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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과연 주님이 보고 계시다면 (눅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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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주님이 보고 계시다면 (눅 21:1~4)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꽤나 생활이 여유 있는 장로님께서 한번은 목사님을 찾아오셨습니다. “목사님! 저희 구역에 홀로 되어서 아이들 다섯을 데리고 어렵게 살고 있는 여집사님이 계신 것 아시죠? 그 분이 남의 집 빨래 해 주고, 삯바느질해서 아이들을 키우는데, 그 빠듯한 생활비에서 꼬박꼬박 하나님께 주일이면 헌금을 드립니다. 제가 보니 참 안타깝습니다. 앞으로 그 여집사님이 내는 헌금은 제가 대신 낼 테니까 목사님께서 그 여집사님 만나셔서 이제 헌금 걱정하지 말고 가정이나 잘 돌보시고 신앙생활 잘 하라고 좀 말씀 해 주세요.”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목사님이 들어보니 일리가 있었습니다. ‘그분께 헌금의 부담이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여집사님을 불렀습니다. “집사님! 우리 교회에 좀 생활에 여유가 있고 좋은 장로님이 계시는데, 집사님이 어려운 것을 보고 헌금을 대신 내 주겠다고 하니까, 이제 앞으로 헌금부담 갖지 마시고 아이들을 잘 키우세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은 그러면 이분이 좋아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이 목을 놓아 우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집사님 왜 웁니까?” 이 집사님이 하는 말이 “목사님! 제가 이렇게 어렵게 살아도 일주일동안 열심히 일해서 주일날 하나님 앞에 와서 제가 충성으로 준비한 이 헌금을 드리는 것이 제 인생에 가장 큰 축복이고 가장 큰 기쁨인데, 그 기쁨마저 빼앗아 가시면 제가 어떻게 살라고요.” 그렇습니다. 그 집사님은 정성껏 준비한 예물을 하나님 앞에 드릴 때마다 큰 기쁨과 축복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정말로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한 가난한 여인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어느 날 서기관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로 논쟁을 벌이십니다. 그리고 잠시 쉬시는 순간에 여인의 뜰 앞에 있는 13개의 연보궤가 있는데, 그 연보궤가 마치 나팔꽃처럼 생겼습니다. 그 연보궤 앞에 지나가면서 헌금을 드리는 사람들을 예수님이 유심히 보게 되었습니다. 부유한 사람도 지나가는데 꽤 많은 액수의 헌금을 드렸습니다. 어떤 주석가에 의하면, 13개의 연보궤가 있는데 그 목적이 다 다르답니다. 구제를 위해 드리는 연보궤가 따로 있고, 다른 목적을 위해 드리는 연보궤가 따로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분들이 와서 앞에 서 있는 제사장에게 “내가 이런 목적으로 헌금을 얼마를 드립니다.” 이야기를 하고 드린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시다보니까 한 가난한 여인을 보게 됩니다. 그 여인은 두 렙돈을 연보궤에 넣습니다. 예수님은 그 앞에 많은 것을 넣은 부자들과 그 가난한 여인을 비교해서 말씀하시는데, 이 여인이 지금까지 드린 사람 중에 가장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들은 풍족한 가운데서 드렸지만, 이 여인은 구차한 중에 자기 생활비 전부를 드렸으니까 이 여인이 가장 많이 드렸다면서 이 여인을 칭찬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여인이 드린 이 두 렙돈, 이 렙돈은 어느 정도의 액수일까요? 한 렙돈은 한 데나리온의 128분의 1이라고 주석가들은 설명합니다. 한 100분의 1쯤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1데나리온은 쉽게 말하면 노동자 하루의 품삯입니다. 예를 들어 10만 원쯤 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100분의 1이니까 천 원 정도 되는 돈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율법에 1렙돈은 드리지 못합니다. 너무 액수가 적어서. 해서 두 렙돈 이상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두 렙돈을 드렸으니까 한 2000원 정도 드렸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드린 많은 예물에 비하면 이 여인의 예물은 너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여인을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칭찬하십니다. “네가 가장 많이 드렸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헌금을 드리는 바른 정신이 무엇일까? 어떻게 드리는 헌금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까?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2부 예배 때에도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사실 제가 헌금에 대한 설교를 안 하려고 몇 주를 미뤄왔습니다. ‘아이고, 이번 주, 아니야.’ 한 목요일쯤 되면 ‘아이고 나 헌금 설교 부담스러워, 안할래! 다른 설교 해야지. 믿음에 대해서, 기도에 대해서.’ 제가 자꾸 하나님께서 제 마음 속에 말씀하셔도 제가 자꾸 피했습니다. 헌금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인상이 찡그려 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헌금설교를 안 하려고, 큰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 속에 계속 부담을 주십니다. 그래서 제가 올 해 처음으로 헌금 설교를 하니까 여러분이 이해해 주십시오. 

