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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네게 행하신 큰 일 (눅 8:2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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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네게 행하신 큰 일 (눅 8:26~39)
 

우리나라 사람들은 '큰일 났다'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이럴 때 '큰일'이란 물론 어떤 위급한 사태나 낭패스러운 일, 즉 어떤 '좋지 않는 일'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는 이 '큰일'이란 '큰' 자와 '일' 자를 붙여서 한 개의 명사로 씁니다.
  
하지만 어떤 '중요한 일' 혹은 '위대한 일'이라는 의미에서 '큰 일'이라고 할 때에는 그 '큰' 자는 형용사로, 그리고 '일' 자는 명사로 각각 띄어서 씁니다.
그리고 발음할 때에도 전자는 연이어서 '큰일'이라고 읽지만 후자는 '큰-일'이라고 '큰' 자를 조금 늘이며 강조하면서 읽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거라사라는 동네에서 귀신 들린 한 사람을 고쳐 주신 후에 그 일을 두고 "하나님이 네게 행하신 큰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큰일'(a serious problem)이 아니고 '큰 일'(a great thing)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위해 행해 주신 일은 그 어떤 것이라도 결코 무슨 '낭패스러운 일'이 될 수 없고 오직 '실로 중요하고도 위대한 일'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의 인생에 행해 주신 '큰 일'들이 과연 어떤 것들인지를 이 말씀을 통하여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귀의 권세를 이기게 하시는 큰 일을 해 주셨습니다. 

26절로 31절에 기록하기를 "26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29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30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라고 했습니다.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라고 불린 곳은 갈릴리 동남쪽에 있는 이방 지역으로서 주로 헬라인들이 살던 곳이었습니다.
나중에 보면 이 지역에서 돼지 떼를 치고 있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 주민이 유대인이 아니었음을 잘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여기고 물론 먹지도 않았던 유대인들로서는 돼지를 키운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예수님께서 그 거라사라는 동네에 이르셨을 때 한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게 되셨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그 사람이 자기 속에 들어온 귀신에게 얼마나 꼼짝하지 못하고 붙잡혀 살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는 "옷을 입지 아니하고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귀신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전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고 있었습니다.
동네사람들이 그 귀신들린 자를 "쇠사슬과 고랑"으로 묶어 놓기도 했지만 그것까지 끊어버리고 "광야"로 뛰쳐나갈 정도로 그 상태는 심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 귀신은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완전히 주장하고 있었고 그 귀신들린 사람은 귀신의 힘 앞에 철저히 굴복당한 채 실로 무력한 존재로 전락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30절에 보면 그 귀신의 이름은 "군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정확히는 '군단(Legion)' 즉 6천 명 가량의 군인으로 구성된 로마 군대의 한 부대 단위를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아마도 그 사람은 그처럼 "많은 귀신"이 들려 있었기에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여튼 어떻게 보든지 간에 그 사람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귀신의 힘에 꽉 붙잡혀 꼼짝도 못하는 가운데 그에게서 사람다운 삶이나 모습이란 전혀 찾을 수도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오시자마자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사람 속에서 그토록 무적의 권력자처럼 횡포를 부리던 귀신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자마자 당장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하고 아예 초전부터 두 손 번쩍 들고 나왔던 것입니다.
  
