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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시대를 향한 진통 (출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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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를 향한 진통 (출 1:1~14)


지금으로부터 약 150여 년 전인 1859년에 유명한 책 세권이 발행되었습니다. 

먼저는 찰스 다윈이 발표한『종의 기원』입니다. 자연과학의 큰 변화를 일으킨 책입니다. 이 책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동물에서 진화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인간에 대한 생각의 대 변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둘째는 칼 마르크스가 『자본론』의 모태인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을 발표했습니다. 사회과학계의 큰 변화를 일으킨 책입니다. 

셋째는 인문학계의 기념비적 저작인 『자조론(Self-Help)』이 나왔습니다. 새무얼 스마일즈(Samuel Smiles, 1812~1904)는 이 책에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것은 오랫동안 수많은 인간의 체험을 통해 검증된 진리다. '자조(自助)' 정신은 자기계발의 뿌리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의 삶을 통해 드러나면 한 국가의 국력이 된다. 타인의 도움은 자신을 나약하게 만든다. 그러나 자신이 자기 스스로를 돕는 것은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자조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 이야기입니다. 이 세 권의 책은 사람들의 관심을 하나님에게서 인간에게 돌려놓았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삶, 하나님 중심의 삶이 아니라 물질 중심의 삶으로 방향을 돌려놓았습니다. 

그래서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신은 인간의 허구적 창조물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한계를 초월하기 위한 투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종교는 현실의 고통을 이상적으로 풀기 위한 출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종교는 환상적 행복으로 인간을 기만하는 민중의 아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니체는 하나님은 죽었다고 말하며 기독교 도덕은 노예 도덕에 불과하다는 주장합니다. 불가지론자들은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안 믿는 것과는 무관하게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존재하시지 않는 것처럼 행동을 합니다. 실천적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은 역사에 개입하시지 않고 실제적 삶에 간섭하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과학문명이 극도로 발전된 정보사회에서 인간의 행복과 복지를 보장하는 것은 복지사회를 만드는 정부이고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을 보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돈이라고 말합니다.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 양심의 문제는 단지 물질의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심리 치료를 통해 인간은 죄의식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고, 죽음을 극복하고 양심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시10:4)”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14:1)”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시 2:4)”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오늘도 이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십니다. 역사를 궁극적으로 계획하시고 섭리하시고 진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십니다. 인부들이 열심히 건물을 짓지만 결국 설계자의 설계도대로 짓는 것입니다. 선생님들이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결국 교과서를 지은 저자의 가르침대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컴퓨터가 열심히 일을 하지만 결국 프로그렘어들이 만들어 놓은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역사는 인간이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우리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대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롬 11:36)” 

오늘부터 출애굽기를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창세기는 시작의 책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선택하는 선택의 책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노아를, 노아의 세 아들 셈, 함, 야벳 중에 셈을, 셈족 중에서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두 아들 중에 이삭을, 이삭의 아들 중에 야곱을 요셉을 통하여 기근을 예비하게 하고 12지파를 애굽에 이주시키게 합니다. 출애굽기는 구속의 책입니다. 구속의 필요성(1-6)을 말씀합니다. 각족 재앙을 통하여 구속자의 능함을 말씀합니다(7-11), 피로 값을 치르고 구속하는 구속의 특성을 말씀합니다(12-18). 순종을 통하여 구속받은 사람들의 의무를 말씀합니다(19-24). 구속받은 사람들이 지켜야 할 신앙생활의 기본법을 말씀하십니다(25-40). 결국 역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의 요절 말씀은 출애굽기 3장 7-8절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듣고, 알았다는 것입니다. 1장 2장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상황을 보고 듣고 아신 것입니다.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말이 “내가 내려와서”라는 말씀입니다. 이 내용이 3-11장까지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애굽으로부터 건져냅니다.(12:-13:)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광야에 인도하여(14:-18:) 가나안에 이르게 합니다(19:-40:) 오늘 창세기 마지막에 기록된 요셉의 시대가 끝이 나고 긴 400여년의 침묵이 흐른 후 이제 장정만 60만이 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가족의 역사가 끝이 나고 민족의 역사가 시작되는 새로운 세대입니다.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환영받던 시대가 끝이 나고 핍박 받는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바로가 하나님을 알았던 시대가 끝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애굽으로 이주하여 살던 시대가 끝나고 애굽에서 출국해야 할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요셉이 관속에 들어간 시대가 끝이 나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한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오늘 1장에는 새 시대를 향한 진통이 나옵니다. 새 시대를 향해 나아가는 민족적 진통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오늘 1장에서 보여 주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1. 하나님은 보이지 않다고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1-7)