제가 안식년 다녀와서 헌금에 대한 설교는 처음입니다. 대신 제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야! 헌금을 바로 가르쳐야지! 교회는 나오는데 헌금을 잘 모르고, 헌금을 오해해서 드린다면 그것은 안 되지 않느냐! 헌금을 드림으로서 받는 축복이 있고,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는데 교인들이 그것을 모르고 마치 무슨 지하철 탈 때 지하철 요금 내듯이, 이것 안내면 지하철 못 타니까. 그런 마음으로. 혹은 세금 내듯이, 아니면 무슨 통과 의례로, 또 체면 때문에 낸다면 이건 얼마나 불행한 것입니다. 아니 일생을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받지 못한다면 그건 바로 설교자 너의 책임 아니냐?’ 하는 부담감이 제 마음 속에 생겼습니다. 제가 그래서 오늘 이 본문을 정하고 기도하고 이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자 여러분!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첫째는 주님은 우리의 헌금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해 보시죠. “주님은 우리의 헌금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오늘 성경을 다시 한 번 보십시다. 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저는 이 보셨다는 말에 집중이 되었습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가난한 여인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셨다는 것은 우연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관심을 가지고 보신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의 관심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어떻게 헌금을 드리나? 어떤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가? 주님은 보고 계십니다. 

이와 동일한 본문인 마가복음 12장 41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쌔” 아니, 연보궤 앞에 아주 의자를 놓고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누가 어떻게 헌금을 드리는가 예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우리 헌금 생활에 있다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헌금 바구니를 돌려서 헌금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시간도 걸리고, 그것 때문에 교회에 오는데 혹 거리낌이 되는 분들이 있다고 해서 자유롭게 넣으시도록 연보궤를 뒤에 놓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헌금을 드리는 것은 사람을 의식해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 보시는가?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또 이것은 목사나 어떤 교회에 드리는 예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물입니다. 사람에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체면 때문에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께서는 우리 헌금 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하필이면 관심 둘 때가 없어서 우리 헌금 생활에 관심을 가지실까? 그 이유가 있습니다. 헌금은 믿음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한 20년~30년 신앙생활 하면서 얻는 하나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헌금은 곡 재물이 많은 분이 하는 건 아닙니다. 또 가난하다고 헌금을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헌금은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분만이 헌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는 돈을 쌓아놓고 쓸데가 없어서 교회에 헌금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마음으로, 믿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이런 청지기적인 신앙고백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믿음의 표현을 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헌금은 우리의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해도 주님은 사랑한다고 하는데, 내 물질을 드리려면 솔직히 아까워서 못 드립니다. 정말 사랑하는 걸까? 부부가 오랜만에 여행을 갔는데 평소엔 아내에게 그저 시장표 옷이나 사주고 했는데, 쇼핑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좋은 옷을 보고 눈을 떼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는 길에도 거기로 가자고 하고, 오는 길에 또 한 번 보자고 하고. ‘아! 저 옷에 관심이 있구나!’ 남편은 늘 침상머리에서 아내에게 “나는 당신 없으면 못 산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늘 고백했는데 옷을 사주려니까 돈이 아까워 못 사주겠다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다고 고가의 몇 백만 원 짜리를 사주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내가 사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정말 아내를 사랑한다고 평소에 고백했다면 그 고백대로 그 정도는 지출할 수 있는 결단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한다는 말 따로, 옷 사주려니까 아까워 못 사주겠다면 이건 얼마나 부끄러운 이야기입니까! 

