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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사람과 그 행위 (골 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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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사람과 그 행위 (골 3:1~17)

      
성직자라는 직업은 어떻게 보면 전문적인 크리스챤, 프로패셔날 크리스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이 그의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하는 것이든 예배를 인도하는 것이든 성경말씀을 연구하는 것이든 그것이 그의 직업입니다. 그의 사명입니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해야 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물론 일이라고 하지 않고 사명이라고 합니다마는 그 사명이 쉴 새 없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늘 예배를 인도하고 기도하고 설교를 해야 되는 그런 의무 속에서 삽니다. 그러다보니까 그의 믿음이 자발적인 믿음인지 의무적인 믿음인지를 분간하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일반 교인들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일반 교인들은 교회를 와야 되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기보다는 오고 싶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기도회든 또 모이는 것이든 본인의 의사에 의해서,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매일 종교적인 의무감을 갖고 사는 것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더 자유롭고 또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깨어 있을 때 우리의 생각 속에는 어떤 느낌들이 지나가느냐 우리의 의식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평소에 우리가 마음속에 지나가는 생각이 어떤 것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려운 질문이지요. 판도라의 상자처럼 사람 마음속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적어도 제 경험에 의하면 우리의 의식세계에서 가장 빈도가 잦고 가장 확실한 것은 배고픔이라는 것입니다. 배가고픈 느낌, 뭔가 먹고 싶은 마음, 그것은 가장 빈도가 잦고 가장 가까이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적어도 건강한 사람은 그렇습니다. 또 하나는 졸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도 때도 없이 다가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사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깨어있어야 될 때 졸립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그것을 지금 경험하는 분이 계실지 몰라요. 이것은 시도 때도 없이 졸리다, 자고 싶다, 눕고 싶다, 이런 느낌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본능이에요. 무엇을 먹고 싶은 마음, 자고 싶은 마음, 무엇을 갖고 싶은 마음, 소원, 욕망, 이런 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주장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이것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평소에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경건한 마음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경건한 생각이 그냥 생기는 경우는 드뭅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보편적인 느낌, 욕망, 소원, 이런 것을 느끼면서 그 가운데서 삽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모이기에 힘써야 되고 기도하는 자리든 말씀이 있는 자리에 모이기를 힘써야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자의든 타의든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가까이 하고 은혜를 받을만한 기회를 가까이 하고 기도에 힘쓰고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사용해야 되는 그런 계기를 만드는 데 힘써야 되는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보편적인 평소의 느낌을 따라가다가는 마르고 닳도록 기다려도 우리 스스로 경건한 마음을 갖기가 힘듭니다. 만약 우리가 평소 느낌대로만 산다면 며칠 몇 주가 지나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어떤 자극이 오기 전까지는. 그래서 누가 우리를 교회로 인도한다든가 교회 참석을 종용한다든가, 교회에서 부른다든가, 누가 기도를 요청한다든가, 식사시간에 감사기도를 부탁받는다든가, 성경공부를 가르쳐달라고 부탁받는다든가, 이런 식으로 교회에서 봉사를 한다든가 직분을 맡았다든가 이런 식으로 의무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있음으로써 내가 신령하고 경건한 것을 가까이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그것이 우리에게 차라리 유익한 것입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에요. 목회자도 자기가 먹을 밥을 짓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에게 대접할 밥을 짓는 중에 자기도 같이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성도들을 위하여 밥을 지을 일이 없다면 아마 자기도 쫄쫄 굶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밥을 넉넉히 준비하고 자주 준비하는 것이 본인에게도 유익한 것입니다. 직업별로 수명을 비교했을 때 가장 오래 사는 직업이 뭔지 아십니까. 목사입니다. 목사들이 가장 오래 삽니다. 그 이유가 그 사명을 충실히 하라고 하나님이 건강을 주시는 면도 있겠지만 우리가 예배드리고 모여서 말씀을 가까이 하고 은혜를 받는 것이 그게 교인들에게만 유익한 게 아니고 본인도 그 혜택을 누리다 보니까 수명이 길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다 우연한 것이 아니에요. 

