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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미처 그럴 줄 몰랐다 (눅 22:2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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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미처 그럴 줄 몰랐다 (눅 22:24~34)
  

지난 몇 일간 우리 국민들은 베이징 올림픽을 보면서 기쁨과 실망이 교차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금메달을 딸 때마다 환호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메달을 따지 못하면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여자 양궁 개인전 같은 경우 당연히 금메달이라고 생각했지만, 1점 차이로 은메달에 그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 줄 미처 몰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꺼이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왜냐하면 선수들이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이건 결코 배신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충분히 금메달을 딸 수 있었는데, 고의로 은메달에 그쳤다고 가정해 보세요. 만약 그랬다면 사람들은 <설마 네가 그럴 줄 미처 몰랐다>고 말하면서 고개를 돌리게 될 것입니다.고의라면 그건 명백한 배신일 것입니다.   

배신, 그리고 실망, 불행하게도 세상에는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로마의 <시저>는 암살 당하던 그 순간 <오, 부루투스 너마저도...>라고 외쳤다고 전해집니다. 배신과 실망의 역사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던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금지된 열매를 먹음으로써 자신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실망을 안겨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하와 때문에 그렇게 되었노라고 말함으로써 하와에 대한 배신감을 드러냈습니다. 또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떠넘기는 아담을 보면서 하와 역시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때 이후로 우리는 실망과 배신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부간에 배신감을 느낍니다. 심지어 소꿉친구였을 때부터 알고 지내다가 철이 들어 그게 사랑인가 하여 오랜 세월 연애를 한 끝에 상대방이 없으면 못살 것 같아서 결혼한 부부까지도 나중에 <설마 네가 그럴 줄 미처 몰랐다>고 하면서 돌아섭니다. 

자기 배로 낳은 자식을 철썩 같이 믿었건만, 명절이 되어도 찾아오지 않는 자식, 겉으로는 효도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마음이 멀어진 자식을 볼 때마다 부모는 <설마 네가 그럴 줄 몰랐다>고 말하면서 섭섭함과 배신감에 눈물짓습니다. 

평생의 친구라고 여겨 내 것, 네 것 없이 살던 사람들이 어떤 일 때문에 감정이 상해 서로에게 등을 돌릴 때, 그 마음에는 <설마 네가 그럴 줄 몰랐다>는 섭섭한 생각이 가득할 것입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온 몸을 던져 전쟁터를 누비고, 임무를 수행했건만 그 일을 알아주지 않을 때, 국가에 대한 배신감을 느낍니다. 서해 교전 당시 전사한 군인들의 가족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배신당하고 실망하는 입장에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가 배신을 하고, 실망을 안겨줄 때도 많습니다. 심지어 우리 자신을 배신할 때도 많습니다. 의욕적으로 시작한 직장이건만 무능하고 부정직한 직원으로 낙인찍혀 퇴사 당할 때, 남들이 머리 좋다고 늘 칭찬했건만 치르는 시험마다 모두 낙방할 때, 청운의 푸른 꿈들이 가슴에 가득했건만 그 꿈들은 다 사라지고 늘어가는 것은 시름과 주름과 흰 머리칼뿐인 자신을 볼 때 사람들은 자신에게 말합니다. <너에게 실망했다. 그 정도 밖에 안 되냐? 네가 그럴 줄 미처 몰랐다>고 말합니다. 자신에 대한 배신감은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다고 느끼게 만들고, 때로 인생을 스스로 포기할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무서운 일입니다. 