그 귀신이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호칭한 것은 귀신이야말로 예수님의 본성을 오히려 사람들보다 더 잘 알고 있음을 보여 주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귀신 역시 영계에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은 '내 하는 일에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라고 따지는 뜻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압도당한 상태에서 '왜 이러십니까?'라고 그 좌절감과 공포심을 나타내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이것은 그 뒤를 이어 나오는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는 떨고 있는 말과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했다"는 내용과 연결해 볼 때 더욱 확실해집니다.
그처럼 마치 전능한 존재인 것처럼 제멋대로 한 사람의 영혼과 육신을 압도하고 주장하던 귀신이 예수님 앞에 서게 되자 바로 그 자리에서 전혀 옴짝달싹도 못하는 무력한 존재로 전락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을 주관하고 있는 사단과 그 부하 마귀들의 권세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강력하며 파괴적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사람을 미혹하고 잘못된 길로 끌고 갑니다.
그리고 원래 사람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지금까지 이런 마귀의 악한 행패 앞에 실로 무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입네 하고 큰소리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사람이라는 존재가 마귀의 힘 앞에는 그 얼마나 약합니까?
마귀가 가르쳐 주는 꾀임에 우리가 얼마나 잘 미혹당하고 마귀가 시키는 행위에 우리가 얼마나 쉽게 잘 따라가는지는 굳이 아담과 하와의 예를 들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그저 우리 각자 자신의 모습만 솔직히 돌이켜 보아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터 우리가 이 인류의 막강한 천적인 마귀와의 싸움에서 비로소 이기기 시작할 수 있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부터였습니다.
주님께서 내 심령에 찾아오신 이후부터 비로소 우리는 마귀의 악한 꾀를 물리칠 수도 있었고 마귀의 유혹적인 손길을 피하는 것도 가능해졌습니다.
그 이전이라면 그저 정욕 가는대로, 욕심 생기는 대로 따라서 했을 일을 이제는 예수님만 생각해도 간단히 이겨낼 수 있는, 아주 새롭고 정말 놀라운 체험이 우리의 생각과 생활 속에 진짜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까지는 사단과 그 부하 마귀들을 완전히 무저갱 속에 던져 넣지는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심판 때까지 보류해 두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그때까지는 여전히 마귀가 설치고 인생들에게 악한 힘을 행사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그 마귀 권세를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이미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마귀 앞에 전적으로 무력하여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로 하여금 이제는 마귀를 넉넉히 이길 수 있도록 해 주신 것 -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행해 주신 이 '큰 일'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을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귀중히 여겨 주시는 큰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어지는 32절 이하 37상반절에 기록하기를 "32마침 거기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하신대 33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34치던 자들이 그 된 것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촌에 고하니 35사람들이 그 된 것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 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6귀신 들렸던 자의 어떻게 구원 받은 것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이르매 37a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됨으로써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 그 귀신들은 자기들을 근처에 있던 "돼지 떼" 속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0099FF평화롭게 풀을 뜯어 "먹고 있던" 돼지 떼가 모조리 귀신 들리게 되면서 갑자기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게" 되었습니다.
그 돼지 떼를 지키던 사람들은 물론 난리가 났고 당장 "성내와 촌에" 들어가서 방금 일어난 일을 사람들에게 보고했습니다. 

놀란 동네사람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두 가지 사실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그들은 이전에 분명히 귀신들렸던 그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 아래 앉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즉 그들의 돼지 떼가 그 알려 준 사람들의 말대로 몰사했다는 사실도 확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 거라사 동네 사람들의 관심은 어디에 집중되었습니까?
바로 '돼지들'이었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그 정신이 온전하여진 사람을 보고 감개무량했다든지 축하해 주었다든지 예수님께 감사의 말을 한 사람은 그 동네사람들 중에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 불쌍하기 짝이 없던, 그러면서도 또한 도무지 무슨 치유의 가망조차 없던 한 비참한 인생이 예수님의 기적적인 능력으로 그처럼 큰 구원을 받았는데도, 그 어느 한 사람도 여기에는 아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대신 동네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두려워"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두려워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런 식으로 또 다른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면 더 많은 돼지 떼를 계속 잃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떠나시기를" 구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말 성경에 존댓말로 번역되어 있어서 마치 정중히 요청한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네 동네에서 당장 '꺼지라'는 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무슨 손해배상 청구소송 따위를 제기할 분위기였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그럴 수는 없었는지, 일단 더 이상의 재산 손해가 발생해서는 안 되겠다는 일념 하에 그들은 예수님에게 자기네들 동네에서 전도나 신유 따위의 사역은 제발 더 이상 하지 말고 당장 떠나라고 데모를 하면서 달려들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과 그 인생 전부가 한갓 돼지만도 못한 것으로 취급받았습니다.
그 귀신들린 사람처럼 불쌍한 다른 인생들이 예수님께로부터 더 많이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당장 자기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과는 아예 비교의 대상도 될 수 없을 정도로 무가치하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실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자신의 물질보다 훨씬 더 가치 없는 존재로 여겨왔습니다.
이것은 특히 막강한 권력을 가진 독재자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국의 대운하나 만리장성 - 이런 것들을 위하여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한 군주의 욕심 앞에서 한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은 항상 가장 값싼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다들 말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이 거라사인들이 보여 준 것, '다른 사람의 생명보다는 내 돈이 훨씬 더 중요하다.'라는 것이 사실상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본성인 것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목숨이 재물 정도가 아니라 천하보다도 귀하다.'라고 선언해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말로만 아니라 실제로 그처럼 한 사람의 생명을 지극히 아껴 주신 분도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사람이 돼지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라는 마음으로써 거라사인의 사고방식을 꾸짖으시며, 사람들로부터 버림 받고 천히 여김 당하고 있던 '한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고쳐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아무리 귀신들려서 형편없고 가치 없는 인간처럼 보일지라도 그 한 사람의 생명조차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귀하게 여겨 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 주님 때문에 저와 여러분 역시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깨닫고 자신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못난 것, 우리의 연약한 것, 우리의 더러운 것들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은 눈을 찌푸리며 당연히 경시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실로 온 천하보다도 더 귀중한 존재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그렇게 높여 주지 않았으며, 아니 우리 자신도 우리 스스로의 존재가 그렇게 중한 것인지는 꿈에도 몰랐던 것입니다.
"너희는 '이것들' 곧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아니하냐" -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얼마나 귀중히 여김을 받고 있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 주신 일, 우리 예수님께서 행해 주신 이 '큰 일'을 꼭 가슴에 새기고 자신의 인생에 큰 자신감을 가지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시는 큰 일을 행해 주셨습니다. 