우리는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이 침묵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창세기가 끝난 후 400여년 동안 긴 침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무슨 일이 읽어났습니까? 1절부터 7절까지 400여년의 긴 침묵속에서 일어난 유다 민족에 대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간략한 기록입니다. 

야곱이 살던 시절 큰 가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라일강이 있는 애굽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생활고에 의한 피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성취하기 위한 예비적 조치였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로 애굽에 팔려갔습니다. 가족의 아픔입니다. 그런데 그것 역시 하나님의 예비된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셈족 가운데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무엇이라고 약속해 주었습니까? 창세기 15장 13절 이하를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창 15:13-14)”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약속해 주었습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 12:2)”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창 22:17)”
애굽으로 내려가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약속해 주었습니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창 46:3)”

400년 만에 장정만 60만으로 성장하였습니다. 1절에 야곱과 함께 각기 권속을 데리고 그의 아들들이 애굽에 이르렀지만 7절에 보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온 땅은 고센지역을 말합니다. 칠십인으로 시작하여 창대하게 번성하였습니다. 야곱이 가나안 땅에서 애굽으로 처음 올라올 때에는 남자가 70명밖에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400여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자손은 한 국가를 이룰 만큼 수가 불었습니다. 침묵의 시기는 절망의 시기가 아닙니다. 의혹의 시기가 아닙니다. 의심의 시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하는 시기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더디 이루어진다고 낙심하며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셉이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데는 감옥생활 3년 침묵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는데는 사울에게 쫓겨 다니면 갖은 고생을 한 13년 내지 17년의 긴 침묵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회당제도를 확보하고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더욱 갖게 되기까지는 바벨론 포로 70년이라는 긴 침묵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새 시대를 준비하는 느헤미야도 포로로 잡혀가 있는 침묵의 시기가 있었고 새 시대를 준비하는 에스더에게도 침묵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1세를 새롭게 변화시켰던 바울에게도 침묵의 시기가 있었고 복음으로 새로운 구원의 세계를 펼쳐 가신 예수님에게도 30년이라는 침묵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긴 침묵이 있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있고 그 침묵의 과정의 끝에 가보면 어느새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롬 5:2)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롬 5:3)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4)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롬 5:5)”


2. 고통 가운데 있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진통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8-14).

이스라엘 민족의 번영하였습니다. 참으로 기름진 옥토에서 요셉의 덕을 보며 행복하게 살 줄 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곳에 보낸 이유를 까마득하게 잃어버리고 살 수 밖에 없은 환경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들이 그곳에서 계속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준비할 시간이 되면 그곳에서 나와 하나님이 약속한 땅으로 가야합니다. 그리고 복의 근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켜야 할 민족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곳에서 안락하게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통이라는 극약 처방을 하시는 것입니다. 

애굽에 새로운 왕이 등장하였습니다. 8절에 보십시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었습니다. 요셉을 총리로 등용한 왕은 셈족 계통인 힉소스 왕조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함족 계통인 투트모스 1세가 바로왕이 되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했다는 말은 요셉을 완전히 몰랐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요셉이 돌아가신지 280여년이 경과되었지만 역사 속에서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을 모를 리는 없을 것입니다. 요셉은 셈족 계통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경멸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들은 힉소스 왕조의 업적을 의도적으로 말살하였습니다. 셈족인 요셉의 업적도 의도적으로 과소평가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와서 애굽 사람들에게 어떤 역할을 하고, 애굽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을 때에 어떻게 은혜를 베풀었는가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게 한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면 그들을 마음대로 숙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입증해주는 단어가 “일어나서”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뒤를 잇다는 뜻이 아니라 반기를 들고 일어나다는 뜻입니다. 함족인 그가 새로운 바로가 되어 정권을 잡고 새로운 세상을 펼쳐갈 때 무슨 일을 하는 것입니까?

