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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열망 (마 9: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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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열망 (마 9:35~38)


65억 지구촌 평화축제로 열린 제29회 베이징 올림픽도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한 주간 사이에, 성큼 다가선 가을 기운에 새삼 놀라며 신비감을 느낍니다. 추수 때를 기다리며 점점 더 고개 숙여가는 들판의 벼들이 참 인상적입니다. 추수할 일꾼들을 찾아 나설 바빠지는 농부의 마음이 눈에 선하게 보입니다.

주간조선(2019호)에서, 우리나라 교육에 대한 다양한 글들이 실렸는데, 그 중 ‘대학교육’에 대한 방현철 기자가 쓴 글을 보니까, 기업들이 “데려다 쓸 인재가 없다”고 하소연을 한다고 합니다. “공대출신 신입사원이 전자제품 회로도도 못 읽더라”는 겁니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2005년도 신입사원 1인당 평균 재교육비용이 대기업은 연간 4,330만원 중소기업은 2,921만원이 들었다고 합니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국가 전체적으로 연간 2조 8,000억 원의 재교육비용을 기업들이 부담하고 있다고 합니다. 기업만 그런 것 아니지요. 우리나라의 사교육비가 연간 20조원이나 되는데, 이는 국가예산의 10%나 되는 천문학적인 규모입니다. 

오늘의 한국교육을 두고 ‘인풋(투자)만 있고 아웃풋(생산)은 없는 최악의 소비’에 빠져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학부모들의 높은 교육열은 “교육열”이라기보다 “입시열”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들어간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정작 기업들은 “데려다가 쓸 만한 인재가 없다”고 하소연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큰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디 우리사회의 학교교육만 그런 것일까요? 개신교, 각 교단마다 신학교육은 어떻습니까? 수많은 교회들이 행하고 있는 교회학교의 신앙교육은 어떻습니까? 이 시대와 교회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에도, 걱정스러운데 예수님께서 보시는 이 시대상과 교회상은 어떠하실까요?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셨을 때, 초기사역을 하실 때 하신 말씀 중 하나입니다. 35절 말씀 보십시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1) 가르치시며, (2)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그리고 (3)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하셨습니다(마 9, 35).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의 세 가지 역점 사역이었습니다. (1) 가르치심 (2) 천국 복음을 전파하심, (3) 치유사역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하셨습니다. 여기 “불쌍히 여기시다”는 말씀은, 스플랑크니조마이(헬)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신약성경을 유념해서 읽어보면 사람들이 흔히 쓰는 단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들을 보시면서 가지셨던 마음을 표현할 때만 쓰인 단어입니다. 옛날 개역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민망(憫惘)히 여기시다”로 번역하고 있는데, “불쌍히 여기다”는 말 보다 더 무게감 있는 의미를 전달해주는 번역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말에, 憫惘히 여기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민망이라는 말은, 근심할 민(憫), 멍할 망(惘)자를 쓰고 있습니다. ‘가엽고 걱정스러워서 정신이 멍해진다는 뜻입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애간장을 태운다는 말입니다.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크면 우리 몸속의 장기인 肝이 害를 다 입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사역을 하실 때, 무리들을 보시며 품고 계셨던 아픈 마음이 그러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지요. 왜, 예수님께서 애간장을 태우실 수밖에 없으셨던가 하는 겁니다. 36절에서, 그 이유를 말씀합니다. “이는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당시 유대인들, 너무 너무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달리 고생한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유대종교의 전통, 규례, 율법주의의 무거운 멍에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지워준 율법의 멍에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초청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고생만 한 것 아니지요) “그들이 氣盡함이라”했습니다. 기진하였다는 말은, 氣盡脈盡하였다는 말이지요. 氣力이 다하고[盡], 맥이 풀렸다[盡]는 겁니다. 맥을 놓은 사람은, 살아 있다고 해도 살아 있다 말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예수님께서 어찌 그들을 민망히 여기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러면 당시 유대인들이 이토록 고생하며, 기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牧者 없는 羊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시 유대종교와 유대사회의 內面을 꿰뚫어보시는 예수님의 역설적인 시각입니다. 겉보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牧者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목자가 왜 없습니까? 그들에게는, 대제사장들이 있었고, 20000명이나 넘는 제사장들, 장로들, 6000명이 넘는 바리새인들, 토라학자들인 서기관, 랍비들이 수를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신약학자 요아킴 예레미아스가 쓴, 󰡔예수시대의 예루살렘󰡕이라는 책을 보면, 당시 예루살렘에는 성직자가 10000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총인구가 30000명이었는데(R. de Vaux, 구약시대의 사회풍습), 그렇다면 예루살렘 총인구의 1/3이 종교직업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었다는 이야깁니다. 그들이 온 이스라엘에 대한 영향력,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던 거지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무리들을 보시면서,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왜요? 목자(지도자, 바른 섬김이)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는, 그 시대상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눈(시각)입니다. 逆說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식이 탄식으로만 끝나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탄식이, 열망(熱望)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탄식이 탄식으로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와 같은 그루터기는 남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7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애간장을 태우시던 탄식이 강한 예수님의 열망으로 바뀌는 것을 봅니다. 당시 유대종교와 유대사회의 지도자들—대제사장, 제사장, 장로, 바리새인, 서기관들—과는 次元을 달리하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 추수꾼들을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열망에는 2가지 뜻이 있습니다. 