37하반절로부터 39절에 "37b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38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39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하시니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거라사 사람들이 예수님께 떠나가시기를 구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그냥 갈릴리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때 그 귀신병을 고침 받은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즉 예수님을 따라오고자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를 향하여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신께서 그에게 행해 주신 일을 두고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곧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바로 그 큰 일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라'고 그에게 앞으로의 사명을 부여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조금 의아스러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공생애 초기 사역 중에 어떤 병자를 고쳐 주셨을 때에는 항상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시곤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금지명령을 내리셨던 이유는, 아직 십자가를 지실 때가 많이 남아 있던 당시에 메시아의 참된 사역에 대하여 오해를 하고 있던 사람들의 잘못된 기대감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이 거라사에서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이곳은 이방인들의 동네였기 때문에 '메시아 소망'이란 것이 퍼져 있지 않았고 그러므로 그런 오해가 일어날 소지가 없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지금 예수님께서는 동네사람들로부터 쫓겨나는 처지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실 계획이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 동네 사람들에게 계속 복음을 전해 주어야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귀신병 나은 사람에게 바로 이 사명을 맡겨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대신 복음을 전파하는, 실로 중차대한 사명이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자기 몸을 가누지 못하고 동네사람들로부터 가축보다 못한 취급을 받던 그 사람은 이제 그 "성내"에서 유일하게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에 쓰임 받는 놀라운 사명인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정말이지 그 얼마나 멋있는, 그 얼마나 '큰 일'이 그의 인생에 벌어졌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내 인생이 무엇에 쓰여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할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그저 '이 한 몸 어떻게 먹고 살 수 있을까?'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을 보면서 생각하는 전부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게 된 이후부터, 그 주님을 섬기게 된 삶을 배우면서부터 우리의 생은 전혀 딴판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어느 미국 교회의 밤예배에 참석했을 때였습니다.
그날 저녁 그 교회의 한 안내위원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옷차림도 좀 너절하고 머리도 헝클어지고 어느 모로 보나 단정한 신사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람인데, 예배당 좌석의 통로를 왔다 갔다 하면서 늦게 온 교인들을 빈자리로 인도해 주면서 예배안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표정이 너무나 즐거워 보였습니다.
아니 즐겁다는 표현보다는 신이 나 있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는 설교가 시작될 즈음까지 내내 그 신나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흔들면서 '여기 자리 몇 개 비어 있다.'는 신호를 입구 쪽에 보내주기도 하고 직접 교인들을 정말 친절하게 좌석으로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전통적인 교회에서라면 오히려 복장불량으로 주의를 받기에 딱 좋을 만한, 그리고 사실 조금은 뭔가 정상은 아닌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그 안내위원을 보면서, 저는 그가 지금 섬기고 있는 봉사를 얼마나 즐거워하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직 스스로 체험해 본 사람만이 그 재미를 알 수 있습니다.
  아무 쓸모없던 인생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하나님께는 나름대로 아주 쓸모 있는 인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은, 실로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신 너무나도 '큰 일' 중의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위해 '쓸모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귀신들렸던 거라사인에게 명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신 큰 일을 전파하는' 사명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 주님께서 바로 내게 맡겨 주신 고유의 사명입니다.
  내가 속한 반의 급우들에게 교회 나오라고 전도하는 일, 주님께서 바로 나 한 사람에게 맡겨 주신 특권적인 사명입니다.
  특히 예수님을 거부하고 핍박하는 가문에서 혼자 신앙을 지키면서 가족 전도를 위해 매일 새벽마다 눈물로 기도하면서 전도하는 성도나 공산국가나 이슬람 국가처럼 기독교를 박해하는 지역에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사 같은 분들은 바로 예수님을 아예 쫓아내어 버린 동네에 혼자 남아서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고 하신 명령을 끝까지 수행하고 있는 실로 위대한 사명인인 것입니다.
  이전에는 마귀의 종이 되어 비참하게 살던 자, 기껏 해 보았자 그저 자기 먹고사는 것에만 매달려 살던 자가 이제는 예수님 대신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예수님의 대사가 되는 이 '큰 일'에 자신의 남은 생애 전부를 기꺼이 바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우리는 그저 마귀 앞에 무력한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 우리는 돼지보다 못한 존재로 남에게 취급받고 또한 남을 그렇게 취급하며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는 자주 '도대체 왜 사는지를 모르겠다.'고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예수님께서 내게 찾아오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비로소 마귀 권세를 이길 수 있는 자신감과 승리의 체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라는 한 생명을 얼마나 아껴 주시는지를 그 독생자의 강림과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해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내 인생이 쓰이게 된 이 감격과 보람이 이제 우리 여생을 나날이 채우게 되었습니다.
  실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말 '큰 일'을 행하지 않으셨습니까? 

