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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금메달보다 귀한 것 (벧전 1: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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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메달보다 귀한 것 (벧전 1:13~19)


여러분, 어제 밤에 어떠셨습니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아마 거의 모든 분들이 올림픽 야구 결승전을 보면서 열광했을 겁니다. 9전 전승으로, 더구나 일본과 쿠바를 두 번 연속 이기고 금메달을 땄으니 정말 대단합니다. 그뿐인가요? 사상 최고 성적인 금메달 13개로 7위를 마크하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스포츠가 전부는 아니지만, 손바닥만큼 작은 나라가 세계 7위라니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매번 그렇지만 이번 올림픽을 지켜보면서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올림픽은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특별히 금메달은 성공의 상징입니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 힘쓰고 애써서 메달을 획득한 선수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취의 기쁨과 더불어 돈과 명예를 거머쥐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메달을 획득하지 못한 선수들은 실망감으로 눈물을 흘려야만 했을 겁니다. 이런 모습들 하나하나가 세상에서 성공을 위해 경쟁하며 분투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분, 올림픽을 모토가 무엇입니까? “보다 빠르게(Citius), 보다 높게(Altius), 보다 힘차게(Fortius)”입니다. 스포츠 정신을 나타내지만,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이런 구호를 갖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애를 쓰고 노력을 기울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분야에서 금메달을 따면 좋겠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앞서 가고 성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쟁에서 뒤처지고 도태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뒤처진 사람들은 물론이고, 앞선 사람들 역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더 앞에 가는 사람들과 비교하며 스스로 불행해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실제로 이런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 보도된 내용인데, 「워싱턴 포스트」지에 소개되었던 내용이라고 합니다. 여러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인데, 올림픽 메달리스트 중에서 행복도 순서가 ‘금-은-동’이 아니라 ‘금-동-은’이라는 겁니다. 은메달을 딴 선수들은 금메달을 놓친 데 대해 아쉬워하면서 힘들어한다고 합니다. 반면 동메달을 딴 선수들은 그나마 메달을 딴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일례로, 미국의 육상 1500m 세계기록 보유자였던 아벨 키비아트는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우승후보였건만 마지막 몇m를 남겨놓고 추월당해 은메달에 그쳤습니다. 90살이 넘은 그는 지금도 한밤중에 깨어나 “도대체 내가 그때 어떻게 해서 금메달을 놓쳤지?”라며 자책한다는 겁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인생에 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세상에서의 성공이 무조건 행복인가? 또 행복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 오늘 성경을 보면, 세상의 성공보다 더 귀한 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행복한 길이 따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물론 금메달 따는 것 좋습니다.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서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는 것 좋습니다. 돈과 명예, 권세를 얻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세상의 금메달보다 귀한 게 과연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통해 금메달보다 더 귀한 것을 발견하시고, 그로 인해 정말 복된 인생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 성경 베드로전서는 사도 베드로가 A.D. 64년경에 기록한 서신입니다. 당시는 네로 황제 대 박해 시대였는데, 베드로는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격려하려고 이 서신을 쓰게 되었습니다. 비록 성도들이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지만, 그래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금보다 성공보다 귀한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1] 세상의 성공보다 귀한 것 : 구원(영생과 천국), 상급   

그러면 세상의 금보다 성공보다 귀한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구원입니다. 영생과 천국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상급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세상에서는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려도 ‘인생무상’이기 때문입니다.

① 인생무상 : 

본문 17절을 보면, 인생을 가리켜 뭐라고 표현합니까? “ ...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인생은 나그네라는 겁니다. 여기서 ‘나그네’라는 단어는 성경 원어 헬라어로 ‘파로이키아스’(paroikiva")인데 본래 ‘지나가다’라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사는 게 마치 지나가는 과객(過客)과 같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짧고, 인생 가운데 행한 모든 것들은 허무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벧전1:24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인생이 풀과 같이 신속하고, 인생의 모든 영화가 꽃과 같이 허망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십년 세도 없고 열흘 붉은 꽃 없다.”(權不十年 花無十日紅)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인생무상을 알기에 내세를 의식합니다. 육신의 삶을 넘어 영혼에 관해 관심을 갖습니다. 누가복음 1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대농이 농사를 크게 짓고 소출을 많이 얻습니다. 창고가 적어서 확장하고, 그 안에 곡식을 그득하게 쌓아놓습니다. 그리고 이제 편히 먹고 마시며 인생을 즐기려고 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사업에 크게 성공하고 여유가 생기니까, 남은 생애 인생을 즐기려고 한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가리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눅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인간은 육체가 아니므로 영혼에도 관심을 가져야 되고, 영혼이 들어갈 내세를 생각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리석은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너머 영원한 내세 천국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② 영원한 천국 :   