이건 상관없는 이야기이고 죄송한 이야기지만, 제가 시골에서 목회를 할 때 시골 지역이니까 주말이면 여행하러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식당운영을 하는 집사님 한분이 계셨는데 한번 사석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제가 갈비 집을 하지 않습니까? 설렁탕도 팔고, 갈비탕도 있고, 돼지고기도 파는데, 딱 와서 음식 시키는 것을 보면 딱 압니다. 저건 부부다. 저건 애인 데리고 왔다. 알 수 있습니다.” 부부가 오면 열에 여덟은 “우리 배도 안 고픈데 갈비탕이나 하나 먹고 가자.” “난 돼지갈비가 더 맛있더라!” 그런데 애인과 오면 틀림없이 “갈비 제일 좋은 걸로 주세요!” 그런답니다. 

여러분! 이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행동이 맞는 겁니까? 우리도 주님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 생명 바쳐 주님을 사랑합니다. 찬양합니다. 그런데 내 물질을 드리려면 아까워 못 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헌금은 나의 신앙의 고백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헌금의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정말 우리의 신앙의 고백처럼 우리 마음을 담아서 물질을 드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오늘 이 본문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주님은 헌금의 액수보다 그 마음의 중심을 먼저 보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자세히 한번 봅시다. 3절~4절 말씀입니다.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헌금을 많이 드리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이 여인을 특별히 칭찬하십니다. “저가 제일 많이 넣었다. 제일 많이 드렸다. 저들은 풍족한 중에서 드렸지만 이는 가장 구차한 중에 자기 생활비 전부를 드렸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헌금의 액수를 보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교회 나오실 때 ‘나는 헌금을 제대로 못 드려서 부끄럽다.’ 그런 마음 버리십시오. 헌금의 액수가 적고 많음을 주님께서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헌금보다 여러분의 마음 중심이 그 예물에 담겨있는가를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먼저 마음 중심을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과 아벨의 제사 드린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인은 농사를 져서 그 농사의 수확물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재물을 거부하십니다. 동생 아벨이 양치는 목동인데 그 양을 잡아서 하나님 앞에 드렸는데 하나님이 그 재물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니까 동생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 제사를 안 받으셨다고 생각하고 화가 나서 동 동생을 돌로 쳐서 죽입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주석가의 설명대로 농산물은 하나님이 별로 관심이 없고, 하나님이 피의 제사만 기뻐하신다. 아마 그래서 아벨의 제사만 하나님께서 받으셨다고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볼 때는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마음을 먼저 받으신 것입니다. 정성이 담긴 그 마음을 받으시고, 아벨의 제물까지 받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물보다 우리 마음을 먼저 받으십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느냐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십니다. “나 여호와는 사람의 중심을 보느니라.” 그래서 우리 예물에는 우리 마음 중심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헌금을 드린 동기를 보고 계십니다. 내 마음 속의 깊은 동기가 어떤 동기인가? 그렇습니다. 정말 체면 때문에 드리는 것인가? 직분이 이러니 어쩔 수 없이 남의 시선도 있고, 안 드릴 수도 없고 해서 드리는 것인가?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종종 말씀드립니다만 어느 시골교회가 예배당이 다 허물어질 정도가 되어서 건축헌금을 작정하게 되었는데, 수요일에 우리가 기도회를 하고 헌금을 작정해서 발표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직들은 수요일에 다 나오십시오. 그런데 그 교회에서 가장 재물이 많은 어느 권사님이 ‘아! 이거 수요일에 나가면 체면에 안 할 수도 없고 이거 어떡하나?’ 그래서 감기 몸살이 왔다고 핑계를 대고 앓아누웠습니다. 그런데 이게 아무래도 맘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가장 느지막하게 수요예배에 나갔습니다. 아직 교인들이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을 했는데도 그 액수가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또 함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우리 구합시다.” 하는 그 순간 마침 이 권사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바람이 불어 문이 쾅 닫히는 바람에 위에 있던 나무도막 하나가 떨어지면서 이 권사님의 어깨를 쳐버렸습니다. 권사님이 깜짝 놀라서 엎드려져버렸습니다. 기절 할 뻔 하면서 하나님 앞에 약속을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약속합니다. 제가 천만 원 헌금하겠습니다.” 그랬더니 웬걸! 옆에 있던 집사님이 한 마디 더 합니다. “하나님! 한번만 더 내리쳐 주시옵소서.” 