  '바람(Wind)'이란 요트 경주를 소재로 한 어떤 젊은 남녀의 사랑과 꿈을 그린 미국 영화입니다. 
  거기에 보면 주인공 남자가 '아메리칸 컵'이라 불리는 세계 최고의 요트 대회에 미국 대표팀 대원으로 선발되었을 때 자기 여자친구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여자친구는 남자친구의 청을 들어 주기 위해서는 자기가 하고 있던 공부까지 중단해야 했기 때문에 "왜 내가 그렇게까지 해야 하니?"하고 그에게 되묻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친구는 "지금 '내 인생에 최고로 중요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야."라고 대답합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 여자친구는 자기 남자친구의 코를 두 손가락으로 꼭 집어서 숨을 못 쉬게 하면서 "다시 잘 생각해서 말해 봐. '네 인생에 벌어진 일 중에 최고로 멋진 일(the greatest thing)'이 뭐지?"라고 묻습니다.
  그 남자는 갑작스럽게 당한 일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 있다가 이윽고 미소를 지으며 "네가 내 인생에 생긴 일 중에서 최고로 멋진 일이야."라고 코가 막힌 채 맹맹한 소리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요트를 타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메리칸 컵' 대회에 출전하는 것이 평생의 꿈이지만, 그것보다도 그처럼 사랑스러운 여인을 평생의 짝으로 만나게 된 것이야말로 자기 인생에 있어서 진짜 최고의 행운이었다고 새삼 깨닫고 고백했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당신의 인생에 있어서 벌어진 최고로 행복한 일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내가 예수님을 만나고 믿게 된 것이야 말로 내 인생 최고로 멋진 일이었다."라고 어느 누구 앞에서도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님께서 내게 해 주신 '큰 일'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깨닫고 진정으로 감사하고 있는 신자만이 언제 어디에서도 그렇게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수 사단을 넉넉히 이기게 하시고,' '나 같은 죄인을 지극히 귀히 여겨 대신 죽어 주시고,' '이제 이 예수님 위해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따라 살게 하신' 이 놀랍고도 고마운 '큰 일'들을 기억하면서, 그 어느 때나 누구 앞에서나 '예수님이야말로 내 인생에 벌어진 최고의 멋지고도 복된 일'이라고 진실하고도 자랑스럽게 고백할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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