배신하고 실망시키는 일은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배신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실망시킵니다. 여러분, 화면에 몇 컷의 사진을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보십시오. 이 사진들은 인간들이 얼마나 악하고 비정한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살기를 결코 원치 않으셨습니다. 사랑하길 원하셨고, 서로 돕길 원하셨고, 쓰러진 사람을 일으키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서로 죽이고, 미워하고, 쓰러뜨렸습니다. 그 결과 얼마나 많은 비극이 발생했는지 모릅니다. 그 고통을 우리가 고스란히 겪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실망시키는 인생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의 이야기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가장 모범적으로 주님을 사랑했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서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팔려 체포되시고 가야바 대제사장의 집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성경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예수? 그가 누군데? 난 예수 같은 사람 몰라!> 이게 주님을 가장 사랑한다던 베드로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는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는 때때로 저 자신이 주님께 대한 배신자임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저를 믿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맡겨주셨습니다. 그러나 지난 18년 5개월 동안 저는 주님을 배신한 적이 너무도 많습니다. 매년 많은 영혼들을 맡기셨지만, 그 분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여 이 자리에 없는 분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많은 교우들을 맡기셨지만, 교우들의 사업과 가정이 힘들어질 때마다 그 모든 게 축복하고 기도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한 제 책임인 듯하여 마음이 아픕니다. 교우들이 정말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볼 때마다 참 사랑을 보이지 못한 제 책임인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하게 공급해야 하건만, 믿음이 잘 성장하지 못하는 교우들을 볼 때마다 부실한 식탁을 차리는 주부처럼 말씀의 식탁이 너무 빈약한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픕니다. 제게 맡기신 시간에 대해 정직하지 못하고, 물질에 대해 성실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여 눈물이 흐릅니다. <난 너를 믿었다. 그래서 내 교회와 내 양떼를 네게 맡겼다. 잘 해 주리라 믿었다. 그런데 네가 이렇게 밖에 못하다니....>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제가 가장 슬플 때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부모님에 대하여, 남편과 아내에 대하여, 자녀들에 대하여, 친구와 이웃에 대하여 신실하셨습니까? 배신당한 섭섭함에 잠을 못 이루는 것과 똑같이 배신하고 말았다는 괴로움으로 잠을 못 이루신 적은 없으십니까? 주님께 대해서는 어떠십니까? <주님, 나 같이 부족한 사람을 장로로, 집사와 권사로, 찬양대원으로, 교사로, 남녀 선교회 임원으로, 구역장과 권찰로, 천국의 백성으로 부르셨을 때, 주님은 나를 믿어주신 것이건만, 난 이것 밖에 하지 못하니, 주님 죄송합니다....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눈물을 흘리신 적은 없으십니까? 

때로 우리의 이런 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정채봉 선생님이 쓰신 <새벽달빛>이라는 동화가 생각납니다. 여기 새벽달을 주님이라고 생각하시고 들어보십시오. 얼마나 우리가 주님을 섭섭하게 할 때가 많은지요. 

<그가 아이였을 때 새벽달은 종종 보았다. 마루 끝에 서서 길게 달빛 같은 오줌을 누던 것을. 간혹 어머니한테 들켜서 꾸중을 들었으나 그는 이런 핑계를 대곤 했다. “달빛하고 누가 더 하얀지 보려구요” / 소년이 되자 그는 집이 가난하여 우유배달을 하였는데, 그 때에 새벽달하고 가장 정이 들었다. 어떤 날은 윗사람으로부터 야단을 맞고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기도 했었다. 그러면 달빛은 하얀 손수건처럼 그의 뺨 위에 내려서 그를 위로하곤 했다. / 청년 시절에도 그는 새벽달과 친하게 지냈다. 도서관에를 새벽달빛 속에서 찾아가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어느 날 그는 새벽달한테 주먹을 쥐어 보이며 다짐을 했다. “두고 봐라 난 반드시 이루고 말 테다” / 그런데 그가 머리를 빗어 넘기고 넥타이를 매면서부터였다. 그가 점점 새벽달한테 보이지 않게 된 것은. 그것은 실로 우연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호텔의 옥상 위로 새벽달이 지고 있었는데, 어느 방의 창가에 그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속옷 바람의 여자가 있었다. “아하, 결혼을 한 게로군” 새벽달은 빙그레 웃었다. / 그 날 이후 십 수년은 그를 통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새벽달이 도시의 골목을 비추고 있는데, 그가 술에 젖어서 전신주에 기대 있었다. 그 동안 그가 변한 것은 약간 머리가 벗겨졌다는 것과 약간의 배불뚝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혀가 굳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형편없는 노옴이야...어머니, 어머니 한 분도 제대로,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있어...” / 십 수년이 또 흘렀다. 