베드로 사도는 벧전1:4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위해 천국의 영원히 썩지 않는 보화를 유업(상속재산)으로 준비해 두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 세상의 것만 바라보면 안 됩니다. 고후4: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만 몰두한다면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무관심한 채 가만히 있으면 자동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 롬3:10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나니 ... ”라고 했습니다. 롬6:23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죄와 영원한 사명에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③ 구원과 상급 :  

그러면 어떻게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욕심을 부린다면 어떻게 하늘의 상급을 받을 수 있습니까? 본문 18절~19절을 보십시오.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오직 예수 십자가 대속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금이나 은처럼 세상에서 아무리 귀한 것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으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죄인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영생할 수 없는데, 죄 사함 받고 의인이 되는 것은 오직 피로 대속하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대속(代贖)이란 말이 중요합니다. 

옛날 노예를 해방시킬 때 노예 값 즉 속전(贖錢)을 주고 삽니다. 그러면 악독한 주인에게서 벗어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값으로 죄와 사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의 대속입니다. 십자가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받는 자만이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영생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들이 있지만 이런 진리를 제시하는 것은 기독교 외에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박해자들 앞에서조차 담대히 외쳤습니다!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사도 바울은 본래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반대하고 핍박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됩니다. 구원의 복음을 깨닫습니다. 빌립보서 3장을 보니까, 그는 유대인 중에 최고 엘리트였습니다.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소유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는 구원을 십자가 복음으로 얻을 수 있기에 세상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3:4~9) 그래서 그는 이 복음을 믿었고, 천국 영생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자신 인생을 복음 전파을 위해 바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지만, 남은 생애 헌신하고 충성함으로 천국의 상급을 얻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의 성공보다, 금메달보다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십자가 보혈입니다. 그 복음을 깨닫는 믿음입니다.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당시 마침 그 부근에 체류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일들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어느 선교단체 사람들이 각국에서 온 선수들에게 이런 전도지를 배포한 것이었습니다. 그 첫 페이지에 타이틀이 “금메달보다 귀한 것”(More than Gold)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페이지에 기록된 메시지의 요지가 이런 것이었습니다. “금메달보다 귀한 게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2] 성도의 고귀한 인생 : 거룩한 나그네의 삶   

그렇다면 과연 누가 고귀한 인생입니까? 이 세상만 생각하면 육신만 생각하면 성공한 사람이요 금메달을 딴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내세가 있기에, 우리에게 영혼이 있기에 예수 십자가를 믿는 성도가 고귀한 인생입니다. 성도는 고귀한 인생이기에 엄벙덤벙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인생이 나그네인데, 특별히 성도는 거룩한 나그네임을 자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성도가 어떤 자세로 인생을 살아야 할까요? 세 가지로 말씀드립니다. 

① 믿음의 인내 :  

세상에는 많은 고난이 있습니다. 특히 성도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 고난이 없이 만사형통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 고난의 연속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그 고난에서 보호하시고 지켜주시고 건져주실 뿐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우리가 믿음으로 인내하며 사는 겁니다. 벧전1:6~7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며 약간 근심하지만 천국의 소망이 있기에 인내합니다. 극복합니다. 승리합니다. 그래서 결국 구원을 지키고 천국의 상급도 받습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여행을 하는 사람이 항상 돌아갈 집을 생각합니다. 때때로 여행이 힘들고 어려워도 주저앉지 않습니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기어코 집으로 향합니다. 마침내 집에 도착합니다. 신앙생활이 바로 이런 겁니다. 우리는 기어코 천국에 들어가야 합니다. 중간에 탈락하거나 주저앉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고난이 와도 믿음을 지키며 나아갑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도 세상에서 때때로 이런 저런 고난을 당하지만, 믿음으로 인내하고 꼭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② 성결한 삶 :  

