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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측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방법 (삿 3: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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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방법 (삿 3:7-31)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세가 철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뜻에 대해 완전히 불순종한 것도 아니고 온전히 순종한 것도 아닌 어중간한 자세로 살았습니다. 그러한 마음의 태도는 세대가 거듭될수록 점점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상태가 되게 했고 사명과 무관한 삶이 되게 했습니다. 점점 타락하고 악화되어 마침내 가나안 사람들과 차이가 없는 지경이 된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는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진멸하지는 않으시고 그들이 부르짖을 때마다 구원자를 세워주셨습니다. 오늘은 옷니엘과 에훗과 삼갈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옷니엘 이야기는 앞으로 전개될 사사 이야기들의 기본 구조를 보여줍니다. 먼저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목전에 악을 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들을 섬깁니다(7). 그러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고 이방인의 지배를 받도록 하십니다(8).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구원자를 세우십니다(9).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사가 이스라엘을 이방인의 압제에서 구하고 그 땅이 한 동안 태평을 누립니다(10-11). 동일한 기본 구조 속에서 사사들의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각각의 이야기는 단순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다른 의미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옷니엘의 이야기 속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이 함께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무조건 편들어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 따라 악을 눈감아 주시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죄를 범하면 반드시 죄 값을 치르게 하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당신님의 백성이 회개할 때 반드시 진노를 거두어야할 의무를 가지신 것은 아니지만 결코 회개를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악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만 생각하며 두려워 떠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긍휼만을 생각하며 방자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른 신앙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의 일부분만이 아니라 모두 함께 받아들이는 신앙일 것입니다.

옷니엘 이야기는 사사기가 개인의 범죄와 회개와 구원보다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관심을 두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구약의 교회인 이스라엘 공동체의 범죄와 회개와 구원을 다룹니다. 개인주의적인 우리 시대적 경향은 성경을 읽을 때도 개인의 삶만 비춰보고 적용하도록 유도합니다. 물론 구원은 개별적이며 각자의 자기성찰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각자 따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경에 의하면 성도란 그리스도를 머리로 둔 한 몸의 다양한 지체입니다.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살든 나만 바르게 살면 된다는 자세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성경적 신앙은 자아(自我) 완성에 목표를 두지 않습니다. 성경은 자아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아(敎會我)로 살도록 가르칩니다.

에홋의 이야기는 사사들의 이야기가 공통된 기본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똑같이 반복되지는 않음을 보여줍니다. 사사기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치하시고 보존하시며 하나님께서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동시에 그분의 통치하시는 방식 혹은 구원하는 방식이 태엽을 감은 시계가 풀리는 것처럼 기계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또한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사람이 감히 미루어 짐작할 수 없는 새로운 방법으로 사사들을 선택하셨고 구원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이렇게 하기만 하면 된다’는 어떤 신통한 방법을 의지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셨습니다.

에훗의 이야기는 사람의 예측을 뛰어넘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먼저 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케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모압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진격해 올 때만 해도 이스라엘을 심히 두려워했던 민족입니다(민 22:3). 그랬던 그들이 강성해져서 이스라엘을 침공했고, 가나안 전쟁의 첫 승전지인 “종려나무 성읍”(13) 여리고를 점령했고, “십팔 년”(14) 동안 지배했습니다. 선택받은 민족이라 자부하고 있었던 이스라엘로서는 감히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었겠지요. 하나님은 무조건 우리 편이 되셔서 우리 잘되게 해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 하나님이 주신 승리의 상징인 여리고 만큼은 빼앗기지 않고 보호하시리라는 기대, 불신자를 지배할지언정 지배당하지는 않으리라는 기대가 모두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세운 에훗 역시 구원자로 예측하기 힘든 인물이었습니다. 15절에서 “왼손잡이”라고 의역된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오른손이 굽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를 의탁하여”라는 말도 ‘그의 손으로’ 공물을 보냈다가 됩니다. 에훗은 오른손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오른손은 전투에 부적합했습니다. 전투력이 없는 사람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에 모압 왕은 그의 손을 통해 공물을 받으려 했겠지요. 에훗이 “은밀한 일”을 왕께 고하려 한다고 했을 때 에글론이 모든 사람이 물러가게 한 것을 보면, 그가 에훗을 전혀 경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19). 에훗은 누가 보아도 그가 중요한 일을 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던 셈입니다.