▶(1) 고생하며 기진하여 죽게 된 사람들은, 자기들을 살려줄 수 있는 牧者(나는 선한 목자라), 나아가 신실한 하나님 나라의 일꾼, 차원을 달리하는 代案的인 일꾼을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마치 추수를 기다리고 있는 다 여문 곡식과 같이,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제발 우리를 추수해서 하나님 나라 곡간에 좀 넣어주십시오” 소리치고 있다는 겁니다. 눈을 들어보면, 요즘 사람들이 정말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것이 있습니다. “어디 가면, 교회다운 교회 없을까···?” 찾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외면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교회를 외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다운 교회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세속 논리와 가치에 병들지 않은 세상의 소금과 빛과 같은 교회를 찾고 있습니다. 찾았다 싶으면, 고생하며 기진하던 영혼들이, 마치 밭에 감추인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한 사람처럼, 그 교회를 찾아가지 않고는 배기질 못합니다. 生死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373장 1절에,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냐, 곳곳마다 사랑 없어 탄식소리뿐일세. 惡을 善케 만들고 모든 소망 채우는 사랑 얻기 위하여 저들 오래 참았네.󰡕

경기도 구리시를 지나서 덕소 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자그마한 예배당건물이 있는데(최근에), 그 예배당 건물 한쪽 벽면에, 전에 보지 못하던 글귀—과연, 바로 그 교회—라는 글귀를 새겨서 붙여놓았습디다.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지 만, 저는 그만한 용기가 없어서 그런 글귀를 써 붙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설사 그런 교회라 할지라도, 남들이 그렇다고 평가해 줘야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나 싶습니다. 우리 교회가 “과연, 바로 그 교회”라는 칭찬을 받고 인정받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어 보면, 罪惡이 極에 달한 時代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의 때가 임박하게 되어도, 그냥 심판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 시대 백성들과 그 땅을 살리시기 위해서 최후수단, 한 가지 방법을 취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럴 때, 취하시는 행동방식이 무엇입니까? “만일, 너희 중에 義人이 있으면 내가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하늘에까지 사무치자 하나님은 그 도성을 유황불로 심판하시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그 도성에서 義人 50명만 찾는다면 멸하지 않겠다 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결국, 義人 10 사람이 없어서 망하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때, 하나님은 더 다급한 조건을 내거셨습니다. 예레미야 5, 1말씀을 보니까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正義를 행하며 眞理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城邑을 용서하리라.” 그러나 예루살렘 성읍에서, 그 한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위기의 때, 얼마나 급박하셨으면 正義를 행하고, 眞理를 구하는 사람을 단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용서하겠다고 하셨겠습니까?

