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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방관자의 운명 (옵 1: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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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관자의 운명 (옵 1:10~14)


[“네 아우 야곱에게 저지른 그 폭행 때문에 네가 치욕을 당할 것이며, 아주 망할 것이다. 네가 멀리 서서 구경만 하던 그 날, 이방인이 야곱의 재물을 늑탈하며 외적들이 그의 문들로 들어와서 제비를 뽑아 예루살렘을 나누어 가질 때에, 너도 그들과 한 패였다. 네 형제의 날, 그가 재앙을 받던 날에, 너는 방관하지 않았어야 했다. 유다 자손이 몰락하던 그 날, 너는 그들을 보면서 기뻐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가 고난 받던 그 날, 너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지 않았어야 했다. 나의 백성이 패망하던 그 날, 너는 내 백성의 성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어야 했다. 나의 백성이 패망하던 그 날, 너만은 그 재앙을 보며 방관하지 않았어야 했다. 나의 백성이 패망하던 그 날, 너는 그 재산에 손을 대지 않았어야 했다. 도망가는 이들을 죽이려고, 갈라지는 길목을 지키고 있지 않았어야 했다. 그가 고난 받던 그 날, 너는 살아남은 사람들을 원수의 손에 넘겨주지 않았어야 했다.”]


• 우리는 좋은 이웃인가?

이제 올림픽이 거의 끝났지요? 오직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수년을 보내온 사람들의 단련된 몸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습니다. 사람들은 박태환의 환한 미소에 환호하고, 20살 배드민턴 선수가 카메라를 향해 날린 윙크에 열광하고, 야구 대표팀의 승리에 열광합니다. 대통령의 국정지지도도 덩달아 올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게 마련입니다. 100년을 기다려왔다는 올림픽을 위해 베이징에서 밀려난 農民工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왔던 빈민들은 일자리를 잃고 방황했습니다. 그들은 외국 손님들 눈에 띄지 않게 ‘처리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주인 달라이 라마는 올림픽 기간 중에도 중국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많은 이들이 죽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경기장에서 중국 관중들이 보인 노골적인 반한 감정입니다. 한국 선수가 나선 경기마다 관중들은 반대편을 응원했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SBS가 올림픽 개막식 리허설 장면을 미리 내보낸 것 때문이라는 이도 있고, 중국이 자랑하는 문화적 업적을 한국이 가로채려 하기 때문이라는 이도 있습니다. 쓰촨성 지진을 놓고 한국의 네티즌들이 보인 비정한 야유 때문이라는 이도 있습니다.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인들이 그동안 오만한 태도를 견지해왔던 한국인들을 더 이상 곱게 봐 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이도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우리가 한 가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가 주변국들에게 인심을 많이 잃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에게 우리는 좋은 이웃이 아니었나 봅니다. 우리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게 현실입니다. 

일본과 우리가 다른 점이 하나 있답니다. 일본은 어느 나라건 큰 자연재해를 만나면 가급적 빨리,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많이, 지원금과 지원 인력을 보낸다고 합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남을 돕는 일에 매우 굼뜬 편입니다.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결국은 국가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합리적인 판단보다는 감성적인 판단인 경우가 많습니다. 시련 속에 있을 때 누군가로부터 받은 도움은 가슴 깊은 고마움으로 기억되기 마련입니다. 그 때 받는 냉대와 멸시는 큰 상처가 됩니다. 오늘의 본문인 오바댜서는 그런 경우를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 페트라

예언서 가운데서 오바댜서는 가장 짧은 책일뿐더러, 설교자들에 의해 잘 선택되지 않는 책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이스라엘의 이웃인 에돔에 대한 심판과 앞으로 있게 될 이스라엘의 구원을 다루고 있습니다. 내용으로 볼 때 이 책은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점령당하고 파괴당했던 주전 587년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나라가 망하던 그 시기에 이웃 나라인 에돔은 이스라엘을 돕기는커녕 그들의 위기를 이용해 제 배를 불리는 데만 몰두했습니다. 에돔은 야곱의 형제인 에서의 후예들입니다. 성경은 에서와 야곱이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 다투었다고 함으로써 에돔과 이스라엘의 갈등과 반목이 유구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거꾸로 뒤집자면 현실적으로 갈등하고 있는 두 나라가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 어머니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가지를 볼 것이냐, 뿌리를 볼 것이냐’입니다. 뿌리를 보면 평화의 길이 열리는데, 사람들은 가지만 봅니다.