1) 잘못된 현실 파악

9절에 보십시오. 그 신민들에게 이릅니다. 자신을 신처럼 떠받들어 섬기는 백성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보다 많고 강하다고 말합니다. 현실 파악을 왜곡해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견제하고 숙청하기 위한 명분을 제공하기 위해서 입니다. 고센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전체 애굽 사람에 비하면 얼마나 강하고 많겠습니까? 사실에 근거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과장 해석하여 선동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놀라운 증가에 대하여 두려움과 증오심이 표출된 과장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애굽인들로 하여금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과 민족 감정을 부추겨 그들에 대한 탄압과 착취를 정당화시키려는 저의를 가지고 여론을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정치인들이 늘 쓰는 수법입니다. 오늘날 정치적 언론들이 국민을 자신들의 의도에 맞게 이끌어가기 위해 사용하는 수법입니다. 

2) 잘못된 미래 추측

그래서 바로는 국민에게 무엇을 제안합니까? 10절 보세요. 지혜롭게 다루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롭게 다루자는 것은 교활하게 다루자는 말입니다. 교활하게 다루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대로 방치할 때 미래가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잘못된 추축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추측을 합니까?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 적과 연합하여 자신들을 대적하고 이 땅에서 떠날 것이라고 추측한 것입니다. 요셉 때에 자신의 민족이 기근으로 죽을 위치에 처했을 때 민족을 살려 주었는데 그것과는 정반대로 해석하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압제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세 가지 이유입니다. 

첫째는 두려움입니다. 민족적 동질성과 단결력이 강한 이스라엘 민족의 급격한 수적 번성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것입니다. 
둘째는 강박관념입니다. 애굽 북쪽의 군사적 요충지인 고센에 살고 잇는 이스라엘이 당시 애굽의 주의 열강들과 제휴하여 애굽을 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입니다. 
셋째는 손실감에 대한 염려입니다. 라암셋과 비돔의 국고성 건축등 애굽에 막대한 노동력을 제공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탈출함으로 막대한 노동력 상실에 대한 염려입니다. 

3) 잘못된 현실 대책

그래서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는 무엇을 합니까?
첫 번째 대책은 법과 제도를 통해 통제하는 방법입니다. 당시 전쟁이 많았기 때문에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 건축에 동원령을 내렸습니다. 전쟁이나 기근 등 유사시 대비하여 변방이나 전략 요충지에 곡식이나 병기 보관하는 국고성 건축에 동원하였습니다. 백성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이기 때문에 장정들이 동원령에 거부할 수 없습니다. 박정희 시절 학생들이 데모하니까 제도적으로 학도호국단을 조직하여 통제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워 철저히 관리 감독하였습니다. 육체적으로 무거운 짐, 즉 벽돌, 진흙, 물 등과 같은 것을 몸으로 나르게 하였습니다. 조직적으로 육체적 탄압을 통해 노예화 시키는 것입니다. 마음을 심히 괴롭게 하였습니다(창15:13). 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가혹한 노동력 착취로 육체적 건강 빼앗아 수명 단축하기 위해서입니다. 가혹한 노동력 착취로 수적 증가 막기 위해서입니다. 노예적 삶을 일상화시킴으로 민족의식을 갖을 만한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의도대로 되었습니까? 노동에 지쳐 병들어 죽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였습니다. 잘되는 것입니다. 더욱 수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지쳐 죽어야 하는데 아이는 더 낳고 있는 사람도 더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출애굽 할 때이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 때 애굽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더 큰 강도로 압박을 가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말살하기 위한 두 번째 방법을 쓰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혹독한 탄압정책을 쓰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엄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흙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을 다 엄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입니다. 부인과 아기자기하게 이야기하고 애정을 표한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엄격하게 통제하여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고 살아 있는 사람은 지치고 병들어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도 계속 번성하게 됩니다. 그러자 바로는 최후의 방법을 사용합니다. 직접적으로 접근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가장 폭력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법도 제도도, 체면도 양심도 상관이 없습니다. 반발하려면 하라는 것입니다. 통치자의 최후 선언이고 노골적으로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2명을 세웠습니다. 아마 이들을 산파들의 대표일 것입니다. 이들 밑에 수많은 산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장정만 60만인데 두명이 다 아이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한 명령은 무엇입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아이를 낳으면 남자이면 다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 여자는 살려 두라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노예로 사용하고 설령 결혼을 한다고 해도 함족과 결혼을 하면 함족이 되기 때문에 셈족인 유대인을 완전히 말살시키기 위한 방책입니다. 

