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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교만치 않으며 (고전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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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교만치 않으며 (고전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 13:4) 


이어서 사도는 또 하나의 사랑의 특성에 대해서 말합니다. 

Ⅰ. 문맥 안에서의 ‘교만’ 

우선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다는 특성 앞에서 사도는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자기를 자랑하는 마음의 뿌리가 교만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대표적인 것이 지식의 교만함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서 사도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문제를 두고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고 말합니다. 무엇인가 남이 모르는 것을 아는 사람이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하여 우월감을 가지지 않는 것은 자연적인 본성으로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런 지식은 비단 이 세상의 사물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까지도 적용됩니다. 즉, 지식의 종류가 문제가 아니라 지식을 어떻게 습득했고 그 지식을 어떻게 유지하고 있느냐가 지식을 통해 교만하지 않는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획득 방식은 믿음과 사랑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과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교통하여 얻은 지식은 절대로 인간을 교만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주님의 말씀을 알고자하는 마음보다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함께 모인 예배의 현장에서 전달될 때 우리를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됩니다. 예배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며 곤고한 나의 영혼을 건져주실 하나님의 전폭적인 은혜를 갈망하며 진리를 듣는 것과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내용을 뒤적이는 것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말씀에는 차이가 없을지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생생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지식이 전달되고 있을 때에는, 우리의 영혼이 깨어짐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교만함이 들어올 자리가 없지만 그 지식이 차가운 정보만 남기고 정보 속에 깃들여 있는 타오르는 불길과 같은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모두 사라진 후라면 얼마든지 그 지식을 사용하여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식의 획득 방법뿐만 아니라 이 지식을 어떻게 거룩한 열정 가운데서, 즉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건 안에서 유지하는가도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이 사랑이 다른 사람에 대한 섬김으로도 나타 날 수 있습니다. 


Ⅱ. 교만의 어의(語意): 퓌지오타이(φυσιουται) 

오늘 말씀인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교만하다”라는 단어는 희랍어로 ‘퓌지오타이’입니다. 퓌지오타이는 바람이 들어 팽팽해지는 것처럼 무엇인가 허황된 가운데서 자기가 우쭐하여 높아져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신약성경 전체에 일곱 번 밖에 나오지 않는데 고린도서에서 여섯 번이나 쓰였으니 고린도교회가 얼마나 많은 경고를 받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도덕적 타락, 우상 문제, 심지어 사도직을 의심한 모든 죄의 바탕이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함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금세 고린도교회를 얕잡아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도대체 고린도교회 만한 교회를 보신 적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사도는 이 고린도 지방에 전도하러 올 때 중대한 결심을 했노라고 회상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전할 메시지와 그 전달 방식에 대한 결단이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로 사도는 순수한 복음으로 돌아가기로 결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도의 많은 사역의 여정 중에 가장 낮은 마음으로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들른 곳이 고린도 교회였고 그런 고린도 교회는 사도로부터 선명한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깨뜨려져 생겨난 것입니다. 

즉 그런 놀라운 구원의 은혜 속에서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통해 많은 은사를 경험한 생명력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이들에게서 사라지자 하나님 앞에서 좋았던 모든 것들 때문에 오히려 이 교회는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지식을 획득할 때에는 믿음과 사랑으로 부흥 속에서 했지만 십자가를 통한 참된 경건이 그들에게 살아 못할 때에 그 사랑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진 채 차가운 논리만이 남아서 사람들을 정죄하는 칼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책 속에서 모든 죄의 뿌리가 교만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사랑이 죄의 뿌리이지만 자기 사랑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목구멍까지 가득 차 있다 할지라도 내가 틀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생각에 반하여 의지가 동의하지 않으면 죄는 마음 안에서 산출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무얼 아시겠어. 내가 더 잘 알지. 먹어도 돼.’라고 하며 선악과를 먹은 아담처럼 마지막에 교만이 작동해서 하나님의 판단보다 나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를 볼 때 우리는 교만이 결국 사랑이 없는 자리에서 생겨난 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Ⅲ. 사랑과 ‘교만’ 

