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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로운 교회 (행 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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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교회 (행 20:7~12)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 당시에 아시아의 드로아 교회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즈음 사도 바울은 제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마게도냐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배를 갈아타기 위해 항구 도시인 드로아에서 한 주일 동안 머물게 되었습니다. 드로아는 에게 해 북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는 터키의 일부입니다. 이 도시는 특히 사도 바울이 꿈속에서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고 유럽 선교를 결단한 곳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은 안식 후 첫날 곧 주일을 맞이해서 드로아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방문하여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계시로 이번 여행이 아시아의 이방인 교회들을 대면하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드로아 교회의 이방인 신자들을 대하는 사도의 마음은 각별하였으며, 그의 설교는 고별 설교의 성격을 띠고 있는 만큼 한없이 진지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정은 드로아 교회의 신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을 또 다시 대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는 사도의 강론을 한 말씀이라도 더 듣기 위해 정신을 집중해서 경청했습니다. 저녁에 시작한 강론이 밤중까지 계속되었으나 모두들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불상사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유두고라는 청년이 삼층 창에 걸터앉아 졸다가 아래로 떨어진 것입니다. 내려가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사람들이 놀라 웅성거렸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이 내려가서 유두고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기를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하고, 유두고를 자리에 뉘여 놓고, 다시 다락에 올라와서 강론을 마쳤습니다. 그런 후에 신자들과 함께 둘러 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고 또 성만찬을 행하고, 날이 밝기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신자들은 소생한 유두고를 보고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습니다. 이 시간 저는 드로아 교회를 통해서 은혜로운 교회의 조건이 무엇인지 살펴봄으로 피차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은혜로운 교회가 되려면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드로아 교회의 신자들이 주일 저녁에 모임을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주일 낮에 모이지 않고 저녁 시간에 모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당시에는 주일날이 공휴일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금요일 해질녘부터 토요일 해질녘까지를 안식일로 지켰으나, 이방인들은 한 주일에 한번 씩 정규적으로 쉬는 규례가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주일 낮 시간에 예배 모임을 갖지 못하고, 하루 일과를 끝마친 밤 시간을 이용해서 모였습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자유인보다는 노예들이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 노예들은 아침 일찍부터 해질녘까지 노동을 해야 했으므로 낮에는 모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당시에는 언제라도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가해질 수 있었으므로 가급적이면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밤에 모였습니다. 

7절에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라는 구절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한 주간을 시작하는 첫날 곧 주일에 정규적으로 모여서 예배를 드렸음을 말해 줍니다. 불리한 여건 가운데서도 드로아 교회의 신자들은 모이기에 힘썼습니다. 기독교는 성도들의 모임을 중요시합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성도들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고, 성도들을 그 자녀들이라고 한 것은 기독교가 고독한 개인주의가 아니라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정과 같은 사랑의 공동체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가장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은 가정의 모습을 갖춘 교회입니다. 사도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이 별도의 예배당 건물이 없었고 신자들의 집에서 모였습니다. 그러기에 서신서를 보면 “아무개의 집에 있는 교회에게 문안한다”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드로아 교회 역시 어느 성도의 집에서 모였습니다. 자기 집을 예배 처소로 제공한다는 것은,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내놓는다는 것은 정말로 아름다운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신분이 노예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하루 종일 중노동에 시달렸으나 안식 후 첫날 저녁이 되면 빠짐없이 교회로 모여왔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힘써 모이는 그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오순절 성령께서 강림하신 것도 성도들이 모여서 합심하여 기도할 때였습니다.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 하고, 교회를 주님의 몸이라고 한 것 역시 교회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여러 성도들이 지체가 되어 서로 연합한 신앙의 공동체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은혜로운 교회가 되기를 원하신다면 모이기에 힘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모이는 것은 무슨 세상 즐거움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요즘 유행하는 신앙 사조처럼 축복을 받으려고 모이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 7절에 보니, “떡을 떼려 하여 모였다”고 했습니다. 떡을 떼는 것은 주님의 성만찬을 의미합니다. 성만찬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성찬의 떡과 잔을 나누는 것의 의미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0장 16절로 17절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16)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17)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고 마시는 것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즘 우리는 매월 첫 주에 성찬식을 행합니다 마는, 초대교회 성도들은 매주 모일 때마다 성찬식을 행했습니다. 이는 그만큼 그들이 주님의 대속의 죽음을 신앙의 중심으로 삼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기초한 신앙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위기는 수적인 감소나 재정적인 어려움이나 사회에 대한 부적응 등이 아니라,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십자가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없는 기독교는 이미 기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이같이 말씀했습니다. “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 

