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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라 (대상 1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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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라 (대상 10:1~14)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구약성경의 과 는 하나의 역사책입니다. 라는 이름부터가 그렇고, 오늘 본문의 바로 앞까지인 역대상 1-9장이 모두 족보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도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이 예수님의 족보로부터 시작되는 바람에 모처럼 성경을 읽어보려던 사람의 의욕을 꺾곤 하는데, 그것은 역대상의 족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족보는 단 열일곱 절에 불과하지만 역대상의 족보는 첫 인간이며 따라서 온 인류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무려 아홉 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스무 배 이상의 분량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아마도 제일 재미없고 지루하게 여겨져서 사람들이 읽기 싫어하거나 종종 건너뛰며 읽게 되는 부분이 바로 역대상 1-9장일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체가 잘 읽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첫 아홉 장의 족보를 빼고 읽는다 해도 의 내용이 와 에서 이미 다 읽은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더더욱 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책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복음서는 네 가지나 되고 각각의 복음서가 특색이 있으며 다 중요하듯이 도 조금만 더 그 책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면 그 의미와 중요성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에 앞선 역사책인 는 바벨론에 의한 유다 왕국의 멸망으로 이야기가 끝납니다. 그런데 는 유다를 멸망시켰던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가 하나님의 감동과 명령에 따라 유다 백성을 포로의 상태에서부터 해방시키고 유다 땅으로 돌아가 바벨론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건축하라는 조서를 내린 사실을 전하는 말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의 마지막 두 절을 읽어봅니다: “바사의 고레스 왕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여호와께서 바사의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대하36:22-23)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역대기는 이방족속에 의해 나라를 잃고 그 이방나라로 끌려가 온갖 고초와 수모를 당하며 살던 하나님의 백성이 그 포로생활을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와서 쓴 책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어찌하여 이방족속에게 나라를 멸망당하고 이런 굴욕적이며 처참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비통한 반성과 참회를 거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역사를 돌이켜보며 다시 쓴 역사책이라는 것입니다. 그저 단순한 사료의 나열로서의 역사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의 백성이 지켜야 할 바른 신앙의 자세라는 관점, 달리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충성 또는 불충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과 심판의 역사라는 사관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과거를 돌아보며 쓴 신학적 역사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 특징이고 의미이며 중요성인 것입니다.
   
다른 역사서들과  사이의 이 차이점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구절의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의 13-14절입니다. 은 그 마지막 장인 31장에서 사울의 죽음을 그저 사실적으로 전하기만 하고 끝나고 있음을 우리는 봅니다. 그러나 의 오늘 본문은 먼저 1-12절에서 그 사울의 죽음의 전말을 그대로 다시 기술한 후에 그 끝인 13-14절에서 그의 죽음의 근본원인을 성찰하고 신학적인 설명을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 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주셨더라.” 역대기 기자가 판단한 대로의 사울의 죽음은 그가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은 것이며 하나님보다는 점쟁이 박수무당에게 가르침을 구한 것입니다.

사울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습니까? 사울이 블레셋과 싸움을 하게 되었을 때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 대나 되고 마병이 육천 명이며 군사가 해변의 모래 같이 많은 것을 보고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틈에 숨기도 하고 멀리 도망치기도 하며 사울을 따르는 백성도 모두 떨고 있었습니다. 이런 위급한 때 선지자 사무엘이 빨리 나타나지 않으므로 백성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사울은 참고 기다리지 못해 번제와 화목제물을 가져오라 하여 스스로 번제를 드렸다가 곧 이어 당도한 사무엘로부터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라는 질책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삼상13:5-13). 

또 아말렉과 전쟁을 해야 했을 때도 사울은 사무엘을 통해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아말렉 왕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과 기타 모든 좋은 것은 남기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들만 진멸함으로써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는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삼상15:1-11).

사울이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일이었습니까? 사무엘이 죽은 후 사울이 또 블레셋과 싸우게 되었을 때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마음이 크게 떨리자 그의 신하들에게 명하여 신접한 여인 즉 무당박수 점쟁이를 불러 올려 그에게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물으려 한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삼상28:3-8).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이며 하나님을 심히 모욕하는 일이었습니다. 

신18:9-14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하신 바 있기 때문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이 명령을 어기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일이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일이며 우상숭배와 맞먹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레20:27에서는 아예 “남자나 여자가 접신하거나 박수무당이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 엄명하시기까지 한 것입니다.

사울의 범죄는 한마디로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그를 버리셨고 그 결과가 그의 죽음이며 사울 왕가의 몰락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의 첫 왕의 몰락의 역사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그 결론은 짧지만 분명한 교훈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과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라는 하나님께 신실하고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와 미래의 모든 문제의 해결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에게 힘과 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은혜로 구원받고 세우심을 받은 백성이 그 은혜를 망각하고 다른 어떤 것을 의지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명령을 따르면 흥할 것이고 따르지 않으면 망할 것이라는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교훈입니다.

