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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구의 눈치를 보는가? (마 27: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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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눈치를 보는가? (마 27:11~26)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들의 시기로 … 

현재 모든 기독교인들은 
사도들의 믿음을 정리한「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합니다.
우리도 조금 전에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거기에는‘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큰 역할을 한 죄인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지금이 사순절 기간도, 고난주간도 아닌데 왜 본디오 빌라도 얘기를 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얘기를 하는가? 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요즘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 대해 설교 중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만난 것이 축복이고, 영광인데
빌라도는 역사를 이어가며, 대를 이어가며 사람들에게 비난만 받습니다.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난 것이 감사하고, 은혜롭고 
하나님께 영광된 만남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붙잡혀 갔습니다. (마 27:57)
예수님을 잡아간 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거짓 증거를 찾으려고 했습니다.(59절) 

그런데도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 앞에서
“ …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26:64)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대제사장은 옷을 찢으면서
사형에 해당하는 ‘신성모독죄’라고하며 분개했습니다.(65~66절)
드디어 예수님을 죽일 죄목을 찾은 것입니다. 
새벽이 되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마 27:1)
예수님을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마 27:2)
이렇게 해서 예수님과 빌라도가 처음 만났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고발하는 이유가
자신이 개입하기 싫은 종교적인 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 …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 ”(요18:31) 고 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식민지에 사는 
“ …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요18:31)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에 따라 죄인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이려고 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요8:1~11)
그러므로 예수님을 잡아간 유대인들은 마음만 먹으면 예수님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총독 빌라도에게는 
자신들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다고 말했습니다.(요 18:31)
이 말은 자신들에게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권한이 없다’는 의미였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처형은 로마의 사형법으로
로마에서 파송한 총독 빌라도의 허락에 의해서만 집행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긴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함으로
‘예수가 하나님께 저주 받아 죽은 자’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 보면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3) 

나무에 달린 자, 십자가에 달려 죽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저주 받아 죽은 것이 됩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 당시 종교적 기득권을 쥐고 있었던 
종교지도자들을 계속해서 비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 독사의 자식들(마 12:23)
- 회칠한 무덤(마 23:27) 같은 사람들이라고 하며 꾸짖으셨습니다. 
그러니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좋아할 리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죽여 버리고 싶은데
특별히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함으로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람’으로 묻어 버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들이 지금까지 누려온 종교적인 특권을 계속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목을 붙여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마 26:63~66)

그러나 신성모독 때문에, 종교적인 문제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신성모독」은 종교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빌라도 총독이 죄의 유무를 판단할 사항이 아닙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 …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여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 ”(눅23:2)
라고 하여 예수님을 반란죄로 고발했습니다. 

당시 유대 땅을 지배하던 로마 정부에 대한 반란죄라면
빌라도 총독이 심문하여 십자가형(刑)을 내릴 수 있는 죄목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 …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 ”(마 27:11)라고 물으며 
예수님을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님을 심문해도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할만한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를 
예수를 자신에게 넘겨준 이유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마27:18) 
빌라도도 왜 예수를 넘기는 지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의 죄를 찾지 못했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무죄를 유대인들에게 알렸다고 했습니다.(눅 23:14,15,22, 요 18:38)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 

빌라도는 죄가 없는 것이 밝혀진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했습니다. 
때마침 민란과 살인으로 붙잡혀 갇혀 있는
「바라바」라는 죄수가 있었습니다. (눅 23:19)

당시 유대인들에게 명절이 되면 죄수 한 명을 풀어주는 관례가 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사람들에게 
살인죄를 저지른 바라바와 아무 죄도 없는 예수가 있는데
둘 중에 누구를 놓아주기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마27:17) 

빌라도는 명백하게 죄가 드러난 바라바와 죄가 없는 예수님 중에
백성들이 예수를 놓아주라고 할 것이라고 예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죽이자고 했습니다. (마 27:20)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마 27:22)

그러자 빌라도는 
“ …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 ”(마 27:23) 하며
유대인들의 반응에 놀랐습니다. 
빌라도는 죄가 없는 사람을 죽일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예수를 풀어주려고 했습니다. 
- 누가복음에는 빌라도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놓아 주려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23:22)
-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무리들에게
“ …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요 19:6)고 하며
빌라도는 나름대로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힘썼습니다. (요 19:12)

그러나 빌라도가 예수를 풀어주려 하면 할수록 
유대인들은 더 흥분하였습니다. (요19:12)
그러자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면 
유대인들이 민란을 일으키는 것은 아닌가 하고 염려했습니다.