그에 비하면, 예수님께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시며 하나님아버지께 추수할 일꾼을 보내주소서 하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熱望에는 希望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이 열망, 希望이 주어진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 열망을, 우리와 이 시대와 다음 세대들에게 希望으로 바꾸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2) 그러면 누가, 하나님 나라를 일구고 추수하는 일꾼이 될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10, 1-4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르신 열두 제자, 곧 열두 사도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베드로라 하는 시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그의 형제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稅吏 마태(레위),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가나나人 시몬,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예수님께서 부르셨던 열두 제자의 면면을 보면 좀 실망스럽습니다. 그중에, 1/12인 가룟 출신 유다는 실패한 제자가 아닙니까?(예수님 배반하고, 죽음에 넘겨준 자).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별로 변변한 사람 없습니다. 어부출신이 많습니다. 똑똑한 사람 축에, 稅吏 마태가 있었습니다(그는 매국노, 죄인, 최하위층 천민). 

열두 제자들 이외에도, 여 제자들도 많았습니다. 그 중 하나인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인이었습니다(과거가 좋지 않은 사람).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부르심을 받았을 때, 난 사람, 든 사람, 유명한 사람, 힘 있는 사람,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거나 추앙받던 인물들이 아닙니다. 변변한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 나라의 일꾼은, 그 사람의 인간됨됨이나 출신, 학벌, 외모 그런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알지 않습니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恩惠로 된 것이니” 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자신을,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팔삭둥이, 좀 덜 떨어진 사람, 부끄러운 사람, 주님을 아프게 했던 사람,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 같은 자기를” 주님께서 불러주셨다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훌륭한 사람, 이미 된 사람이 예수님의 弟子됨의 조건이 아닙니다(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중심으로 보라). 이런 것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부름 받기 이전보다 부름 받고 난 이후가 더 중요합니다. 부름 받는 것은, 말씀드린 대로 全的인 하나님의 恩惠입니다. 차별도 없고 구별도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름 받은 자는,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정말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러지 못하면, 가룟 유다가 되든지 사울이 되든지 어리석은 자가 되는지 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이미 부름 받은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否認하라(자기를 내려놓으라···, 그러나 자기 부인하지 않는 사람 多), 자기 十字架를 지라(각자에게 주어진 달란트, 몫이 있다는 겁니다. 그 십자가를 지라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를 것이니라”하셨습니다(마 16, 24). 바로 여기에 하나님 나라 일꾼 됨의 마스터 키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인재 등용과 사용방식은 세상 나라와는 거꾸로인 셈이지요. 기업들이, 대학을 졸업해도 데려다가 쓸 만한 인재가 없다면서, 신입사원 한 사람당 재교육비로 4천만 원이 넘는 돈을 쓴다는데,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큰 손실입니까? 불평할 만도 하지요. 

그러나 하나님나라 일꾼은, 부름 받을 때, 이미 된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 어설픕니다/ 再敎育 次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 교육받아야 합니다(아브라함 보십시오. 55년이 더 걸렸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가르침 받아야 했고, 권능을 받아야 했고, 보냄을 받아서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서 지키게 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일꾼 됨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도리어 부름 받고 나면, 배우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자기 십자가도 외면합니다. 자신의 믿음의 진보를 교회와 세상에서 보여주지 못하는 자들이 더 많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꾼은 /자리/와 /지위/ /명예/와 /직분/으로 일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일하고 섬기면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나라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했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아멘(고전 15, 10). 저와 여러분과 우리 온 교회가 추수할 것은 많지만, 일꾼이 적은 이 때, 추수할 일꾼을 보내주소서 하라는 예수님의 열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 교회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 나라의 신실한 일꾼들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우리교회에도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나갈 일꾼들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아버지, 우리에게도 일꾼들을 보내어 주옵소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다 내려놓고, 주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그런 일꾼들을 보내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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