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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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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 3:1~10)
  

지난해 3월 1일 성전 신축 기공예배를 드린 후, 1년 6개월 만에 새 성전으로 이사를 해서, 이렇게 첫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니, 참으로 감회가 새롭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새 성전에서 첫 주일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이 시간 신앙생활의 새로운 각오가 있기를 바라면서, 오늘은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며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오늘 봉독해드린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낸,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호렙산’으로부터 하나님께 부름을 받는 광경입니다. 본래 모세는 애굽의 궁중에서 호의호식을 하며 살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을 때, 그는 양 무리를 치는 한 사람의 초라한 노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애굽의 궁중에서 40년, 그리고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으니, 모세의 나이 80세가 다 된 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다 늙고, 양이나 치는 초라한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는 엄청난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때에, 나이 탓만을 할 수 없는 줄 압니다. 혹 우리 가운데 나는 늙어서 아무 쓸데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은 안 계십니까? 그러한 분들은 모세는 80세부터 하나님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위로를 받고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모세가 왜 호화로운 궁중생활을 버리고, 사람이 살 수 없는 미디안 광야로 나오게 되었습니까?

   1. 궁중에서 미디안 광야로 나오게 된 동기

이스라엘 민족은 430년 동안 애굽이란 나라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중에서도 하나님의 축복으로 자손이 크게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오히려 애굽인보다 번성하여, 애굽인들은 커다란 위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애굽 왕은 이스라엘 여인들이 사내아이를 낳으면 모조리 죽이게 하였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요게벳’이라는 여인이 해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을 낳았는데, 그 준수함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서 길렀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숨길 수 없어서, 갈대로 상자를 만들고, 거기에 아이를 담아 나일 강에 떠내려 보냈습니다. 마침 애굽 왕의 공주가 시녀들을 데리고 목욕하러 와서 그 상자를 발견하고, 데려다가 ‘모세’라 이름 짓고 아들로 삼아 길렀습니다. 이리하여 모세는 당시 천하를 호령하던 애굽 제국의 왕자가 되어,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호의호식을 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훌륭한 가정교사를 두고 열심히 배워서, 당시의 모든 학문에도 통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마음속에는 항상 자신은 이스라엘인, 히브리 사람이라는 의식이 강하게 뿌리 박혀 있었습니다. 노예생활을 하면서 고생하는 동족의 모습을 바라볼 때면, 밥이 제대로 넘어가지를 않았습니다. 어느 날 모세는 자기 동족의 생활을 살펴보려고 밖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애굽인이 자기 동족 히브리인을 치면서 학대하는 것을 목격하고는, 의분을 참을 수 없어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동족애로, 애국 애족하는 마음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귀한 동족애였지만, 그 동족애가 혈기로 나타날 때, 그만 살인죄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사실이 탄로되어 모세는 애굽 왕의 미움을 사서, 결국은 광야로 도망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한 가지 크게 교훈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선하고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혈기는 삼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우리의 언행에서 항상 이 혈기를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하시면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교회 학교에서, 예수 선생님에게 제일 먼저 배워야 할 필수과목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주님의 온유와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산상 수훈에서도 주님께서는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김준곤 목사님의 ‘예수칼럼’중에 있는 내용입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한다. 노와 독과 증은 안에 있는 잠복한 상태라면, 성내는 일은 폭탄의 폭발이요, 독가스의 분출이요, 더러운 것을 토하는 것과 같다. 분은 낼수록 더 증식된다. 한번 성내면 그 사람과의 인간관계는 비록 화해와 사과를 한다 해도, 감정의 거울에 금이 가서 없었던 상태로 원상복구가 잘되지 않는다. 내가 성내서 맘을 상하게 해준 분들의 무덤까지 찾아가서 사과했으나, 커다란 인격의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내가 목사가 된 때부터, 성내는 일 한 가지만 절제할 수 있었더라도, 내 신앙인격이 지금 50점이라면 80점은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내에게, 자녀에게, 형제에게, 친구에게, 제자들에게, 내 성난 표정과 말로 상처 입은 분들에게, 즉석에서 혹은 후일에 늘 사과는 드렸지만, 다시 땅에 엎디어 빕니다.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내 속에 성난 귀신 한 마리가 나갔다 들어갔다 합니다. 내가 성낼 때는 이 귀신이 내 속에서 성령대신 발언합니다.”라는 칼럼입니다.  