이렇듯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빌라도는 성난 군중들의 마음을 달래주어야 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15절에 보면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막 15:15)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도 사람들의 압력에 의해 …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 환심을 사기 위해 … 백성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
사실과는 정반대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요즘도 … 빌라도 같은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 성경말씀대로 산다고 하면서 …
어떤 일에 있어 빌라도 같은 결정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보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일에 더 신경을 씁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를 쓰며
여론대로 물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요령”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보고 그 길을 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사람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보다 사람의 뜻을 따라 살 때가 더 많습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면, 
직장생활 하는 분들이 가장 곤란해 하는 자리가 ‘회식자리’라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참 이상합니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도, 끝낼 때도 꼭 먹어야 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밥을 먹어야 하는 일이 참 많습니다.
마음을 표현하는 일이 밥을 같이 먹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회식자리가 많습니다.

그런데 밥만 먹습니까? 술도 먹습니다.
술만 먹습니까? 노래하고, 춤도 춥니다.
그런데 신앙 양심에 따라 안 어울리고 안 먹자니 
사람들의 눈치가 보입니다. 마시자니 양심이 찔립니다.

믿는 사람답게 행동하려고 하면‘너 혼자 뭐가 잘 났냐’며 사람들이 손가락질 합니다. 
심지어 분위기 깬다고 싫어하고 미워하기까지 합니다. 
앞으로 직장 생활 하는데 불이익을 줄 것처럼 협박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그럴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어떻게 하시렵니까?
여론대로, 분위기 따라,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
미움 받을까봐 …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하고
많은 사람이 가는 쪽으로, 많은 사람이 기대하는 쪽으로 가다보면
빌라도 같은 결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손을 씻으며 … 나는 무죄하니

오늘 본문의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주면서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었습니다. (마 27: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마 27:24)

손 씻었다고 해서 죄까지 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주려는 노력은 했지만
그는 결국 군중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준 결정권자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어 자신의 총독자리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요즘 사람들은 … 예수 믿는 사람들은 …
경제적 이익 앞에서 … 사회적인 성공, 출세 앞에서 …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내 놓습니다. 
친구들 앞에서 … 즐거움을 위해서 … 인기를 위해서 …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과 타협하며
적당하게 / 편안하게 / 유연성 있게 …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히면 유익이 될 것 같은 자리에서는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밝힙니다. 
그리나 예수 믿는 다는 것이 밝혀지면 불리할 것 같은 자리에서는 입을 꼭 다뭅니다.
그리고 핑계를 댑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어!’
‘하나님도 날 이해해 주실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하며
빌라도처럼 손을 씻으며 예수님을 내어줍니다. 

참으로 그럴듯한 이유로 … 당당하게 … 태연하게 …
예수님을 내어주었다 불러들였다 하며 
그럴 수밖에 없었다며 … 편한대로 삽니다.

에덴동산에서 처음 사람이 했던 말이 ‘핑계’였습니다.
‘하나님 저와 같이 살라고 한 저 여자가 내게 사과를 먹게 했습니다.’ 