사실 에돔과 이스라엘은 좀 불편한 관계였습니다. 다윗은 왕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팔천 명을 죽이고, 그곳에 주둔군을 두어 그들을 지배했습니다(삼하8:13-14). 그것은 아카바 만의 항구 도시들을 차지하고 사해와 홍해 사이의 저지대에 있는 지하자원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봉신관계를 유지하던 에돔은 유다 왕 여호람이 다스리던 시대에 유다의 통치에 반기를 들고 자기들의 왕을 따로 세웠습니다(왕하8:20). 두 나라는 지리적으로는 인접해 있었지만, 감정적으로는 가깝고도 먼 나라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침공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 에돔이 취한 태도는 이스라엘인들의 감정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오바댜의 말은 그런 정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네가 바위틈에 둥지를 틀고, 높은 곳에 집을 지어 놓고는, ‘누가 나를 땅바닥으로 끌어내릴 수 있으랴’ 하고 마음속으로 말하지만, 너의 교만이 너를 속이고 있다. 네가 독수리처럼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꾸민다 하여도, 네가 별들 사이에 둥지를 튼다 하여도, 내가 너를 거기에서 끌어내리고야 말겠다. 나 주의 말이다.”(3-4)

몇 해 전 요르단의 페트라를 방문했을 때 나는 비로소 이 구절의 배경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페트라는 사해와 아카바 만 사이, 곧 요르단의 남서부에 위치한 곳인데, 성경에서는 ‘셀라’로 알려진 곳입니다. 페트라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사람들이 그 땅을 왜 에돔이라고 불렀는지를 즉각 알 수 있었습니다. 셈어로 에돔은 ‘붉다’ ‘붉그스레하다’는 뜻입니다. 거대한 성벽처럼 서있는 장밋빛 사암(sandstone)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면서, 마치 붉은색 물감을 뿌려놓은 것 같은 땅을 걷는 기분이 묘했습니다. 천혜의 방벽인 그 절벽 위에 터잡고 살았던 에돔은 과연 자부심을 가질 만도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바위틈에 둥지를 틀고, 독수리처럼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꾸미고, 별들 사이에 둥지를 튼다 하여도,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겠다는 주님의 말씀이 서늘하게 다가올 수밖에요.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곳 페트라 유적 앞에서 욥을 향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웠는지, 너는 아느냐? 무엇이 땅을 버티는 기둥을 잡고 있느냐? 누가 땅의 주춧돌을 놓았으냐?”(욥38:4-6)

우리 마음이 헛된 교만으로 부풀 때마다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어떤 문명도, 어떤 강대국도 하나님을 거슬러 설 수 없습니다. 에돔은 이 사실을 잊었습니다.


• 방관자와 공모자 

오바댜가 고발하고 있는 에돔의 죄는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방관죄입니다. 어떤 불의한 현실을 보고도 못 본 척 하는 사람을 보고 비겁하다고는 말할 수 있지만, 죄인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오바댜는 강대국에 의해 유린당하는 이웃 나라를 보면서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 것이 에돔의 죄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강대국의 횡포에 대항해서 전쟁이라도 선언해야 한다는 말일까요? 용기는 가상하지만 그것으로 파멸에 이를 수도 있다면 그게 지혜로운 선택이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識別의 지혜 혹은 時中의 지혜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 때에 적합한 행동을 찾아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천하의 범사에 다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 허물 때와 세울 때, 찾아나설 때와 포기할 때, 말하지 않을 때와 말할 때, 그 때의 중심을 붙잡는 것이 지혜입니다. 때를 분별한다는 말이 자칫하면 비겁한 방관 혹은 방조를 정당화시켜주는 말이 될 수도 있음을 잘 압니다. 하지만 분별은 필요합니다. 

이웃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저히 내 능력으로 그 문제를 풀 수 없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또는 해야 할 최소한의 윤리는 그의 약함을 틈 타 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입니다. 不忍之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어려움을 보면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마음을 일컫는 말입니다. 어린아이가 우물가로 아장아장 걸어가면 누구라도 아이를 부르거나 붙잡을 겁니다. 그런 마음이지요. 여리고 가는 길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보면서 사마리아 사람이 냈던 마음이 불인지심입니다. 그 마음이 있어야 사람입니다. 하지만 에돔은 그런 최소 윤리조차 지키지 않았습니다. 오바댜의 고발은 준엄합니다.