우리는 핍박이 다가올 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쓰임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그러나 그들은 떠나지 않습니다. 그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예루살렘에 핍박이 일어납니다. 스데반이 순교합니다. 그러자 사도들을 제외하고 온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이방나라로 흩어지게 됩니다. 빌립 집사님을 통해 사마리아에 부흥 운동이 일어납니다. 개처럼 취급하며 가기 싫어하던 지역입니다. 안디옥 교회에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세계 선교를 감당하게 됩니다. 스데반의 일로 인해서 예루살렘교회에 핍박이 일어난 이후에 각지로 흩어진 사람들이 헬라인에게 복음을 증거 하면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번영이 되면 쉽게 세상과 타협하고 하나님의 뜻을 잃어버립니다. 핍박을 통해 종교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순수해 졌습니다. 핍박을 통해 교회는 개혁되고 순수해졌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10).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마 5:11-1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도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눅 6:22-23)고 했습니다. 


3. 진통 중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통해 보호해 주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15-22).

핍박은 참기 힘듭니다. 핍박이 계속된다면 결국 이스라엘 민족은 이 땅에서 살아졌을 것이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메시야 언약은 성취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시대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사람들을 늘 준비해 두십니다. 아합의 폭정 속에서 여호와 신앙이 말살 될 것 같았지만 엘리야와 엘리사를 남겨 놓았습니다. 이름도 없는 7000명을 남겨 놓았습니다. 

오늘 새로운 시대를 위해 남겨 놓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산파 십브라와 부아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세상의 권력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바로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애굽왕의 명을 어겼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이는 바로의 권력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더 두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습니다.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아무리 통치자의 명령일지라도 제도적으로 살인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데모하는 학생들을 진압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을 향하여 총을 쏘라는 것입니다. 이 때 총을 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권력에 양심적으로 신앙적으로 불복종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산파들은 불복종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왕이 직접 산파들을 불러 신문합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금방 목이 날아갈 것입니다. 어찌하여 남자들을 살렸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때 산파들이 바로에게 어떻게 말합니까?
19절을 보십시오. “히브리 여인들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을 합니다. 우선의 원리입니다. 거짓말이 나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함으로 생명을 죽이는 것보다 거짓을 말함으로 생명을 살리려는 마음에서 한 선의의 거짓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정치권력보다 두려워하여 자신의 목숨을 걸고 생명을 살리려고 했던 산파들에게 어떻게 하였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죽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계속적으로 아이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무엇입니까? 민족적으로 번성했습니다. 백성은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였다고 했습니다. 
산파 개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21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셨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시 25:12)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시 25:13)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시 25:14)” 택한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영혼이 평안합니다. 자손이 복을 받습니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시 34:7)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4:8)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시 34:9)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34:10)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시 34:11)”

여호와의 사자가 둘러 진치고 건지시고, 부족함이 없고, 젊은 사자는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겐 부족함이 없고,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시 145:19)”

그러자 바로는 유다 민족을 말살하기 위한 최후의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신민에게 명령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남자를 낳으면 그들을 하수에 던져 버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우리 하나님은 경건한 사람 모세를 준비시킵니다.

우리는 영원한 천국 새시대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하여 민족이 복을 받고 우리 가족이 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면 내가 섬기는 교회가 부흥됩니다. 내가 다니는 직장이 성장합니다. 내가 가꾸는 가정이 성숙합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이 나라가 안정되고 도덕 질서가 회복되며 건강한 나라가 됩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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