그렇다면 사랑과 교만이 어떻게 밀접하게 관련이 돼 있고 어떻게 우리 안에 교만이 생기고 사라지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원래 사랑은 삼위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랑의 감정을 인간에게도 주셨습니다. 흔히 동물도 사랑을 한다고 하지만 동물들의 경우에 그것은 물질세계의 존속을 위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사랑을 주셔서 하나님을 닮아 사랑할 수 있게끔 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타락 후 겨 겪은 가장 큰 비극도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랑할 힘은 남아 있는데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박탈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대상을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마구잡이로 표출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악이라고 부르고 이에 그릇된 질서에 대한 사랑이라는 형이상학적 정의를 내립니다. 하나님이 올바르고, 아름답고, 선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가르쳐주셨는데 이상하게 사랑이 끌어 오르기는 하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추한 것이 나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금 하나님의 참 올바른 사랑이 인간에게 경험되는 길이 있습니다. 바로 중생과 회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가 우리 죄에 대해서 십자가 앞에서 심오하게 회개하며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사실을 붙들게 될 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비로운 점은 그 사랑의 경험이 언제나 내 안에 있던 것들이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없었던 것이 하늘로부터 확 부어지는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즉 초월적 경험입니다. 

A. 사랑 : 초월적 경험 

그런데 이 사랑의 경험은 하나님의 존재하심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가지고 이야기 할 때 하나님이 당신이 만드신 이 세계와 맺는 관계를 크게 두가지 말로 표현합니다. 하나는 초월성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내재성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만드시고 인간을 하나님 닮게 창조하셨지만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무한한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에 대해 전적으로 다른 존재입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속에 분명히 그어 놓아야 할 선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밖에 있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이 세계보다 작은 셈이 되니 말이 안 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고 비록 피조물이 하나님과는 무한한 질적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을 벗어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어떤 피조물에도 나누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을 비롯해 만물 어디를 살펴봐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거듭난 인간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우실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에 그리스도께 접붙여 지고 성령님이 안에 계신데 인간에게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주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된 일인가? 대답은 이렇습니다. 물론 거듭난 신자의 육체는 성령이 거하시는 전입니다. 그러나 삼위 일체 안에서 성령님이 계신 것과 당신이 인간 안에 계신 것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참 성령님이 맞지만 삼위일체 안에 계신 것처럼 계시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질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어떠한 본질도 이 피조 세계 속에 나누어주시지 않으시고 모든 피조물들을 품고 계시면서 이 피조물을 초월해 계신 분이시라고 하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초월성’입니다. 

동시에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하나님은 우주보다 크신 분입니다. 공간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지 하나님 자신이 공간이거나 혹은 하나님이 공간 속에 일부를 차지하고 계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사랑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처럼 사랑도 신자에게 두 가지 방식으로 경험된다는 점입니다. ‘초월적 방식’과 ‘내재적 방식’입니다. 

초월적 방식은 어느 한 순간 복음 앞에 깨뜨려져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향해 하나님이 큰 사랑으로 찾아오시는 그 기이한 사랑의 경험을 말합니다. 즉 일상적이지 않은 특이한 하나님의 사랑의 부어짐입니다. 그런 사랑의 경험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티끌 같은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고 허물어집니다. 또 하나의 경험은 내재적인 사랑의 경험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가 됐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백 번 양보해서 놀라운 초월적 사랑의 경험이 주어졌는데 죄에서 벗어나기는 힘듭니다. 왜 그럴까요? 영적인 침체 가운데서 세월을 약으로 삼아보지만 사회적 지위, 결혼, 직분 등 겉모습의 변화 이외에 본질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껍데기로 살아가며 진정한 경건 생활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내재적 사랑의 경험의 부재입니다. 일주일 동안 단 30분이라도 마음을 깊이 쏟으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는데 죄를 좋아하는 부패한 본성을 가진 인간이 곤고하게 살 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신을 번쩍 차리고 자기가 틀렸음을 회개 하고 보니까 마음의 밭에 죄가 잡초처럼 자란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기도와 말씀으로 열심을 내며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녹으면서 사랑이, 폭풍처럼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샘솟듯이 흙탕물을 걷어내고 서서히 올라옵니다. 그와 같은 사랑의 경험이 내재적 사랑입니다. 