사랑하는 성도님들, 떡을 떼기 위해 모였던 드로아 교회의 신자들과 같이 오늘 우리도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에 교회에 모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성도들의 모임에 참석하는 회수와 정비례해서 성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회 출석을 게을리 하고서도 믿음을 잘 지켜나갈 수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마귀가 즐겨 사용하는 전략은 성도들로 하여금 예배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모이기에 힘쓰지 않는 교회는 은혜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우리에게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고 권면한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드로아 교회의 성도들을 본받아서 어떠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모이기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두 번째로, 은혜로운 교회가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드로아 교회의 신자들은 주일 저녁에 모여서 사도 바울의 강론을 경청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이튿날 날이 밝으면 떠날 것을 알고서 시간에 구애 받지 말고 강론을 계속해 주기를 청했습니다. 밤중까지 설교가 계속되었으나 모든 사람이 숨을 죽이고 경청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넓은 예배당에서 에어컨과 선풍기를 시원하게 틀어놓고 예배를 드리지만, 초대교회 당시에는 좁은 방안에 모여 앉아서 예배 했으니 환경을 비교해 볼 때,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열악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우리의 모인 윗 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다”고 증언합니다. 등불을 많이 켠 것은 방안을 환히 밝히기 위함이지만, 그와 동시에 방안 온도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다락방에 사람들이 가득해서 공기가 후덥지근한데 등불을 많이 켰으니 공기가 탁해서 졸음이 올 법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았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두고는 하루 종일 노동을 하고 몸이 피곤한 상태로 집회에 참석했을 것입니다. 더운 방안 공기로 인해 졸음이 몰려왔습니다. 

이에 유두고는 시원한 공기를 쐼으로써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창가에 걸터앉았습니다. 그것은 부주의한 행동인 것이 분명하지만, 실은 사도의 설교를 좀 더 잘 듣기 위해서 그 나름대로 애를 쓴 것입니다. 또한 그는 그 또래의 젊은이답게 창가에 앉아서도 충분히 몸의 균형을 잡아 위험에 대처할 수 있다고 자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원이로되 몸이 너무 피곤했습니다. 창에 걸터앉아서 깊이 졸던 유두고는 설교가 더 오래 지속되자 그만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삼층에서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일으켜보니 숨이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얼마나 놀랐을까요? 더구나 예배를 드리다가 사고를 당해 죽었으니, 사람들은 당황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입니다. 이를 본 사도 바울이 잠시 설교를 멈추고 아래로 내려가서 그 청년의 몸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서 말하기를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앞 절에, 유두고가 죽었다고 한 것은 틀린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의사였습니다, 그가 유두고가 죽었다고 했으니 죽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저에게 생명이 있다”고 한 사도 바울의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것은 사도 바울이 유두고의 몸에 엎드린 순간, 주님께서 그 청년을 소생시켜 주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한 유두고의 중심을 귀히 보시고 살려주셨던 것입니다. 

저는 드로아 교회의 신자들이 저녁 시간부터 밤중까지 장장 대여섯 시간이 넘도록 사도의 설교를 경청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로써 그들이 얼마나 말씀을 사모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은혜로운 교회는 신자들이 말씀을 사모하는 교회라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이 말씀을 사모하여 들을 때 말씀을 듣는 사람의 심령에 은혜가 임하고, 성도들이 은혜를 받을 때 교회는 덩달아 은혜로워 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해 놓은 책이 성경입니다. 설교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개하고 쉽게 풀어서 말해 주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사도 바울이 무슨 설교를 했는지 그 내용에 관한 언급이 없지만, 그가 쓴 서신서를 보아서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하여 그리고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성경을 인용하면서 설명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도리에 대하여 깊이 있게 설교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관해서, 그리고 주의 강림과 최후의 심판에 관해서 강조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경에 이르기를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고 했습니다. 이 구절과 같이,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생겨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고 구원의 진리를 깨달아 알게 됩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하신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우리의 심령을 수술해서 모든 죄와 거짓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진실한 성도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우리 삶 속에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 어떠한 시험과 핍박도 너끈히 이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전에 “하나님, 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달게 듣고 깨닫게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설교를 많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단 한 말씀이라도 바로 깨닫기만 하면 그만큼 우리의 영혼에 양식이 되어 영적 성숙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좋아했던지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10)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사모하는 것이 금인데, 다윗은 말하기를 “금 곧 많은 정금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사모한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꿀보다 더 단 것이 없는데,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꿀보다 더 달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한 다윗이기에 일평생 은혜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서 들을 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우리가 그 뜻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은혜로운 교회가 되려면 형제간에 사랑의 교제를 힘써야 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면 성만찬을 행했을 뿐 아니라, 애찬을 나누었습니다. 애찬이란 모인 성도들이 함께 나누는 일종의 식사를 말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노예 신분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교회에서 나누는 애찬이 일주일을 통틀어 가장 제대로 된 식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오늘날에는 애찬은 사라지고 성만찬만 남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태여 말하자면, 우리가 예배 후에 만나실에서 나누는 식사를 애찬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점심 식사를 지어서 나누는 것은 단지 점심 한 끼를 먹는 것보다 성도들이 마주 대하고 앉아서 음식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꼭 음식을 나누어 먹지 않더라도 성도들 간의 교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주일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나서 성도들과 만나서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바쁘게 돌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믿음의 형제들 간에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한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성도들의 교제 가운데 임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믿음의 형제들과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데 힘쓰는 성도들은 늘 은혜로운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반면에, 형제들과의 친교에 무관심한 성도들은 영적으로 곤비하고 은혜가 떨어진 삶을 살아갑니다. 

