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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달음질하라 (고전 9: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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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음질하라 (고전 9:24~27)


북경올림픽이 절정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 선수들도 선전을 해서 예상외의 많은 메달을 따고 있습니다.  지치고 힘든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어떤 백화점에서는 이번에 한국선수들이 금메달 12개 이상을 따면 차량 수백대를 경품으로 주겠다는데 생색내려고 했다가 실현가능성이 높아지자 큰 고민에 빠졌다는 소식도 있습니다.

올림픽의 역사는 고대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고, 문명과 문화가 발달되고, 도시와 나라가 경쟁을 하던 옛날에도 올림픽과 같은 운동경기가 있었습니다.  경기를 통해 개인의 영예는 물론 나라의 경쟁력을 높였습니다.  그래서 크고 작은 나라들마다 운동선수를 마치 군인처럼 양성을 시켰고, 당시 선수들은 오늘보다 훨씬 더 운동경기이상의 의미를 갖고 경기에 임했습니다.  그래서 경기하다가 전쟁도 했습니다.  그러니 선수들은 죽을힘을 다했고, 올림픽에서의 면류관을 위해 마치 전쟁터에 임하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 준비하여 경기의 승리로 인생역전을 했던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고린도라는 도시에도 운동경기가 있었습니다. 고린도에서는 3년마다 ‘이스드무스’라는 경기가 열렸습니다.  그 규모가 꽤 컸던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당시 경기를 비유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당시 선수들이 개인과 나라의 영예를 위해 최선을 다해 달음질하고, 경기에 임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마치 경기에 임하는 선수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수들이 면류관, 메달을 목에 거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도 면류관, 메달을 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본문에서 면류관을 위해 달려가야 하는 신앙의 올림픽에서 늘 마음에 품어야 할 것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바울은 그것을 3개의 중요한 단어로 심어주고 있습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절제’입니다. 

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당시도 그렇지만 오늘날도 선수들은 무엇보다도 절제를 통해 시합을 준비합니다.  운동선수들에게서 절제는 곧 ‘조절’입니다.  선수가 조절에서 실패하면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선수에게 필요한 조절이 무엇일까요?  많은 것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체중조절이 필요합니다.  모든 경기는 체중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큽니다.  

어떤 선수들은 마지막 순간에 체중조절을 못해 아쉽게 경기에 임하지 못하고, 메달에서도 멀어지고, 선수의 생명까지도 끊어지는 것을 봅니다.  체중조절과 함께 필요한 것은 바로 호흡조절입니다.  모든 운동은 기본이 바로 호흡에서 시작됩니다.  마라톤은 말할 것도 없고, 수영, 역도, 사격, 양궁도 호흡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호흡을 조절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달라집니다.  사람이 긴장하면 호흡이 가파르게 되고, 흥분하면 불규칙해 집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어떤 좋은 성적도 올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수들은 체중조절과 함께 호흡조절을 잘해야 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당시 선수들의 이런 절제와 조절을 보면서 이기기를 위해 선수들도 이렇게 절제하는데 썩지 않은 면류관을 위해 달려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얼마나 절제가 필요한가를 강조합니다.


신앙의 체중조절은 곧 욕심조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본래부터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앙의 중요한 모습으로 욕심을 다스리고 조절하라고 권면합니다.  왜 성경이 욕심을 조절하라고 말할까요?  그것은 먼저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를 가지면 둘이 있어야 하고, 둘을 가지면 열, 스물에 관심을 갖는 것이 인간입니다.  욕심을 통제하지 않으면 결코 신앙올림픽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욕심은 반드시 좋지 않는 결과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욕심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죄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욕심을 부려 좋게 된 경우가 없습니다.  한사람 아간의 욕심이 이스라엘의 큰 실패를 경험하게 했습니다.  아합 왕의 욕심이 착하고 선한 사람 나봇을 죽이는 살인을 만들었습니다.   가룟유다의 욕심이 스승을 배반하는 파렴치한 결과를 낳게 했습니다.  이처럼 욕심은 죄를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느니라” 그래서 욕심을 조절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나의 삶에 감사와 만족과 수용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욕망은 통제됩니다.  

신앙의 호흡조절은 곧 감정조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정은 지식, 의지와 함께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입니다.  감정이 있기에 울고, 웃습니다.  감정이 있기에 말하고 표현합니다.   감정이 있기에 받아드리고 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감정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문제는 감정이 일정하게, 정상적으로 가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감정이 폭발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호흡이 정상적이지 않고 거칠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감정은 순간적이고 변하기에 조절이 가장 중요합니다.  살인자의 대부분은 바로 감정조절의 실패에서 나옵니다.  특별하게 자기의지로 죽이겠다는 것을 빼놓고, 모두 감정조절의 실패에서 사람이 분노를 발하고, 집어던지고, 칼을 들이대고, 죽이는 것입니다.

신앙의 경주에서 절제, 조절이 중요합니다.  욕심을 조절하면서 자족하는 마음으로 살고, 감정을 조절하면서 인격을 다듬어야 합니다.  이런 절제된 믿음의 사람으로 한평생 승리와 영광의 길로 달음질하여 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방향’입니다. 

