때면 선교회가 목회자의 목회 계획대로 안 움직이면 있을 필요가 없다고 하고 선교회는 담임 목사님의 선교와 목회를 돕기 위해 있다고 선포한다고 한다.

목사님을 위해 목이라도 내놓아야 하는 것이 권사 직분을 제대로 감당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오직 충성한다는 것이다. 그는 성전 건축 헌금을 하고도 당진에 땅을 사놓게 되었는데 교육관을 지을 때 드리려고 기도한다고 한다. 하나님이 충성을 하니 AI 사고로 닭이 다 폐사 되었을 때 자신의 닭 사육지가 천안과 연기군에 놓여 있어서 양쪽에서 넘치는 보상을 받았고 또 산란용 닭을 다시 시작할 때 자신의 양계장만 6개월 먼저 시작하여 계란 유통 업체들이 현금을 들고 와서 135원씩에 계란을 내었는데 엄청난 이익을 남겼다고 한다. 80원에 내어 파는 계란을 2배 가까이 받았으니 하나님의 축복이 너무 놀랐다고 한다.

그는 나의 말을 들을 때마다 너무도 은혜스럽고 우리 교회에 꼭 방문하고 싶다고 하였다. 정말 충성스런 교인이다. 목사님이 권사들을 다 모으라고 하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대상자를 모으는데 10번 이상 전화하고 전례에 없는 모임 동원을 만들어 놓는다.
  
우리가 목회와 선교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만한 각오, 오직 충성, 오직 순종, 오직 헌신의 각오만 실천한다면 교회는 비전을 실행하고 음부의 어떤 권세도 두려워하지 않는 승리의 교회가 될 것이다. 우리 모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보자. 이 부부들의 신앙과 인격이 우리의 동역의 길을 새롭게 만들어 주는 은혜를 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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