어느 날 무심히 새벽달은 어떤 병원의 창을 넘어다 보다 말고 깜짝 놀랐다. 파리해진 그가 병실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새벽달빛이 고여들자 그것이 홑이불인 줄 알고 헛손질을 하던 그가 문득 눈을 떴다. 그가 반기는 것을 새벽달은 참 오랜만에 보았다. 그가 힘없이 말했다. “나는 그 동안 너무도 헛살아 온 것 같아. 내 삶을 내 식으로 살지 못하고 남의 눈치에 맞춰 남의 식으로만 살아온 거야. 작은 것도 서로 나누어 가지면서 사람답게 살고자 한 것이 나의 청년시절의 꿈이었는데....” / 

오랜만에 열린 그의 가슴속으로 새벽달빛이 조용히 흘러들었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보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되 편안함과 타협하지 말고, 명예를 지나치게 탐하지 말게나. 그리고 간혹 숨을 멈추고 우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새소리 한낱, 바람 소리 한 낱이 때로는 소중한 기쁨을 주기도 할걸세” / 다음 날 새벽달이 그를 찾아가 보니 그의 침대가 텅 비어 있었다. 새벽달빛만이 침대 위에 쓸쓸하게 있다가 돌아갔다.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만나게 될는지.....아니면 어떤 공동묘지에서 그의 묘비를 발견하게 될는지......>

사람들은 때로 하나님 앞에 서서 사랑을 맹세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 취하여 긴 세월 동안 하나님 품을 떠나기도 합니다. 마치 사는 재미에 빠져 새벽달을 쳐다보지도 않았던 동화 속의 남자처럼 말입니다. 이게 바로 배신이요, 배신자의 결말입니다.