지난 8월 8일에 시작해서 보름간 온 지구촌을 열광시키며 각 나라의 국민을 웃게도 하고 울리기도 한 베이징 올림픽이 이제 그 막을 내리게 됩니다. 꽉 막힌 정치와 회복의 기미가 아직도 보이지 않는 경제로 말미암아 우울하고 답답하던 우리 국민도 지난 보름 동안 선전하는 우리 선수들 때문에 많이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금메달 열 개와 종합 10위라는 목표는 이미 초과달성했습니다. 대단한 성과입니다. 아마 세계도 한국인의 저력에 놀랐으리라 생각됩니다. 저 작은 나라 한국이 어떻게 저렇게 운동을 잘 할까 의아해할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첫 금메달을 안겨준 유도의 최민호 선수는 호쾌하기 그지없는 유도를 선보였습니다. 그렇게 전 경기를 모두 화끈한 한판으로 승리하는 유도경기는 일찍이 본 적이 없습니다. 역도의 장미란처럼 모든 경쟁상대보다 훨씬 무거운 바벨을 그렇게 시원하고 깨끗하게 들어 올리며 여섯 차례의 시도 중 단 한 차례의 실패도 없이 단숨에 다섯 번이나 세계신기록을 갈아치우는 선수도 본 적이 없습니다. 양궁 단체전에서 남녀가 모두 금메달을 땄을 때는 전 세계가 무슨 수를 써도 한국은 이길 수 없다고 격찬과 탄식을 동시에 쏟아냈습니다. 

미국, 일본, 쿠바 등 자타가 공인하는 야구강국들을 차례로 격파하며 9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딴 한국야구는 온 국민에게 뿌듯함을 안겨주었습니다. 일본에게 역전승을 거둔 준결승전과 구심의 편파심판의 도움을 받으며 맹추격해온 쿠바를 끝내 뿌리치고 승리를 지킨 결승전의 경기장면은 온 국민으로 하여금 가슴 벅찬 감격과 보고 또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즐거움을 맛보게 했습니다. 금메달이 아니지만 은메달이나 동메달을 딴 선수들과 메달권 밖에 머문 선수들 가운데도 온 국민에게 진한 감동과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안겨준 선수가 한둘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이 이처럼 자랑스러울 수가 없고 대한민국의 국민임이 이토록 기쁠 수가 없는 순간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번 베이징 올림픽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4강에 오르는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나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여 개회식에서부터 한국인의 예술성으로 온 세계의 경탄을 자아냈을 뿐 아니라 종합 4위의 위업을 달성한 일 등 우리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이미 갖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입니다. 스포츠강국이라는 것은 단지 몇 몇 뛰어난 선수들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수들은 물론 온갖 희생을 감내하며 피땀 흘리는 지옥훈련을 견뎌내야 했지만 그들만의 노력으로 메달을 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선수들 뒤에는 선수들만큼이나 열심 있고 헌신적인 코치나 감독들이 있으며 그들을 돕는 지도위원과 지원팀이 있는 것입니다. 또 그들을 행정적으로,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는 각 경기연맹과 후원회와 정부 차원의 지원이 있어야 합니다. 제 돈 내며 달려가 목이 쉬도록 뜨겁게 격려하는 응원단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스포츠는 힘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포츠는 과학입니다. 엄청난 과학을 요구하는 연구와 기술개발이 함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 경기기술뿐 아니라 경기도구와 시설 그리고 운동복과 운동화 하나에 이르기까지 과학이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스포츠강국은 곧 과학기술강국이고 경제강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스포츠만 강한 나라가 아니라 종합적으로 경제과학기술대국의 반열에 든 것입니다. 준법정신이 더 강해지고 도덕적으로만 더 강해지면 정말 강한 대한민국 될 수 있습니다. 

아직도 부끄러운 점, 고쳐야 할 점, 더 발전시켜야 할 부분, 더 힘써야 할 일이 많은 우리 국민과 나라이지만 그래도 앞을 향해 꾸준히 달리며 세계 속에서 당당히 경쟁하여 살아남은 대한민국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 이후에 새로 독립한 나라나 신생국가 가운데 대한민국만큼 발전하고 성공한 나라가 없다는 것은 세계가 평가하고 인정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고 고백하며 감사하고 더욱 바른 믿음으로 이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해야 한다고 다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것도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동안 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부정하고 왜곡하며 심지어는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국가라고 자학적이고 자해적이며 반국가적이고 반역사적인 주장을 펴는가 하면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그렇게 가르치며 세뇌시키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일단의 무리들이 아직도 이 땅에서 국민을 현혹시키고 사회를 어지럽히며 나라를 파괴시키고 있음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정치집단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저 북한공산정권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자들의 어거지 주장과 폭력적 도발을 방치하는 정부당국자들과 그들에게 굽신거리며 눈치보기에 바쁜 일부 정치인들과 지식인이라는 학계의 인사들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나라가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나라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을 확실히 믿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것은 이 나라를 세워주신 하나님에 대한 도발이고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런 역사관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나라라고 믿는다면 이 나라의 흥망성쇠의 열쇄는 하나님께 달려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깨닫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에게 신실한 충성을 다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확합니다. 

오늘 본문 13-14절 말씀이 그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말씀으로 들려야 할 것입니다. 그 말씀은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의 죽음과 그 일가의 몰락의 원인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전체에 있어서 흥망성쇠의 근본원리를 설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모든 인류 특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심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은혜에 바르고 한결같은 믿음으로 응답함으로써 크게 복 받고 흥왕하는 대한민국을 만들어가는 우리가 됩시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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