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누구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할까? (요일 2:15~17)

  • 잡초 잡초
  • 376
  • 0

첨부 1


누구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할까? (요일 2:15~17)


(요일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1. 인류의 시조(始祖) 아담의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이유는 자신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으시고 동생 아벨의 예배를 받으신 것에 대한 화풀이였습니다.(창4:4-7)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배를 받으신 중요한 이유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고 의롭게 여기십니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고 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후손, 의인의 후손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을 대신하여 아담에게 아들을 낳게 하셨는데 그 이름이 곧 ‘셋’입니다.(창4:25) 이 ‘셋’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4:26)고 했습니다. 이는 셋과 그의 자손들이 인생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하나님 앞에 겸손히 고백하며 기도와 찬양, 감사와 경배를 드렸다는 뜻입니다.(창12:8,21:33,26:25) 

이처럼 ‘셋’ 자손들은 가인의 자손들과는 달리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습니다. 이 ‘셋’의 자손들의 계보가 기록된 창세기 5장을 보면, 당시 ‘셋’ 계열의 족장들의 나이가 죽지 않고 승천한 에녹을 제외하고 평균 912세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의 수명이었습니다. 죽음을 선고받았던 아담의 후손들이 이처럼 장수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이들이 한결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며 후손들에게 하나님을 경배하며 사는 거룩한 삶을 물려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삶의 극치를 보여준 인물이 에녹이었습니다. 창세기 5:24에서 에녹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과 동행하더니”라는 말씀은 아무리 타락하고 죄악이 가득한 세상일지라도 오직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뜻대로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에녹이 세상과 완전히 차단한 채 은둔생활로 자신의 경건한 생활을 이어간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세상이 비록 온통 죄로 오염되었을지라도, 그리고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거역하는 세상일지라도 세상과 동화되거나 세상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죄악된 세대를 분별하며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 가운데서도 오직 믿음을 지켜며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을 경외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녹의 이러한 삶을 기뻐하시고 그와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보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데려가신 것입니다.

(히11:5-6)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런데 가인은 동생을 죽인 후 “여호와 앞을 떠나”(창4:16) 살았습니다. 하나님 앞을 떠났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꿈꾸며 자신의 힘과 지혜,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바탕으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을 떠나’ 살겠다는 것은 동생을 죽인 살인죄를 회개하므로 하나님 앞에 용서받지 아니하고 멀리가서 지은 죄를 은폐하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이 자신의 살인죄를 은폐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에녹성’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가인이 세상에 처음으로 세운 에녹성은 결코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도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살인죄를 은폐한다고 해서 마음에 남은 죄가 씻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죄악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인성에는 나름대로의 문화와 문명이 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죄가 머물러 있는 죄악의 도성 가인성의 문화와 문명은 가인계통으로 볼 때 아담의 7대 손인 라멕의 세 아들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라멕’은 인류 최초의 일부 다처주의자로서 ‘아다’와 ‘씰라’ 두 아내를 두었습니다.

‘라멕’은 ‘힘센 자’라는 뜻의 이름으로 인간의 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무력을 앞세워 하나님께서 세우신 신성한 일부일처제를 파괴하고 많은 여자를 아내로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두 아내를 통해 낳은 ‘아다’는 ‘꾸민 자’, ‘지혜’를 의미하는 이름으로 인간의 지혜를, ‘씰라’는 ‘딸랑거리는 자’로 인간의 감정을 뜻합니다. 그리고 ‘아다’가 낳은 ‘야발’은 농경문화의 조상이 되었고, ‘유발’은 음악과 예술의 시조가 되었으며, ‘두발가인’은 기계문명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들 라멕의 후손들이 시작한 모든 문화, 예술, 문명들이 살인자들의 입김으로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문화와 예술 문명은 가인처럼 죄를 다스리지 못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어서 죄악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는 “검가”(劍歌,칼의 노래) 혹은 “복수의 노래”로 알려진 창세기 4:23-24의 라멕의 야만적인 시로 간단히 설명되고 있습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라멕은 조그만 찰과상(창상)을 당했지만 그에 대한 보복으로 나어린 소년을 잔인하게 살해했다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라멕은 자신이 받은 작은 상처에 대해 가인보다 열배를 더 보복하겠다며 잔인한 복수와 노기로 가득한 증오심을 드러냈습니다. 