흑인 영가 중에 ‘every time I feel the spirit there is a moving in my heart I will pray 내가 내 마음속에 성령의 감흥을 느낄 때마다 기도하겠네’ 라는 곡이 있습니다. 이것은 감정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흑인의 영성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마음속에 기도를 하고 싶은 감흥이 올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마르고 닳도록 기다려도 결코 기도하지 않을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감흥이 그렇게 쉽게 오는 것이 아니고 그리고 아무 때나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길을 걸어가다가 갑자기 기도해야겠다는 감흥이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기도든 전도든 신령한 것에 대한 어떤 동기가 감정에서 비롯되기를 기대하다가는 아무리, 아무리 기다려도 그것을 얻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마치 무엇과 같으냐면 베데스다 못가에 천사가 간혹 내려와서 물을 동하는데 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그 연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병이 낫는다는 전설이 있어서 삼십팔 년 된 병자가 베데스다 못가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동할 때 나도 들어갈 기회가 있겠지, 그것을 삼십팔 년 동안 기다렸는데 결코 그에게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는 병이 낫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분명한 자기도 확신할 수 없는 미신과 소문에 의한 어떤 외적인 현상을 기다리고 그 현상이 자기에게도 임하면 그때는 소원을 이루고 병에서 나음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하염없이 기다렸는데 삼십팔 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그에게 찾아가셔서 하신 첫 마디 말씀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 아주 의미심장한 질문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 질문은 너에게는 언제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동하게 하겠느냐, 너에게는 언제 그런 기회가 오겠느냐 그런 류의 질문이 아니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 do you want be healed? 이것은 본인의 운명과 구원에 본인의 주체성, 본인의 역할, 믿음의 역할, 본인이 어떤 외적인 현상이든 어떤 기적이든 이런 것에 의존하지 않고 내가 오늘 내 믿음을 통하여 내 구원, 나의 치유, 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그 열쇠가 본인에게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시사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진리입니다.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삼십팔 년 된 병자처럼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구원이든 은혜든 하나님의 능력이든 성령이든 이런 모든 것이 외적인 예측할 수 없고 확신할 수 없는 외적인 현상에 좌우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그런 일이 있겠지. 언젠가는 나도 그런 경험을 하게 되겠지. 언젠가는 하나님이 나에게도 그런 기적을 주시겠지. 하염없이 기다리지만 그러나 본인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그런 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역할과 우리가 믿음을 사용할 수 있게 하시고 또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고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성령을 주시고 교회를 주시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우리의 믿음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고 우리 자신의 열쇠를 사용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것은 외적인 내가 주체할 수 없는 내가 상관할 수 없는 그런 현상에 의한 것이 아니고 그것은 미신적인 것이고 그것은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앙 생활하는 방법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그리고 즉각적인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그보다 어떻게 더 명확하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으로 이 산을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그래서 삼십팔 년 된 병자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 낫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주님이 함께 계시고 낫고자 하는 마음이 나에게 있고 그리고 나에게 믿음을 사용할 수만 있다면 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삼십팔 년 동안 요원해 보였던 일이 오늘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내게 믿음이 있을 때 오늘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삼십팔 년 된 병자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하나님의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모두가 그것을 알고 지킬 수만 있다면 우리 모두가 그 효험을 경험할 수 있는 믿음의 원리가 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평소 느낌, 본능, 감정을 의지해서는 아무런 소득이 없고 거기에서 경건한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물을 파는 사람의 심정처럼 어떤 환경이 있든지 아무리 건조하고 메마른 환경에서든지 거기에서 우리가 신앙의 우물을 파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신앙의 우물을 파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생수는 내 감정에 비롯되는 것이 아니고 그 순간에 영적인 곳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인 우물을 파는 여기에 경건의 습관, 훈련, 또 믿음, 믿음을 감정이 아니고 믿음을 의지하는 법 이런 모든 것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신앙생활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몇 가지 'D'로 시작하는 단어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D’는 decision - 결단입니다. 뜻을 정하는 것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다니엘이 뜻을 정하여 자기의 몸을 더럽히지 않으리라 한 것처럼 우리의 신앙의 발전이 있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뜻을 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리라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리라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리라 하는 결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결단을 한 다음에 두 번째 ‘D’는 discipline-훈련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뜻이 있어도 훈련되지 않은 사람은 결과를 선하게 거둘 수가 없습니다. 군인이든 운동선수는 훈련을 해야 됩니다. 훈련장에서 땀을 많이 흘릴수록 전쟁터에서 피를 적게 흘린다 라고 합니다. 여러분 운동선수들이 타고난 재능이 있어요. 타고난 건강이 있어요. 그러나 그것만으로 올림픽에 나가서 승리할 수 있는 게 아니고 훈련해야 됩니다. 남들이 놀 때 훈련해야 됩니다. 남들이 쉴 때 훈련해야 됩니다. 그래서 자기의 종목이 마치 천성처럼 몸에 익어야 됩니다. 자동적으로 그것을 할 수 있도록 하루아침에 되는것이 아니지요. 