에훗은 외모뿐만 아니라 그의 행한 일들에 있어서도 전형적인 영웅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첫 번째 사사인 옷니엘은 당당하게 전투를 벌여서 승리를 쟁취했었습니다. 갈렙의 딸을 아내로 얻었고 밭과 샘물들도 얻었었지요. 폼이 납니다. 그런데 에훗은 정면승부를 벌이지 않고 암살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는 옷 속에 칼을 숨긴 채 공물을 바치러 갔고, 에글론에게 개인 면담을 요청한 후 칼로 그를 찔렀습니다(16-23). 치밀한 계략과 기만과 술수와 거짓을 통해 승리를 얻었지요. 꼼수의 달인처럼 보입니다. 에훗을 깎아 내리거나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모습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영웅의 모습과 너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모압으로부터 구원하실 때, 오른 손의 전투력이 막강한 사람이 아니라 전투력 제로로 평가되는 인물을 통해서 역사하셨습니다. 가장 약한 것을 오히려 당신의 뜻을 성취하는 가장 요긴한 것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이 역시 인간의 예측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잘나고 똑똑한 사람, 유능하고 힘 있는 사람만 사용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못나면 못난 대로, 무식하면 무식한 대로, 무능하면 무능한 대로, 힘없는 자는 힘없는 대로, 장애가 있으면 장애가 있는 대로 쓰십니다. 에훗의 오른 손은 그 시대 사람들이 보기에는 약점이요 장애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가장 요긴한 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에훗의 왼손을 사용하여 구원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신약 교회 공동체도 이와 같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하나님께서는 특정한 스타일의 사람을 편애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백성 공동체를 위해서 필요할 때에 필요한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쓰십니다. 모범생 같은 사람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꼼수를 잘 쓰는 사람도 쓰십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보편성을 가지도록 인도하신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정한 부류의 사람만 인정받으면서 살도록 하지 않으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강하고 힘 있는 자만을 주목하고 있을 때조차도 하나님께서 만큼은 약하고 부족한 자들까지 주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은 인간이 예측할 수 없습니다. 전도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장래 일을 알지 못하게 하셨다는 가르침이 여러 번 반복됩니다. 인생사에는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이 반복되는데 사람은 언제 형통할지 언제 곤고하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또한 이것이 잘될는지 저것이 잘될는지 혹 둘 다 잘될는지도 알지 못하고 무슨 재앙이 임할지도 알지 못합니다. 역사를 분석하여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패턴을 발견할지라도 기계적으로 대응하여 살 수 없도록, 항상 현재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분을 의지하며 살도록 하려 하심 때문입니다(전. 3:11, 14, 7:14, 8:7, 17, 9:1, 11:2, 5, 6).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다면, 지난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하셨으니까 올해도 이렇게 역사하실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난번에 그런 방법으로 승리했으니까 이번에도 그런 방법으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해서 은혜를 받았으니까 나도 저렇게 하면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는 삼갈을 통해서도 금방 확인됩니다. 삼갈은 왼손잡이도 아니었고 암살의 방법을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31)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옷니엘과 에훗이 달랐던 것처럼 삼갈 역시 다른 방법으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그 분이 쓰신 한 방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려는 잘못된 경향은 간증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종종 발생합니다.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 1838-1922)가 십일조를 잘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재정적으로 그를 크게 복 주셔서 백화점 왕이 되었다고 하면, 워너메이커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십일조 드리기를 부자가 되는 방법처럼 기계적으로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금식하며 기도했던 사람의 불치병이 치유되는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금식의 방법이 항상 병을 자동적으로 치유하지는 않습니다.
 
역사하시는 방법은 예측할 수 없으나 악인을 향하여서는 진노하시고 회개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성품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 자체를 신뢰하기를 배우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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