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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메시아의 길, 제자의 길 (마 16: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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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의 길, 제자의 길 (마 16:21~2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성령 강림절 후 열다섯째 주일입니다. 오늘도 예배하는 우리에게 오순절 다락방에 임하셨던 성령의 충만하신 역사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설교 본문은 마태복음 16장 21-28절의 말씀입니다. 

이 본문은 두 단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처음 예고(豫告)(21-23절) 처음으로, 비로소 그가 당하실 고난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말한 부분과 다른 하나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가야 할 제자도(第子道)에 관한 가르침(24-28절)입니다. 

이렇게 둘이 하나로 된 본문은 예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 그의 정체성을 밝히고, 동시에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가야 할 ‘제자의 길’에 대한 가르침을 줍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담은 오늘의 본문으로 “메시아의 길, 제자의 길”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냥 단순히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 이제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의 제자인 내가 가야 할 길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예수님의 공생애란 예수님이 어렸을 때의 생활과 자기 개인의 생활이 아닌 이 세상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나서신 공생애 3년 동안의 공생애는 마태복음 16장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13-20절)을 기점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분된다 말할 수 있습니다. 공생애 전반부에서는 갈릴리를 무대로 사회적 약자들을 대상으로 펼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교가 중심으로 보도되고 있다면, 후반부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수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되는 예수의 수난 사건이 중심 주제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그 분기점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3절)고 묻습니다.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요한 세례자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엘리야 또는 예레미야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는 제자들을 향하여 단도직입적으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이 때 제자들을 대표하여 시몬이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는 시몬을 칭찬하고, 바위를 뜻하는 ‘베드로’ 라는 이름을 내려주십니다. 그리고 그 바위와 같은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본문은 이러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의 연장선상에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고백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어떤 분입니까? 이 물음은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것인데,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곧 메시아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아 신앙에 대해서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고대했던 메시아 신앙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정치적 메시아 신앙’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로마 제국의 식민지 통치와 압제에서 해방시켜 독립을 가져다 줄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메시아는 다름 아닌 다윗의 자손에서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과 같은 훌륭한 정치적 지도자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젤롯당원들은 유대 민족주의와 결부된 정치적 메시아를 고대했는데, 예수의 제자 가운데도 특히 가룟 유다는 예수를 정치적 메시아로 믿고 따랐다가 실망하여 배반하게 된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었습니다. 

둘째는, ‘묵시적 메시아 신앙’입니다. 주전 6세기 예루살렘 도시와 성전이 바벨론에 의해서 파괴된 후 유대인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가 포로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유다 왕국은 나라의 주권을 상실하고 예수 시대에 이르기까지 600여 년 동안 나라 잃은 유랑민족(디아스포라)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주전 3세기경 유대 민족의 정치적 해방이라는 희망의 상실과 더불어 정치적 메시아 신앙이 퇴조되고 ‘묵시적 메시아 신앙’이 새롭게 등장하였습니다. 세상 종말의 날에 ‘인자’(The son of man) 같은 천상적 존재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 왕국을 멸망시키고 고난 받는 민족을 구원한다는 신앙이 그것입니다(단 7:13). 이 같은 묵시적 메시아 신앙은 유대 백성의 하층민들에게 특히 호소력이 컸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한 것도 이러한 묵시적 종말 신앙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셋째는, ‘고난의 메시아 신앙’입니다. 바벨론 포로기 말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이사야서 53장에는‘하나님의 종’(에벳 야훼)의 고난에 대한 찬양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겪는 수모와 고난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대신하는 대속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신앙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를 이와 같은 ‘여호와의 종’으로 보고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그 시대의 정치적 지평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대신하는 대속적인 의미에서 새롭게 해석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초대교회는 예수를‘고난 받는 메시아’, ‘죽임을 당할 메시아’로 해석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세 번째의 ‘고난 받는 메시아 신앙’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자신의 정체를 분명히 밝혀야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을 하셨습니다. 그의 정체란 ‘고난 받는 메시아’, ‘죽임을 당할 메시아’입니다. 전반부에 갈릴리 사역을 행하는 동안 그는 이 점에 대하여 철저히 침묵하셨습니다. 단지 가르침과 이적의 사역을 통해서 당신 자신이 메시아이신 것을 확신케 해 주는 데 주력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후반부에 들어서는 더 이상 당신의 참된 사명을 감추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신 예수님은 비로소 입을 열어 앞으로 당신의 운명에 대하여 미리 예고해 주십니다. 오늘의 본문 21절에 보면,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가실 ‘메시아의 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예고를 충격으로 받아들입니다. 특히 제자들의 대변자처럼 활동하고 있는 베드로는 예수의 이 말씀을 받아드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힘으로라도 그 운명을 막겠다고 나섭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당신에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나이다”라고 아주 강한 어조로 반대합니다(22절). 이 태도에 대하여 예수님은 또 한번의 충격적인 발언을 하십니다.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부르시면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길은 하나님의 뜻이므로, 이 길을 막는 것은 곧 사탄의 역할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 길을 막아서지 말고 뒤로 가서 제자의 길이나 충실하게 걸으라고 요청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에서 매우 흥미로운 것을 발견합니다. 먼저 단락(13-20절)에서 시몬과 예수는 서로에게 고백하기를, 시몬은 예수에게 ‘그리스도’라고 하며, 예수는 시몬에게 ‘베드로’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이렇게 시몬과 예수가 무척 우호적인 관계를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본문(21-23절)에서는 정반대로 베드로와 예수는 서로를 책망합니다. 베드로는 고난의 길을 가야겠다는 예수를 꾸짖고 있으며, 예수는 그러는 베드로를 꾸짖습니다. 앞에서는 천국의 열쇠를 주겠다며 칭찬한 베드로를 뒤에서는 사탄의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책망합니다. 이렇게 두 이야기는 아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극명한 대조를 보인 데는 복음서의 저자가 의도하는 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대조되는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과 베드로가 메시아에 대한 생각과 기대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름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묻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하여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와 같은 베드로의 고백에 대하여 예수님은 만족하시고 그를 칭찬하셨습니다. 여기까지는 두 분 사이에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사명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달랐습니다. 이는 두 분이 메시아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한 방법,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 걸으실 ‘메시아의 길’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는 수난과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고, 베드로는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계획(섭리)을 먼저 생각했고, 베드로는 인간적인 안전을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잘못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앞세웠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인간을 구원하는 일인 반면, 사람의 일이란 자기 목숨을 보존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인간을 구원하는 일을 하려 했던 것이고,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은 채 인간의 목숨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하는 역할이요 하나님의 뜻에 걸림돌이 되는 일입니다. 이렇게 교회의 기초석으로 칭찬을 받았던 반석이라는 이름의 베드로는 예수의 걸림돌로 전락하고 맙니다. 