인류의 첫 살인자 가인이 세운 에녹성에는 이처럼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 농경문화, 각종 문화 예술, 기계문명 등이 발전하고 있지만, 이들은 근본적으로 그 창시자가 “여호와의 앞을 떠나” 세운 것이므로,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해악의 예술과 문화 문명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문화가 인간의 힘(라멕)과 지혜(아다)와 감정(씰라)을 바탕으로 한 물질적 풍요와 세속적인 아름다움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물신주의 사회였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들의 문화와 문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왔습니다.”(눅16:8) 

그러나 그들이 추구한 것들은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 앞을 떠난” 것이며 죄악을 다스리지 못하고 오직 인간의 편리와 쾌락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요즈음 이 시대의 예술과 문화 문명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음란과 폭력, 살인이 점점 문화의 이름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파멸로 몰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 시대의 예술과 문화 문명은 역시 죄악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음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번성한 예술과 문화, 문명은 세상을 온통 죄악으로 채워 결국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하고 노아 시대에 내린 홍수심판으로 깨끗이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을 제외한 문화와 문명은 아무리 발달한다 해도 궁극적으로 인간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만들어가는 문화와 문명은 인간의 감정을 바탕으로 하는 물질적인 풍요와 세속적인 아름다움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물신주의(物神主義) 문화와 문명입니다. 최첨단의 과학과 병기, 정치적 힘과 경제적 능력을 과신하며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떠벌이는 교만한 문화와 문명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인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며, 인간을 끝없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과 인격과는 정 동떨어진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는 문화와 문명을 말합니다. 

이러한 문화와 문명을 ‘가인의 문화’, ‘죄의 문화’, ‘어둠의 문화’, ‘세상 문화’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처럼 ‘셋’의 후손들이 이루어가는 거룩한 하나님의 문화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가인의 문화’가 공존하는 곳입니다. 


2.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바로 ‘죄의 문화와 문명’을 사랑하지 말라, 가까이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는 말씀은 세상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공존할 수 없다는 것, 세상을 사랑하면서 하나님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세상 ‘죄의 문화’를 좋아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죄의 문화’로 얼룩진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에녹과 같이 하나님께서 동행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후6:14-18) 믿지 않는 사람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마십시오. 정의와 불의가 어떻게 짝하며, 빛과 어둠이 어떻게 사귈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떻게 화합하며,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한 몫을 나눌 수 있으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떻게 어울리겠습니까?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서 살며, 그들 가운데로 다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가운데서 나와서, 따로 떨어져 있어라. 부정한 것에 손을 대지 말아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영접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너희의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 나 전능한 주가 말한다.”

정의와 불의가 공존하지만 반드시 정의가 승리합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상이지만 빛 앞에 어둠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공존하는 세상이지만 우상과 우상 숭배의 문화는 역사 가운데 파멸되어왔고 앞으로도 우상은 영원히 멸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 교회는 영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과 정의 편에 살며,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3. 오늘 본문 말씀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이렇게 분명히 밝히면서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16절을 보겠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여기 “육신의 정욕”(the cravings of sinful man),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은 하나님의 뜻을 거르리고 육체의 욕망에 따라 사는 생활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5:16-26을 보면 이를 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이 서로 적대 관계에 있으므로,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육체의 행실은 분명합니다.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 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노와 이기심과 분열과 분파와 질투와 술취함과 흥청거리는 연회와, 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육신의 정욕’, ‘육체의 욕망’에 따라 살게 될 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노아 당시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한 마디로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for he is mortal)며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창6:1-3)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당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지 아니하고, 착하고 선한 행실, 그리고 아름다운 마음 등 인간의 내면적인 진선미에 가치관을 두고 살기보다는 인간의 외모에 치중하는 타락한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유행하는 신조어로 말하면, ‘얼짱’, ‘몸짱’, ‘꽃미남’ 등 얼굴이 아주 잘 생기고, 몸매도 아주 뛰어난 남자와 여자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셋’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가인의 후예’들처럼 하나님 없는 문화와 문명에 도취되어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살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결혼할지라도 배우자를 놓고 하나님의 뜻을 묻거나 하나님 말씀에 합당한가를 판단하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안목의 정욕’ 좇아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육체’에 치중하는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이 시대의 한 모습을 보겠습니다. 

운전면허를 딴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줌마가 차를 몰고 나왔습니다. 조심조심 운전해 가는데 옆에서 뒤에서 신출내기 운전자를 위협하는 빵빵 소리가 요란합니다. 아줌마 차 옆을 달리며 베테랑 운전자가 내지르는 고함소리 “아줌마, 벌벌 기는 솜씨로 차는 왜 끌고 나와. 집에 가서 솥뚜껑 운전이나 해.” 아줌마는 “그래, 솥뚜껑 운전하려고 쌀 사러 간다. 왜.” 당당하게 맞받습니다. 기죽지 않고 당당한 아줌마. 요즘 이런 아줌마를 일컫는 신조용어가 있습니다. ‘줌마렐라’입니다. 아줌마와 신데렐라의 합성어입니다. 신데렐라처럼 아름답고 적극적인 성향을 지닌 진취적인 여성을 말합니다. 