예수를 믿지 않고 천국을 소망하지 않는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흥청망청 즐기며 살아갑니다. 악한 원수 마귀는 사람들이 정신을 혼미케 하며 사람들이 세상에 흠뻑 빠지게 합니다. 중독되는 것이죠. 그래서 세상에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몰두하다 멸망하게 만듭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에 중독되어 삽니다. 정조 대왕을 그린 드라마 <이산>에 나오는 장면이 기억납니다. 옹주의 아들 정후겸이 세도를 부리다 투옥됩니다. 나중에는 사약을 받게 되는데, 감옥에 있을 때 홍국영이 찾아옵니다. 정후겸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홍국영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권력이란 이렇게 무상한 거요! 나도 이제야 깨달았소. 당신도 조심하시오!” 그러자 홍국영이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대꾸합니다. “그래요?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권력의 맛을 봐야 되겠습니다, 대감!” 그런데 후일 정후겸의 예언이 적중합니다. 홍국영 역시 세도를 부리다 유배를 가게 되었고, 유배지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세상의 권세가 이런 건데 사람들은 그 마지막을 모르고 정신없이 달려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부와 쾌락에 중독되기도 합니다. 카지노를 예로 들면 이러한 중독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습니다. 카지노에는 세 가지가 없다고 합니다. 거울, 시계, 그리고 창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인생을 성찰하고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로부터 차단하고 정신없이 먹고 마시고 놀게 합니다. 결국 그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기에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본문 13절~15절 봅니다.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정신을 차리고 근심하며 하나님의 순종하는 자녀로서 거룩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벧전2:11,4;3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벧전2:11,4:3 “2:11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하나님도 모르고 천국도 모르고 살 때, 세상에 중독되어서 방탕하게 살았지만, 얼마나 시간이 아까운가! 이제는 거룩한 삶을 살라는 겁니다.   

정말 제대로 예수 믿게 되면 모두 이런 심정이 듭니다. “진작 예수 믿을 걸 ... ” 지나간 세월이 아깝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후회하지 않도록 남은 날을 계수하며 성결한 사람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③ 청지기의 삶 :  

본문 17절을 보시죠.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인생을 마친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의식하며 조심하며 최선을 다하라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청지기(Steward)는 소유주가 아니라 관리인입니다. 비행기 승무원을 ‘스튜어드’(Steward) ‘스튜어디스’(Stewardess)라고 하잖아요. 승무원은 비행기의 주인이 아닙니다. 책임을 맡은 관리인에 불과합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다는 겁니다. 

한번은 어느 찜질방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지당하지만 아주 중요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찜질방을 가면 빌려주는 옷(찜질복) 있잖아요. 그 옷도 가져가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지만, 못 가져가게 하려고 로고나 글씨를 새겨 놓잖아요. 그런데 그곳은 아주 큰 글씨로 ‘반납용’이라고 등 뒤에서 새겨 놓았습니다. 사람들이 찜질복을 입고 있으면 얼마나 후줄근합니까? 부자나 가난한 자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비슷비슷합니다. 그런데다가 ‘반납용’이라고 적혀 있으니까 웃기면서도 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저 옷도 반납용이지만, 사실은 인생 자체가 반납용이구나.”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반납용입니다. 언젠가 하나님 앞에 돌아가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베드로 사도가 권면합니다. 벧전4:7,10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여기서 ‘여러 가지 은혜’란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게 맡겨주신 것들입니다. 재능, 시간, 물질, 그리고 그밖에 인생에 주어진 모든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얼마나 잘 사용했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평가받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단순히 천국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하나님의 뜻대로 헌신하며 살았느냐 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셨던 대로 하나님께서 상급 심판을 하실 겁니다. 

그래서 이런 경구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 최후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내가 얼마나 벌었는가?'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주었는가?’ 혹은 ‘내가 얼마나 드렸는가?'일 것이다.”(조지 스위팅) “우리는 죽은 후에도 그 가치가 지속될 수 있는 일에 우리의 일생을 투자해야 한다.”(윌리엄 제임스) 아무쪼록 이 말씀을 명심하고 남은 생애 선한 청지기의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 앞에 칭찬받고 천국에서 큰 상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3]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기회 : 신앙의 금메달   

이러한 구원과 상급은 모든 성도들에게 균등하게 주어진 기회입니다. 세상에서는 성공하는 사람, 금메달 따는 사람이 각 종목별로 오직 한 명입니다. 소수에 불과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언감생심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금메달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인생 평가 방식은 세상의 방식과 전혀 다릅니다. 세상은 상대 평가를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 평가를 하십니다. 세상에서는 사람들을 줄 세워 놓고 등수를 매깁니다. 이게 상대 평가입니다. 그래서 금메달을 딴 사람은 열광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눈물을 흘립니다.   

우리가 금메달 딴 사람들에게 열광하는 것은 그들의 인간 승리에 박수를 보내는 것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대리만족일 수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뒤처집니까? 실패합니까? 좌절합니까? 그런 가운데서 멋지게 승리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게 대리만족으로 분출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인생을 절대 평가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잘 하면 얼마든지 신앙의 금메달을 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계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종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직 젊다고, 아직 건강하다고 방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천국에서 주님 만날 그 날을 생각하면서 신앙에 매진하시기 바랍니다. 빌3:13~14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인생의 결승점을 향하여, 천국의 시상대를 향하여 매진하는 겁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단 한번뿐인 인생, 세상에서 성공하든 성공하지 못하든 적어도 신앙에 관한 한 당당히 금메달을 따는 복된 인생, 존귀한 인생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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