“네 형제의 날, 그가 재앙을 받던 날에, 너는 방관하지 않았어야 했다. 유다 자손이 몰락하던 그 날, 너는 그들을 보면서 기뻐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가 고난받던 그 날, 너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지 않았어야 했다.(12)

에돔은 이스라엘의 고난을 고소한 듯 바라보았습니다. 강대국에 의해 두들겨 맞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가학적인 심리가 작동한 것 같습니다. 심리학 용어 가운데 합일화(incorporation)라는 것이 있습니다. 합일화란 ‘자기’와 ‘자기가 아닌 것’을 구별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요한 인물 혹은 조직의 태도와 행동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상대를 이상화하고 그의 신념이나 인격, 정서 등을 마치 자기 것인 양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는 현상입니다. 이런 합일화는 대개 주체성이 없는 이들에게서 일어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미국을 정의의 사도로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비슷한 일입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통을 방관만 한 것이 아닙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이 약해진 틈을 타 남쪽 국경을 침범해 약탈행위를 자행하기도 했습니다. 전쟁을 피해 달아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길목을 가로막고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에 넘겨주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에돔의 소행이 하나님의 눈 밖에 났습니다. 이게 참 중요한 말입니다. 사람은 참 어리석습니다. 최선의 길을 앞에 두고도 익숙한 길만을 걸어가는 게 우리입니다. 자기 욕망이 명하는 대로 살면 당장은 좋아보여도 결국은 그 때문에 사단이 나고 맙니다. 익숙한 길, 편안한 길을 거슬러 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만나게 됩니다.


• 뿌린 대로 거둔다

오바댜는 주님께서 모든 민족을 심판하시는 날에 벌어질 일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네가 한 대로 당할 것이다. 네가 준 것을 네가 도로 받을 것이다.”(15)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지요? 너무 때가 묻은 말처럼 들리지만 이 말처럼 무서운 말이 없습니다. 이 말을 제일 확실하게 믿는 사람들은 선거에 나선 이들 같습니다. 그들은 돈을 쓴 만큼 표가 나온다고 믿습니다. 또 현실이 그런 믿음을 뒷받침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보입니다. 자기들이 무엇을 뿌리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돈을 써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는 사람들은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까지도 타락시키는 이들입니다. 그들이 돌려받을 것은 돈이나 명예나 존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준엄한 책망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강진에 유배되어 있을 당시에 일가친척 중에 한 사람도 돌봐주고 긍휼히 여겨주는 이가 없다며 신세한탄을 하는 아들들에게 이런 답장을 보냈습니다. 

"여러 일가 중에 며칠째 밥을 짓지 못하는 자가 있을 때 너희는 곡식을 주어 구제하였느냐? 눈 속에 얼어서 쓰러진 자가 있으면 너희는 땔나무 한 묶음을 나누어 주어 따뜻하게 해주었느냐? 병이 들어 약을 복용해야 할 자가 있으면 너희는 약간의 돈으로 약을 지어주어 일어나게 하였느냐? 늙고 곤궁한 자가 있으면 너희는 때때로 찾아뵙고 공손히 존경하였느냐? 우환이 있는 자가 있으면 너희는 근심스런 얼굴빛과 걱정하는 눈빛으로 우환의 고통을 그들과 함께 나누어 잘 처리할 방도를 의논해보았느냐? 이 몇 가지 일을 너희들은 하지 못했으면서 어떻게 여러 집안에서 너희들의 급박하고 어려운 일에 서둘러 돌보아주기를 바랄 수 있느냐? 내가 남에게 베풀지 않은 것을 가지고 남이 먼저 나에게 베풀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너희들의 오만한 근성이 아직도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다산문선>>, 솔, 1997, 144쪽)

다산은 계속해서 아들들에게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여 한을 품지 말고, 또 누구를 도왔다고 하여 보답을 바라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이가 바로 어른입니다. 

히브리의 지혜자는 이것을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주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주님께서 그 선행을 넉넉하게 갚아 주신다."(잠19:17) 마태는 이런 진실을 간결하지만 강력한 표현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가장 작은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처지에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도와야 합니다. 이데올로기, 종교, 인종, 문화의 차이를 빌미로 돕기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의 불행을 방관하고 오히려 자기 이익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곤경에 처한 이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져주면 그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혹시 우리가 에돔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위기의 시대에 하나님은 위험을 무릅쓰고 어려운 이들 곁에 서려는 이들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와 교우들이 바로 그런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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