이들은 남편과 자녀는 물론 자신을 위해서도 돈을 아끼지 않고, 건강과 스타일에 민감해 유기농 제품을 선호하고 여가시간에는 요가와 반신욕을 즐기며, 화장품도 천연화장품만 고집하고 미용과 피부, 체형관리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등 자신의 몸 관리는 필수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무조건 아끼고 절약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했지만 ‘줌마렐라’들은 돈이 다소 많이 든다 해도 자신을 ‘얼짱’, ‘몸짱’으로 만들기 위한 투자라면 아깝지 않게 여기며 그러한 생활이 자신과 가족의 행복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들에 대해 제일기획이 지난해 10월부터 12월까지 2635세대(26세~35세) 6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0명중 7명은 ‘아이나 남편보다 내가 제일 소중하다’. 10명중 9명은 ‘아이를 낳은 후에도 외모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마음껏 문화를 누리는 여자이고 싶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 다 하고 자기 하고 싶은 일 하는 주부를 ‘줌마렐라’라고 합니다.) 

이렇게 육체에 치중하는, ‘육체의 소욕’에 따라 사는 사람들과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함께 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시고 이들의 수명을 120년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의 수명이 120년이 될 것이라는 것보다 120년이 지나면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시겠다는 경고입니다. 120년 동안 회개할 기회를 줄터이니 육체에 치중하여 육체의 소욕에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성령의 소욕에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 즉 육신의 욕망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으로 사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생활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으로 사는 모습을 말합니다. ‘줌마렐라’처럼 자신이 좋다면 세상 문화가 어떠한 것이든지 마음껏 누리며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면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아줌마이지만 얼짱, 몸짱으로 만들어 얼마든지 연상연하를 가리지 아니하고 사랑 놀음을 즐기는 ‘줌마렐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나이 5,60이 되는 늙은이지만 늦었다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얼짱, 몸짱으로 만들어 얼마든지 사랑 놀음을 포기하지 않고 즐기는, 이른바 ‘노(老)렐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이 모두 “육체의 소욕”를 따라 살 때,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말씀대로 다 준행하여 이른바 ‘노아의 방주’로 말미암아 온 가족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 바랍니다.(창6:9, 22)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은 모두 다 지나가버리는 것들입니다. 

(약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담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항상 함께 하는 지혜롭고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벧전 1:23-25)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잠간 있다가 지나가 버리는, 사라지고 마는 것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 미련을 두고 그것들에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말씀에 삶의 최고의 가치관을 두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생이야말로 가장 지혜롭고 복된 것입니다. 미국의 스미스 소니언 박물관에는 세계 최고의 다이아몬드가 있습니다. 인도 산인 45캐럿 짜리 이 다이아몬드의 이름은 호프 다이아몬드입니다. 그런데 이 보석을 소유했던 사람들이 모두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기 때문에 저주의 보석이라고도 불립니다. 

원래 이 보석의 소유자는 페르시아의 총독이었는데 이 총독은 보석을 그만 도둑에게 빼앗기고 자신도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소유자는 페르시아의 왕이었습니다. 그도 역시 반란군에게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 후 이 보석은 프랑스의 황제 루이 14세에게 넘겨졌으나 루이 14세도 그것을 단 한번 목에 걸어 보았을 뿐 천연두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리고 루이 16세와 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소유가 되었는데 그러나 그 두 사람도 모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보석을 소유했던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비참하게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이 보석은 영국의 최고 재벌인 헨리 필립 호프에게 넘어가서 호프 다이아몬드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저주의 다이아몬드가 희망의 보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붙여서 호프 다이아몬드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호프가(家)도 곧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 이 최고의 다이아몬드는 어느 누구의 소유도 되지 못하다가 결국은 미국 워싱턴 D. C의 스미스 소니언 박물관에서 보관하게 된 것입니다. 

가진 자에게 희망과 행복을 준다고 여겼던 그 ‘호프(희망) 다이아몬드’는 가진 자마다 불행과 피의 재앙을 불러들이는 ‘블러드(피) 다이아몬드’가 되었습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재물이 있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생에 자랑할 것이 많든 적든, 인생이 가장 행복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다윗 왕은 인생 말년에 자신의 지난 날의 삶을 돌아보며 인생의 의미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39:4-7) “주님 알려 주십시오. 내가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내가 언제 죽습니까? 나의 일생이 얼마나 덧없이 지나가는 것인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주께서 나에게 한 뼘 길이밖에 안 되는 날을 주셨으니, 내 일생이 주님 앞에서는 없는 것이나 같습니다. 진실로 모든 것은 헛되고, 살아 있는 사람일지라도 한낱 입김에 지나지 않으니, 걸어다닌다고는 하지만, 그 한평생이 실로 한오라기 그림자일 뿐, 재산을 늘리는 일조차도 다 허사이니, 장차 그것을 거두어들일 사람이 누구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내 희망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얼짱, 몸짱도, 재물과 권세도, 명예와 지식도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pass away)들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때가 되면 없어져 버릴 것이며 따라서 이 세상의 것들에 집착했던 우리들의 모든 바램과 욕심과 욕망도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남게 될 것이기 때문에 오직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사는 것만이 가장 지혜롭고 복되다는 것입니다. 

잠시 사는 세상, 한 뼘 길이밖에 안되는 인생이지만 하나님의 뜻이 담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신앙생활로 항상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며 영원한 삶의 축복을 금세와 내세에 함께 누리며 사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