계속되는 26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지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라고 말합니다.  달음질하되 향방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 모르면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향방, 방향은 곧 목표를 말합니다.  달음질 하는 선수에게 목표가 있습니다.  목표가 없으면 선수의 의미가 없습니다.  목표가 있기에 견디는 것이고, 힘을 내는 것입니다.  목표가 있기에 갈 방향을 생각하며 삽니다. 선수들은 목표를 비전과 꿈으로 삼아 결국 그 길로 가는 것이고, 마침내 뜻을 이룹니다.  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 방향은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우리 신앙생활의 원리로 잘 심어줍니다.  바울자신도 자신의 모든 삶은 한마디로 방향 있는 삶, 목표가 있는 삶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푯대를 향하여, 저 위에서 부르는 부름의 상을 위하여 계속해서 달려갈 것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 입니다.  신앙올림픽에서 메달을 얻기 위해서는 방향이 있어야 합니다.  목표와 꿈과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름을 받고 우리가 가질 방향은 크게 2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 방향은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가신 길이고, 또한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우리도 그 뒤를 따라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을 받고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신앙과 삶의 표준이 되는 교리문답에서도 인간의 가장 귀한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잊지 않아야 할 방향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금까지 살았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달려가야 합니다. 특히 우리교회가 추진하는 성전건축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입니다.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는 학개선지자의 말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합니다.  이제 아름다운 성전에서 하나님은 더 큰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순간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살면 좀 더 진지하고, 솔직하고, 겸손하고, 거룩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있는지 깊이 돌아보고 이제 앞으로의 방향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되도록 하나님을 한순간데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천국을 향한 방향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상급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닌 것을 압니다.  믿는 자는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기쁨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단순히 죽어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주시는 분이심과 동시에 상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을 평가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는 자가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급에 대해 강조합니다.  본문 24절에도 이렇게 말합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세상에서도 열심히 달리면 상을 받고, 인정을 받습니다.  하물며 하늘의 하나님께서 잘 달리며 천국까지 다다른 성도들에게 상을 주지 않겠습니까?  분명 세상의 상이 있는 것처럼 하늘의 상도 있습니다.  그날에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상급을 얻기 위한 땀과 수고와 눈물의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을 얻는 것은 평등하지만, 상급은 결코 동일하지가 않습니다.  상급을 위해 앞서간 선진들이 피와 땀과 눈물로 헌신한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수고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방향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부름을 받고 여기까지 왔는데, 남은 생애 동안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저 천국에서는 나를 위해 기다리는 상급을 바라보며 오늘도 내일도 잘 달음질하며 나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복종’입니다. 

본문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바울은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달음질하는 성도들에게, 그리고 자신도 달음질하는 신앙생활에서 무엇보다도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하는 것이 너무도 중요한 요소인 것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종은 절제와 비슷하지만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절제가 조절이라면, 복종은 훈련의 의미로 사용된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 복종이란 말의 뜻은 ‘종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내 몸을 날마다 다스리고 쳐서, 마치 종으로 만드는 것처럼 그렇게 철저하게 훈련하고 연습하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내 몸, 육신, 내 삶은 훈련으로 된다는 뜻입니다.

운동선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훈련입니다.  얼마나 훈련했느냐가 결국 경기장에서 나타납니다.  많이 훈련하고, 철저하게 훈련하고 연습한 만큼 결과를 얻는 것입니다.  연습하지 않고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훈련하지 않고 성공하는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선수가 가는 길입니다.  그들은 뼈를 깎는 훈련을 받습니다.  그들은 오직 이기기 위해 평생을 훈련과 연습으로 지냅니다.  아침에 일어나 훈련하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갈 때까지 강한 훈련을 해야 합니다.  결국 그 훈련이 경기에서 열매와 결실을 맺습니다.

훈련과 연습은 비단 운동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훈련이 빠진 곳이 있나 보십시오.  모든 것은 다 훈련으로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연습하고 훈련했느냐가 결국 얼마나 성공하느냐로 판가름 납니다.  적당히 한 것은 적당히 끝나지만, 철저한 훈련은 열매를 맺습니다.

세상의 원리가 훈련과 연습이라면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신앙생활만큼 철저한 훈련과 연습을 요하는 영역이 없습니다.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고, 내적이고 영적인 부분이기에 더욱 훈련과 연습을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성숙과 승리를 위해 연습해야 합니다.  훈련을 받지 않으면 그만큼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칩니다.  그래서 준비된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 교회요, 그런 사람들이 일꾼이 될 때 교회는 잘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아주 귀한 의미를 내포합니다.  먼저 이 말은 신앙생활에서 경건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에서 경건이 빠지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경건은 곧 연습으로 된다는 의미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말은 바울자신도 경건을 위해서는 철저한 연습으로 살아온 것을 고백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바울 같은 영적인 사람, 능력의 사람, 성령의 사람, 믿음의 사람은 굳이 훈련이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경건을 위해 투자하지 않아도 능력이 저절로 임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만큼 평생 훈련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바울만큼 바른 삶을 위해 몸부림치며 살던 사람이 없습니다.  바울만큼 경건에 치중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남긴 업적 때문에 그는 늘 뭔가 일하는 것에 치중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바울이 지금 여기에서 내 몸을 쳐서 복종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의 몸보다도 자기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중심에는 늘 말씀과 기도가 있었습니다.  

모든 능력은 다 경건에서 나온 것입니다.  경건을 위해 훈련한 자기의지와 노력의 결과입니다.  어쩌면 그토록 경건에 치중했기에 당대와 후대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만약 경건을 소홀히 하고 일에만 매달리고, 보이는 것만 쫓아갔다면 결코 우리 앞에 서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훈련은 자기노력과 의지가 중요합니다.  경건의 연습은 무엇보다도 자기투자가 있어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성공을 위해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비지땀을 흘려도 성공할까말까 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하물며 신앙생활의 성공을 위해 훈련하지 않고, 투자하지 않고, 어떻게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경건을 위한 철저한 훈련과 연습으로 사람은 거듭나고, 사람은 성공하고 승리하며, 사람은 좋은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달음질하라’는 것이 오늘 주신 말씀입니다.  올림픽을 보면서 우리도 신앙올림픽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절제, 조절이 필요하고, 방향, 목표가 정해져야 하며, 그리고 복종, 훈련이 뒤따라야 합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한주간도 잘 달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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