억지로 하는 헌금도 기뻐하겠습니다만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이왕이면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드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최고보다는 최선의 예물을 원하십니다. 많은 액수의 예물보다는 정말 우리 마음 중심이 담긴, 최선이 담긴 예물을 원하십니다. “네가 최선을 다해 드린 예물이라면 돈 천 원, 이천 원일지라도, 아니 백 원짜리 일지라도 주님은 그 예물을 축복하시고 기뻐하십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일부가 아니라 능히 전부를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이 여인이 칭찬받은 것은 그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생활비 전부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내 생활, 내 시간, 내 건강, 내 물질,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헌금을, 십일조를 드린다면 사실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받은 것이니까 그 전부를 드리는 마음으로 열의 하나를 떼어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 생활하던 것을 다 하고 마지막에 남는 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드린다면 그것은 전부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오늘 여인은 전부를 드렸습니다. 전부를 드린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몸을 드리는 헌신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마케도니아 교회가 참 극한 가난 가운데 처해있었지만 예루살렘 교인들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구제헌금을 보냈는데 그들의 힘에 넘치도록 헌금을 보내는 장면을 고린도교회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자신을 드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마음을 먼저 드렸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먼저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들이 구제헌금을 우리에게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을 드리기 전에 우리의 마음이 먼저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헌신의 예물입니다. 주님 바로 우리 자신 전부를 드리는 예물을 기뻐하시고 그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예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예물이 적다고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 중심이 담긴 예물이라면 하나님은 어떤 큰 예물보다 더 기뻐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오병이어의 이야기를 잘 알지 않습니까? 한 소년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왔는데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왔습니다. 마침 예수님이 찾으시니까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얼마나 귀하게 사용하십니까? 그러나 우리의 작은 예물일지라도 거기에 정성이 담겨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예물을 통해서 크게 역사하실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제물보다 그 마음 중심을 먼저 보십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우리의 물질이 선한 사업에 쓰임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물질이 가치 있는 일에 쓰임 받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은 바로 그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여기저기 다니시면서 선교 사업을 하실 때 수입이 없으셨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선교사역을 도와드렸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 보니까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 새 막달라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많은 여인들이 자기들의 물질을 가지고 와서 주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의 물질을 드릴 때 하나님의 교회는 그 물질을 하나님 앞에서 잘 관리해서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선교사역을 하는 일에, 구제하는 일에, 또 교회를 운영하는 일에 요긴하게 쓰이도록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선교사역에는 여러분의 물질이 필요할 것입니다. 

여러분! 몇 주 전에 우리가 마석기도원 성풍회 집회에 참석을 했습니다. 다른 때에 비해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거의 두 배쯤 참석하셨던 것 같습니다. 강사가 특별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유는 한가지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가 여러분의 헌금을 가지고 25인승 버스를 새로 구입을 해서 아침 8시에 버스가 교인들을 태우고 갔다가 집회가 다 마치면 저녁에 10시에 또 교인들이 태우고 오는 것입니다. 우리 권사님들 집에 가시는 것을 가만히 보니까 그 버스 타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물론 주무실 수 없고, 아침 식사를 준비해야 하니까 왕래하는 것이 편하셔서 그렇게 많이 오실 수도 있고, 가실 때도 보니까 버스에 인원이 초과되었는데 안 내리십니다. 땅바닥에 앉아 그냥 가시겠다고 합니다. “아니 그러지 마시고 여기 좋은 장로님 승용차에 타시지요. 승용차 뒷좌석이 훨씬 낫지 왜 버스 복잡한 곳에 타려고 하십니까?” “아니 나는 여기 타야겠다고.” 사정사정해서 다른 분이 내려가지고 결국 승용차에 타셨습니다. 올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원이 초과된 두 분이 거기 그냥 타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러지 마시고 부목사님 승용차가 비었으니까 여기 타시지요.” “그래도 나는 이 차를 타고 싶다고” 왜 그럴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헌금해서 새로 구입한 버스인데 그 버스 타는 것이 그렇게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버스 타려고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그걸 보면서 ‘참 우리가 헌금을 드렸고 이렇게 하나님의 선교사역을 위해서 그 물질이 귀하게 쓰임 받을 때 참 보람이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실 지나간 일이지만 많은 분들이 그 헌금에 동참해 주셨습니다. 