즉 베드로, 이 반석은 ‘메시아의 길’을 막는 걸림돌(베드로)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모인 우리들이 돌아서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걸리게 하는 걸림돌의 역할을 혹시 하고 있지 않은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베드로는 메시아의 사명과 그 사명을 이루시기 위한 방법에 대한 생각을 달리했습니다. 이것은 ‘메시아의 길’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주님은 그리스도(메시아)입니다. 우리가 믿는 메시아는 힘과 권위의 상징으로서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는 수난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게 되는 연약함의 상징으로서의 메시아입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에서 말씀하신 예수의 수난 예고는 우리가 도대체 어디에서 현존의 메시아를 찾아야 하고 만나야 할 것인지를 말해 줍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예수님을 만나려면 어디에서 예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하겠습니까. 이는 우리가 주변의 사회적 약자들과의 연대와 나눔 가운데서 현존(現存)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메시아의 길’이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의 길’임을 말해 줍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걸으실 ‘메시아의 길’이 고난과 죽음 의 길인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어서 당신의 제자가 걸어야 할 길, 즉 ‘제자의 길’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제자의 운명이란 선생의 운명을 그대로 따라 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욕망을 버리시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수난과 죽음의 길을 가듯이, 제자들도 자기중심적인 욕심을 뒤로 하고 예수의 수난의 길에 나서야 합니다. 예수의 길이 영광의 길이 아니듯이, 제자들의 길도 역시 그러합니다. 하지만 예수의 수난과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의 수난과 고난이 최종 종착점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부활에 이르게 된 것처럼 제자들도 예수의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때로는 자기의 목숨을 바쳐야 할 때도 있겠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쥐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잃고 자기의 육신적인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 사람은 잠시는 성공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맙니다. 영원한 생명을 잃기 때문 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육신적인 목숨을 두려움 없이 던지는 사람은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으로 사는 제자들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이러한 축복이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하지만 메시아의 길을 따라서 제자의 길을 걸어 가기란 무척 힘든 고난의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본문 27-28절에서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머지않아 장래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입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왜 이것이 중요합니까? 그것은 제자들의 고난이 헛되지 않고, 육신적인 생명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확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로 부름 받은 우리는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힘겹고 고통스러운 제자의 길을 당당히 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리스도께서 가시는 그 길, 제자의 길을 가겠다고 따라나선 제자들입니다. 예수께서 걸으신 메시아의 길은 고난의 길인데, 우리 모두가 이 길을 가겠다고 따라나섰습니다. ‘겁 없이’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고난의 길을 어떻게 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우리, 이기적이고 자신의 것을 먼저 챙기는 우리, 자신의 육신적인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우리들, 자기를 부인하기는커녕 자기주장이 강하며, 가능하면 어려운 것을 피하고 십자가를 지지 않고 오히려 그 십자가를 다른 사람이 지고 가도록 넘겨 버리는 약삭빠른 우리가, 이 제자의 길을 어떻게 갈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 이 제자의 길을 우리의 힘으로는,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감히 이 제자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 홀로 이 길을 가지 않고 우리 주님과 함께, 그리고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자의 길을 나선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힘과 지혜로 이 길을 가겠다는 자만을 버리고, 우리 주님과 함께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이 길을 갈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와 함께하시고 연약한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는 성령의 생각을 따라서 성령께 의존하면서 이 제자의 길을 갈 수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성령강림절 후 열다섯째 주일을 지키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으로 ‘제자의 길’을 승리하는 그날까지 끝까지 따라갈 수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약속하신 하늘의 면류관을 얻게 되실줄 믿습니다. 올림픽의 시상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국가가 울려 퍼지는 감격처럼 하늘나라에서의 상급을 차지하는 제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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