그렇다면 배신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31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사단은 마치 키질을 하듯이 우리를 흔들고 있습니다. 우리를 주님의 제자의 자리에서 탈락시키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마음을 비겁하게 만들어 주님을 배신하게 충동질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배신하고 실망시키게 되는 것은 사단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옳아 보이는 우리의 말이, 때로는 정당해 보이는 우리의 입장이, 그래서 거칠 것이 없이 밀어붙이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 결국은 사단의 농간에 놀아나는 것임을 뒤늦게 깨달을 때가 많습니다. 사단은 지금도 할 수만 있으면 우리로 하여금 배신자가 되게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을 배신하도록 충동하고 있습니다.여러분, 우리 모두 여기에 놀아나지 않길 간절히 원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배신하고 실망을 안겨 드리는 우리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우리가 하듯이 <네가 그럴 줄 미처 몰랐다. 난 너만은 다를 줄 알았어>라고 하시면서 등을 돌리실까요? 아닙니다. 여기 놀라운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배신자되어 주님을 슬프게 할 때, 오히려 주님은 우리를 안아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럴 줄 알았어...난 네가 그럴 줄 다 알고 있었다구.....이리 오너라. 내가 널 안아 줄 테니, 내 품에서 울어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약 <네가 그럴 줄 미처 몰랐다>고 하시면서 등을 돌리신다면, 그것은 끝을 의미하는 것이요, 더 이상 희망은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부부들이 그렇게 끝을 선언하고 돌아섰습니다. 세상의 많은 우정이, 연모가, 사랑이 <네가 그럴 줄 미처 몰랐다>는 말과 함께 끊어졌습니다. <네가 그럴 줄 미처 몰랐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비수처럼 모든 사랑의 관계를 끊어 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릅니다. 주님은 <네가 그럴 줄 난 다 알고 있었다>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베드로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오늘 본문 33절을 보십시오. 베드로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이럴 때의 모습은 마치 <당신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아름다운 처녀 앞에 무릎 꿇고 청혼하는 멋진 기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때 주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34절을 보세요.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그래, 네 마음은 알겠다. 그러나 넌 그 맹세를 지킬 수 없을 거야. 날 세 번이나 배신하게 될 거야. 난 다 알고 있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말하는 바로 그 순간 주님이 뒤를 돌아보셨습니다. 이 장면을 누가복음 22장 60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주님의 시선과 베드로의 시선이 마주쳤을 것입니다. 복잡한 감정이 오고갔을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의 시선은 실망과 증오의 시선이 아닙니다. 사랑과 연민의 시선입니다. <베드로, 난 네가 그럴 줄 다 알고 있었다.....그러나 슬퍼하지 말아라. 난 여전히 널 사랑한다>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난 네가 그럴 줄 알고 있었다>고 말씀하시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어쩔 수 없이 연약함을 알고 계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마치 똑똑한 초등학교 1학년 학생과 같습니다. 똑똑해서 받아쓰기도 백 점, 산수 계산도 척척 잘 합니다. 동화책도 많이 읽고, 노래도 잘 부릅니다. 그래서 <난 똑똑한 아이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똑똑해도, 그 아이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나요? 그 아이가 나라를 운영할 수 있나요? 그 아이가 인생의 고통을 다 알 수 있나요? 초등학교 1학년 수준에서는 똑똑한 지 모르지만, 어른 앞에서 한없이 약할 뿐입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저 같은 목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난 신학교도 졸업했고, 난 설교도 잘 할 자신이 있고, 난 성격도 원만하고, 난 재주도 많다.....그러니 목회도 잘 할 것이다> 여러분 혹시 <난 교회도 오래 다녔고, 난 이미 오래 전에 권사가 되었고, 난 기도도 잘하고......난 교회에서 모르는 게 없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이런 생각은 <마치 난 산수도 잘하고, 난 자전거도 잘 타고, 난 레고도 잘 하고...>하는 아이와 같습니다. 그런 우리를 보시면 주님은 철없는 초등학생을 보는 것처럼 웃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똑똑하고 경험도 있습니다만, 아직도 할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우리는 아직 믿음이 부족합니다. 아직 충분히 겸손하지 못합니다. 아직 인내에 취약합니다. 질병과 죽음의 문제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가족과 이웃과 친지와의 관계를 사랑으로 유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원치 않는 배신을 하고, 실망을 안겨드릴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난 네가 그럴 줄 다 알고 있었다>고. 그러면서 <결코 이게 끝이 아니니, 다시 시작하라>고 속삭이십니다. 베드로에게 <그럴 줄 알았다>고 말씀하신 주님은 부활 후에 디베랴 바닷가로 그를 찾아오셔서 기회를 주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네가 그럴 줄 미처 몰랐다>고 냉혹하게 말씀하셨다면, 베드로는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주님을 배신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와 똑같이 주님을 배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으로부터 다시 기회를 부여받고 눈물로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도 담겨 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함으로써 <네가 그럴 줄 미처 몰랐다>고 말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지만, 주님은 <네가 그럴 줄 알았다>고 말씀하시면서,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이란 책으로 유명한 <고든 맥도날드> 목사님이 스캔들로 인해 회복하기 힘든 질곡에 떨어졌을 때, 사람들은 <네가 그럴 줄 미처 몰랐다>고 공격했지만, 주님은 <난 네가 그럴 줄 알고 있었다. 넌 연약하니까>라고 하시면서 다시 재기하게 하셨고, 목사님은 다시 신실한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부족한 제가 지금 이 순간에도 강단에 설 수 있음은 주님께서 제게 <그럴 줄 알고 있었어. 그러니 다시 힘을 내라. 난 네 편이다>라고 말씀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잘 했어>라는 칭찬 보다 더 감격스러운 것은 <괜찮아>라는 위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칭찬 받을 일보다 책망 받을 일을 더 많이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쓰러지지 않고 살아가도록 돕는 것은 칭찬보다는 위로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예배할 수 있음은 <괜찮아, 그럴 줄 알고 있었어. 다시 해 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덕분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우리의 배신으로 쌓인 모든 아픔을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로 나오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위로하시는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다시 시작하십시오. 그 주님을 만나시길 기원합니다. <나의 죄를 정케 하사, 주의 일꾼 삼으신 구세주의 넓은 사랑 항상 찬송합니다......> 잠시 후에 부를 찬송 가사를 통하여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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