제가 처음에는 누가 40구좌만 되면 버스 25인승을 산다고 해서 광고를 40구좌로 했습니다. 그런데 헌금을 하다보니까 45구좌가 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만 하시라고 했지만 계속 헌금을 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버스를 사는데 5260만원이 들었다고 회개 집사님이 보고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헌금이 얼마 들어왔느냐? 5270만원이 들어왔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은 그리 정확하신 분이신지. 헌금 이제 그만하라고 했더니 어떤 집사님이 마지막으로 와서 “목사님 저는 이거 헌금 꼭 해야 합니다. 제가 마음에 작정했던 건데 한꺼번에 백만 원을 못 드리고 제가 다섯 번에 나눠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또 작정을 하시고 헌금 일부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5270만원을 헌금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드려지는 헌금이 이렇게 아름답게 쓰임 받을 때 하나님도 축복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물질이 하나님의 선교 사업을 위해서 아름답게 쓰임 받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헌금을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생각으로 드려야 할까요? 우리가 즐거운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주님 앞에 드리는 헌금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9장에 보니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기쁜 마음으로 드릴 때 하나님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기쁜 마음으로 내십시오. 억지로 내서 시험 들면 안 됩니다. 우리가 즐거운 마음으로 낼 때 하나님이 그 영혼을 축복하시고 또 그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헌금을 드릴 때에는 희생의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원래 예물이라는 말은 sacrifice, 희생. 구약에서 보면 희생의 제물이 예물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에는 어느 정도의 희생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쓸 것을 다 쓰고 남아서 헌금한다는 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목사님들이 가끔 모이면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요즘에는 경제 불황이라고 하고, 장사도 안 되고, 기업도 어렵다고 하는데 헌금이 조금씩 주는 것 같아요.” 이해가 됩니다. 어려우면 줄일 것이 헌금밖에 없거든요. 그렇다고 애들 학교를 안 보내겠습니까? 학원비를 안 내겠습니까? 옷을 안 사 입겠습니까? 헌금이야 안 내도 누가 뭐라고 안 그러니까. 담임목사가 당회장실로 오라고 해서 왜 집사님 헌금을 안 내냐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안내도 그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쉽게 줄일 수 있는 것이 헌금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돌아본다면 ‘내가 헌금을 줄인다면 교회가 계획을 가지고 선교사업도 하고 구제도 하는데 내가 헌금을 줄여서 교회에 차질이 오면 얼마나 어려울까? 내가 다른 걸 줄이면 줄였지 헌금은 줄이지 말아야지’ 이런 마음으로 내가 정성을 담아서 그 예물을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예물에 이런 희생의 마음이 담겨있으면 좋겠습니다. 

19세기 우간다에서 선교했던 한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리처드 범브란트라는 분의 책에서 읽은 일이 있습니다. 그 선교사님이 우간다의 어느 시골지역에 가서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척할 때부터 하나님 앞에 예물 드리는 감사의 절기를 약속을 하고 1년에 한 번씩 드리는 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많이 받았으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물을 드리자!” 이래가지고 그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와서 드리는 절기가 있었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일주일 동안 기도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어떤 예물을 드릴까’ 준비해서 가지고 나와 드리는 것입니다. 선교사님이 보니까 한 남루한 옷을 입은 소녀가 마지막에 나오니까 지갑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 이거 뭐니?” 그랬더니 거기서 내어놓는데 작은 다이아몬드 하나를 내어놓는 것입니다. 선교사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너 이걸 어디서 가져왔니? 너희는 가난하지 않느냐? 이런 것을 어디서 구해왔느냐? 이런 못된 짓 하면 안 된다.” 선교사님은 단정을 지었습니다. 아마 얘가 너무 어려우니까 어디 가서 남의 것을 훔쳐가지고 와서 드렸는가보다. 그래서 꾸짖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소녀가 눈물을 흘리면서 “저는 제 마음을 담아서 이 예물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싶어요.”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이런 것이었습니다. 

너무 너무 드리고 싶은데 드릴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몸을 노예로 팔려가기로 약속을 하고 그 대가로 받은 것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 소녀는 자기가 노예로 팔려가는 대가로 하나님 앞에 그 예물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희생의 의미가 있습니다. 희생의 마음이 담겨있지 않는 예물이라면, 정말 정성이 담긴 예물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여인의 헌금은 주님 앞에 칭찬 받았습니다. 최선의 예물을 드렸기 때문에, 마음 중심의 예물을 드렸기 때문에, 그리고 희생의 예물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늘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예물을 드립니다. 어떤 마음으로 드리십니까? 정말 하늘의 아름다운 상급을 쌓고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그런 예물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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