무교회주의자들은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에 다툼과 갈등이 있는 것을 보고서 유형 교회의 무용설을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그저 뜻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조용히 묵상하고 깨달은 말씀을 나누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신앙생활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어긋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만드신 믿음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8절에 보니,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성자들이 오는 곳이 아니라 죄인들이 와서 새 사람으로 변화 받는 곳입니다. 또 교회는 완전한 사람들이 오는 곳이 아니라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이 와서 주 안에서 온전하게 되는 곳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믿고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하루아침에 성자가 되거나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으므로 말과 행동을 통해서 부족함과 결함이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신자들 간에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주고 시험에 들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이 시대의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사도들이 생존해 있던 초대교회도 마찬가지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우리는 교회 안에서 믿음의 형제들 간에 갈등을 통해서 연단을 받아 성숙한 신앙인격을 갖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서로 부딪히면서 모난 성격이 다듬어지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고, 서로 간에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한 집에 여러 형제들이 있으면 때로 다투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친 형제들이므로 싸웠더라도 곧장 마음을 풀고 친하게 지냅니다. 형제들 간에는 약점이 있어도 흉이 되지 않으며 서로 용납해 줍니다. 가정에서는 어린 동생일수록, 좀 부족한 형제일수록 대접을 받습니다. 그것은 가정은 혈연에 근거한 사랑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이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다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녀들입니다. 주 안에서 성도들은 영적으로 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주 안에서 얼마든지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언니와 형이 동생들을 보살펴주듯이, 교회에서도 성숙한 성도들이 연약한 성도들을 보살펴 줍니다. 

로마서 14장 1절에 이르기를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하였고, 15장 1절에 보면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성도 가운데 자유인으로서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성도들이 가난한 노예 신분의 성도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는 자유자나 노예의 구별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주인과 노예가 손을 맞잡고 형제라고 부를 수 있었던 곳은 교회 밖에 없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이르기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했습니다. 2천 년 전에 노예 제도가 시퍼렇게 살아 있던 시대에 기독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만인이  평등하다고 선언했을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 그대로 실현시켰습니다. 

본문 11절에 보니,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과 드로아 교회의 신자들은 밤을 새워 사랑의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구역 모임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주일날 교회에서 성도들 간에 깊이 있는 교제를 나눌 수 없을지라도 구역에서는 얼마든지 친밀한 교제가 가능합니다. 

그뿐 아니라, 교회학교 교사나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는 것도 믿음의 형제들 간의 교제를 원활하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만나면 세속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 이야기는 무익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야기를 나누되 주 안에서 나누어야 합니다. 한자말로 ‘깨끗하고 고상한 이야기’를 청담(淸談)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깨끗하고 고상한 이야기의 차원을 넘어서 항상 은혜로운 이야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우리나라의 방방곡곡에 수많은 교회가 서 있습니다. 교인수가 수만 명이 넘는 대형교회도 있고, 수백 명이 되는 중형교회도 있고, 몇 십 명에 불과한 소형교회도 있습니다. 크고 화려한 예배당을 가진 교회도 있고, 남의 건물에 세 들어 있는 교회도 있습니다. 세련된 프로그램을 가진 교회도 있고, 그렇지 못한 교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교회의 외적인 조건을 보시지 않고 그 교회가 얼마나 교회다운가를 보십니다. 드로아 교회는 비록 신자의 집에서 모이는 작은 교회였으나 은혜로운 교회의 조건을 구비한 교회였습니다. 우리 교회도 드로아 교회처럼 온 성도들이 모이기에 힘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성도들 간에 사랑의 교제에 힘씀으로 은혜로운 교회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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