모세는 한 때 살인을 할 만큼 혈기가 왕성했지만, 신앙의 연단을 통해서 후일에 그는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12:3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의견은 천차만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마음으로 의견의 차이를 좁혀나가게 된다면, 화목한 교회를 이룰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교역자와 성도들 간에, 혹은 성도와 성도들 간에, 화목한 교회, 그 얼마나 좋은 교회입니까? 앞으로 이 예배당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될 모든 성도들은,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한 모세처럼, 온유한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늘 화목하고 화평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2. 모세의 미디안 광야생활 40년

광야는 사람이 살기에 거의 불가능한 곳입니다. 모세는 그렇게 살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양을 치며 숨어 살게 되었습니다. 전날 대애굽 제국의 왕자가, 이제 보잘것없는 양치기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곳에서 ‘십보라’라는 여인과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자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이방에서 객이 되었다’는 뜻으로, 자신의 초라한 광야생활을 상징하는 이름이었습니다. 궁중에서의 생활과 미디안 광야의 생활은 너무나 대조적이었을 것입니다. 그 괴로운 광야생활 가운데서 한숨도 많이 쉬고, 눈물도 많이 흘렸을 것입니다. 실망하고 낙심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생활 중에 있는 모세를 하나님은 찾아 불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힘과 우리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가운데서 우리를 찾아 주십니다.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이시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도 의인을 찾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세상에 계실 때에도 화려한 예루살렘 성읍의 사람들보다는, 갈릴리의 산촌과 어촌을 두루 찾아다니시면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 불쌍한 사람, 실패한 인생들을 먼저 찾아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다음에도 슬피 우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맨 먼저 나타내주시면서 위로와 소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실패한 가운데 상심하여 있는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내 양을 치라”“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던,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도대체 저와 여러분을 과연 어떠한 가운데서 불러주셨는가를 생각하면서, 한 평생 그저 감사하고 황송한 마음으로, 충성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호렙산에서의 소명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내가 애굽에 있는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세 가지 동사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르쳐 줍니다.

  1)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어떠한 처지에 놓여있는지 깊은 관심과 사랑으로 지켜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의 택한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통당하는 것을 정녕 보고 계셨습니다. 애굽 왕권의 핍박이 가중하여 강제노동을 시킬 때 그 뼈저린 고통과 눈물어린 참상, 짐승처럼 멸시받고 죄수처럼 능욕당하는 모습을 다 하감하셨습니다. 눈의 원리를 알고 우리들의 눈을 만드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모든 처지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과 사랑의 눈으로 지켜보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환난을 만날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탄식하기에 앞서, 먹구름 뒤에 감추어진 태양을 보듯, 우리를 지켜보시는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구원을 간구해야 합니다.

  2) “그들이 부르짖음을 듣고”

출 2:22-24절에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께서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고 했습니다. 귀의 원리를 알고 우리들의 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시는 일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반드시 풀어 주시고 기도를 응답해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3) “그 우고를 알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고 즉 근심과 고통을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전지하신 신이시니 모르실 까닭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우고 즉 여러분의 모든 근심과 걱정거리를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기를 원하셨듯이, 오늘 우리를 고통의 자리에서 건져내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나타나신 그 광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1)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셨습니다. 

떨기나무란 ‘아카시아’의 일종인데, 거기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아니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떨기나무는 아름답고 고상한 나무들과 달라서, 죄 많은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합니다. 거기에 불이 붙은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수난 당함을 보여 주고, 그러나 떨기나무가 타 없어지지 아니함은, 이스라엘이 수난 중에서도 망하지 않을 것을 보여 줍니다. 교회는 때때로 박해와 조소의 불 속에 던져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교회를 박해하던 왕국과 제국의 영광은 사라지고, 지금은 단지 폐허만 남아 기념물로서의 가치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권능 속에 계속 굳건히 서 있으며, 그 안에는 참 성도들이 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또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는 것이 있습니다. 떨기나무란 한 마디로 말해 쓸모가 없는 나무입니다. 모세만 하더라도 나이 80세나 되었으니, 늙고 쇠약하여 별로 쓸모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성막을 지을 때도 ‘조각목’ 곧 아카시아 나무에 금을 입혀 사용했습니다. 여기에 깊은 진리가 있습니다. 쓸모없는 아카시아나무와 같은 사람들, 지옥불의 땔감으로나 알맞은 우리에게, 금과 같은 믿음을 입혀서, 하나님 성전의 기둥처럼 귀하게 사용해주시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2)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했습니다. 