또한 이것을 가리켜서 ‘죄와 싸워 이긴 승리’라고도 부릅니다. 우리는 항상 위 두 가지를 같이 경험해야 합니다. 초월적 사랑의 경험을 통해 모든 만물을 초월에 계신 지극히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알고 내재적 사랑의 경험을 통해 내 안에 충만하게 계시는, 내 안에 사시는 분은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어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은 자기 존재에 대한 경험을 필연적으로 동반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없음’의 경험입니다. 

B. 사랑과 ‘자기 없음’의 경험 

예전에 하나님을 모르고 자신을 의지하고 살 때 우리는 자신이 매우 가치 있고 힘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 사랑을 경험하면서 이 생각은 여지없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바로 두 가지를 통해서입니다. 

1. 용서를 통하여 

우리는 용서를 통하여 자기 자신이 아무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경험은 자기 신뢰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영원한 친구는 자기였던 사람이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모든 행위는 죄에 물들었고, 그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자신과의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봐라, 난 평생 너만 믿고 따라왔는데 마지막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나는 이제껏 너만 사랑했는데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나를 너는 행복하게 못하고 주님의 그 큰 사랑의 부르심을 향해 귀를 멀게 하였다.” 그 때 자기의 큰 죄를 그리스도 예수께 지우고 자신이 당해야할 흉악한 형벌을 예수 친히 당하게 하심으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지혜를 봅니다. 그래서 이제는 도저히 자기를 신뢰할 수 없습니다. 

2. 은혜를 통하여 

또 하나의 자기 없음의 경험은 은혜를 통해서입니다. 지구를 떠나 화성으로 이주 계획을 세울 정도로 현대는 과학이 발달하였고 그런 점에서 인간의 능력은 대단합니다. 문제는 위대한 과학의 문명을 이룬 지금도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 인간의 마음을 자기 의지로 1mm도 옮겨 놓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전적인 무능입니다. 어둠 속에서 행하던 악들이 낮에 행해지는 시대가 와도 그곳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창조하신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은 인간의 마음 하나만 움직이면 되지만, 수많은 교육과 과학의 증거들을 아무리 들이대도 인간의 악한 본성을 바꾸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은혜’의 힘입니다. 은혜를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지만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모두 똑같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더 가치 있고 덜 가치 있는 사람이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고 그 크기는 선한 의지의 크기로 결정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고 한 인간의 가치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선한 의지의 크기에 달려있습니다. 이 선한의지가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만드신 목적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의 크기인데 이것은 사랑의 감화에 의해서 계속 성장하는 의지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C. 사랑: 하나님의 뜻을 실행함 

그래서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악과 죄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힘으로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하늘의 거룩함을 향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 때 인간이 씩씩하게 사는 것을 통해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심으로서 그 일들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러한 은혜를 통해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고 심지어 불신자에게 까지도 이 사랑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경건의 요체가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 두렵고 떨리기 때문에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고 사랑한다고 해서 그 분 앞에서 아무렇게나 할 수 없는 두 가지가 통섭된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 안에서 자신이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그 하나님으로부터 경험되는 용서와 은혜를 통해 겨우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모든 존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견되며 이 세상 모든 사람과 우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기쁨으로 하는 이것이, 또 다른 하나님의 사랑을 통한 자기 없음의 경험입니다. 


Ⅳ. 우주적 흐름으로서의 사랑 

이러한 사랑은 우주적인 흐름으로서의 사랑입니다. 하나님 당신 자신 안에 있는 사랑, 그리고 사랑이신 당신 자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그리고 우리가 아닌 당신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돌보시는 호의는 모두 구분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모두 하나의 아름다운 흐름을 형성합니다. 우주를 휘돌아 당신 자신 속으로 다시 회귀하는 사랑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티끌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그런 아무 가치 없는 존재인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서 섬기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자기 아들을 죽기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그 큰 사랑의 파도 앞에서 깨달은 사랑이 우리 안에 살아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교만해 질 수 있겠습니까? 

Ⅴ. 결론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다만 들에 피는 꽃과 같은 것이 인간인 것을 알고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구속이유를 생각하며 그 아름다운 인생의 목적을 따라 살계하신 은혜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고 싶은 대로 우리의 인생을 사용해주시도록 기도하고, 위로는 하나님을 아래로는 이 땅의 수많은 이웃들을 사랑하며 살았던 예수 만난 이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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