미래의 어느 날 사람을 가장 많이 닮은 우수한 로봇 선발대회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사람 닮은 로봇을 만들어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많은 로봇 중에 세 로봇이 주목받았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이 로봇은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고장 나면 자기가 A/S 센터에 직접 연락합니다. (30점/100점)
두 번째 로봇은 고장 나면 자기가 직접 고칩니다. (50점/100점)
세 번째 로봇은 고장 나면 “옆에 있는 로봇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다른 로봇 때문이라고 핑계를 댄 로봇이 
사람을 가장 많이 닮아서 1등 했다고 합니다.
우리들은 말이 많습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습니다.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자기 유익한 때에 인용하여 성경을 써먹습니다.

어떤 남자가 기차 여행을 하는데 
옆의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보니 둘은 모두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런데 점심때가 되자 그 중 한 명이 
샌드위치 도시락을 꺼내 기도를 하고는 점잖게 혼자 먹는 것이었습니다.
옆의 남자는 옆 사람에게 먹어 보라는 말 한마디 없는 게 너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그는 시장기를 느끼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는 은근히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형제님, 나는 요즘 주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더군요. 
특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 말입니다.”
그러자 상대는 도시락을 감싸며 말했습니다.
“네, 참 좋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저는 ‘네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말씀이 
얼마나 귀한 말씀인지 모르겠더군요.”
<2008. 8. 9. 스포츠서울 19면>

안주겠다는 말입니다.
성경 구절도 자기 마음대로, 자기 편한 대로 인용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사십니까?
빌라도도 나름대로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손을 씻으며 예수님을 내어 놓았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 믿는 사람임을 드러내야 합니다.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가족 앞에서 … 친구 앞에서 … 학교에서 …, 일터에서 …
식당에서 … , 심지어 목욕탕에서조차 … 예수 향내 풍기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목사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으로 서느냐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제가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냐에 관심 갖고 산다면 저는 목회하면 안됩니다.
우리 교회에 많은 장로님들이 계시는데 
제가 어떤 장로님의 눈치를 보고 그 분이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고 
말 많은 어떤 집사를 신경 쓰고, 권세 있는 어떤 권사에게 신경 쓰며
‘이 설교를 하면 그분이 싫어하지나 않을까?
저 설교를 하면 그분이 화를 내는 것은 아닐까?’한다면
제가 어떻게 설교하고 목회하겠습니까.

우리는 사람들이 비웃더라도 사람들이 싫어해도 … 인기 떨어져도 …
수입이 줄어도 …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 본디오 빌라도 더럽게 불려지는 이름처럼 
우리의 이름이 불려 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름이 어디에서 불려지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이름을 사람들이 들으면 어떤 생각을 합니까?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름을 개명하기가 쉬워졌다고 합니다.
<강아지, 고양이, 구개월, 김 치, 김둘리, 김치국, 마진가, 박비듬, 석을년, 
설사국, 손가락, 안 녕, 어 흥, 유 령, 유치장, 이총각, 임신중, 조지나 …>
제가 방금 읽은 것은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개명(改名)을 원하는 사람들이 법원에 제출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주간동아 2008. 6. 13자 참조>

그러나 잘 들으십시오.
이름이 어떠냐, 어감이 어떠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을 들었을 때 그 이름에 해당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더럽고 부끄럽게 기억되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에 …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 
은혜와 평강을 간증하는 일에 … 
그리고 천국에서 여러분의 이름이 불려지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의 이름을 듣기만 해도, 떠올리기만 해도, 
부르기만 해도 감사한 마음이 드는 이름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일터에서나,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본디오 빌라도, 단 한번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단 한번 만난 그 만남이 역사를 반복하면서
대를 이어가면서 ‘본디오 빌라도, 본디오 빌라도’ 더러운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고, 
유익이 되고 복된 삶을 살아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도 유익을 주고 기쁨을 주는
복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예수 믿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배의 자리에 주인공이 되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어느 곳에 어떤 모습으로 살든지 
예수 만난 사람임을 증거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만난 사람다운 이름으로 불려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세상에 살면서 이런 저런 어려움들도 있었으나 믿음대로 살게 하셨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여 얻은 소득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립니다. 
성도들의 정성을 받아 주시옵소서.
성도들의 가정과 일터를 지켜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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