신을 벗으라는 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신은 땅을 밟고 다녀서 더러워진 것이니, 이것은 인간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자신의 행위를 조금도 의지하지 말고, 맨발로 서듯이 하나님 앞에 서야 됩니다. 더러운 신을 벗어버리듯이, 우리의 행한 바를 전적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나의 행한 일 가운데 옳은 것 같은 것도 벗어야 합니다. 사64:6에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때에, 신을 신은 것과 같은 옛 사람의 모습, 인간적인 불의한 수단 방법을 다 벗어 버려야 합니다. (2)그 다음에 신을 벗는 것은, 그 당시의 습관대로라면, 노예나 종의 신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종은 주인에게 절대로 복종해야만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된 성도들은 주님께 절대 복종하고, 주님의 말씀에 반드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왜 모세가 서있는 땅이 거룩하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하나님과 관계될 때 그것은 거룩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장소인 이 성전은 거룩한 집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전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성전에 와서 예배드리는 사람마다, 더러운 신과 같은 더럽고 불결한 죄악들을 다 벗어버리기를 바랍니다. 

더러운 신과 같은 옛 사람의 죄악들을 가지고는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 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더러운 신을 신고 있는 것 같은 사람의 예배를 결코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헛된 예배를 가리켜 하나님께서는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경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일마다 하나님 성전 마당만 밟고 다니는 분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 더러운 신을 벗지 않으면 안 됩니까?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러운 신을 그대로 신고 있는 신자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모세를 부르셨습니까? 그것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모세 한 사람만의 구원을 위해서 불러내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모세는 이때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430년 동안 애굽의 종살이에서 고생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씨로 하여금 천하 만민이 복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불러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로 하여금 이방에 복음을 전해서, 많은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가시떨기와 같은 우리를 어디에 쓰시려고 불러주셨을까요? 모세의 소명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반드시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부르심에 예외 없이 적용되는 법칙과도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단순히 부르시는 것이 아닌 부르신 목적과 이유가 있기에 우리는 그것을 거룩한 부르심 속, 소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 땅에서 출세하려고 태어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부자가 되어 잘 먹고 편히 살려고 태어나는 존재도 아닙니다. 사람은 그와 같이 시시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 일을 우리는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스위스의 사상가이며 명작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를 쓴 Karl Hilthey는 “인간 생애의 최고의 날은 자기 인생의 사명을 자각하는 날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보람 있게 사느냐가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단 한 번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가장 보람 있고 가치가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에게 가장 보람 있는 일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전도하는 일입니다. 전도야말로 자기 일생을 가장 가치 있게 만드는 비결이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최고의 비결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전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전도의 불이 타오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불덩어리였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성령의 불이 타오르고 전도의 불이 타올랐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전도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신앙이 어리든지, 아니면 병이 들었든지, 아니면 죽은 신앙인 것입니다. 마치 영혼이 없는 사람이 죽은 것처럼, 전도하지 않은 신앙은 죽은 것입니다. 형식과 외식만 있는 생명이 없는 신자입니다. 참으로 구원의 확신이 있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라면, 전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은 전도로 보답하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아는 자는, 형제가 받을 지옥의 저주를 거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뛰어 들어 전도합니다. 강권하여 주님께로 인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그리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서 올바른 예배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그리하여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에서, 여러분의 기도가 놀라운 응답을 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더러운 신을 벗어야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더러운 신을 벗어야만 ‘평화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그리하여 여러분을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들로 이 전이 가득 채워지고,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에 모두가 귀하게 쓰임 받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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