신앙도 마찬가지예요. 어느 누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재능을 타고 났다고 합니까? 그런 재능은 없습니다. 이것은 다 결단이 필요하고 훈련이 필요합니다. 기도생활 하는 것도 훈련 이예요. 죄의 유혹을 이기는 것도 훈련 이예요.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훈련입니다. 이것은 거져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저는 여러분의 훈련관이고 여러분은 훈련소에 들어온 졸병 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유능한 훈련관일수록 엄합니다. 봐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훈련관은 엄해야 그것을 받아들이지요. 그러지 않고 ‘나 피곤한데요, 저 오늘 손가락에서 피나요, 다리에 쥐 났어요....’ ‘so what?’ 그래도 뛰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강해지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D’는 delight-즐거움이라는 것인데, 뜻을 정하고 훈련을 받아야 신앙생활이 즐거워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성경말씀을 읽을 때 꿀송이보다 달다고 얘기하는 분들, 처음에는 얄밉죠. 나는 성경말씀만 보면 졸음이 오는데 저 사람은 어떻게 해서 성경말씀이 꿀송이 보다 달까? 그분도 처음부터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또 ‘나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라고 말씀하는 분도 처음부터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본인도 기도시간에 뭘 기도해야 될지 모르고 지루하고 일분만 지나면 기도할 것이 떨어지는 경우였는데 뜻을 정하고 훈련을 받으니까 이제는 기도하는 시간이 즐거워 지는 것입니다. 신앙이 즐거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D'를 추가한다면 duty-이건면세점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의무를 말하는 것입니다. 목사도 목회가 의무입니다. 의무적으로 교회를 오고 예배를 인도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의무이기 때문에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줄 몰라요. 본인의 어떤 천성이든 육신적인 본능을 극복하고 나는 놀고 싶지만 일하고, 쉬고 싶지만 교회 가서 성경을 연구하고, 놀러가고 싶지만 교회에 오고, 아무것도 안하고 싶지만 성령을 쫓아 행해야 되는 의무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 혜택이 되고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경건한 의무라는 것은 유익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스스로 멍에를 지고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자신에게 의무를 부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에게 유익합니다. 신앙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우리 모두는 그저 내 소원대로 내 멋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신앙을 붙잡아 줄만한 어떤 닻을 내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 봉사든, 직분이든, 내가 영적으로 남을 섬겨야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의로운 일에 붙잡아 놓고 멀리 가지 못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 새롭게 된 것을 자신의 삶에 실질적으로 적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사도 바울은 그것을 옛날의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는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9절에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실질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법적이고 위치적인 변화가 있고 실질적이고 경험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이 두 개는 서로 다릅니다. 우리를 천국가게 하는 변화는 전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심으로 법적으로 위치적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셨어요. 그것 때문에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위치적인 변화는 즉시 일어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행위가 당장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행위가 의롭게 변화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고 훈련이 필요하고 습관화돼야합니다. 신앙이 습관화 되는 것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라’ 그 말은 이미 우리는 새사람이 되었지만 옛사람의 흔적과 습관과 옛사람의 텃새가 여전히 남아있어요. 그걸 의도적으로 벗어버리고 그리고 이제 의도적으로 새 사람의 행위를 입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습관, 루틴(routine), 훈련, 봉사, 이런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사람을 벗으면 벗겨지느냐? 벗겨집니다. 다만 새 사람을 입는 순간에 벗겨집니다. 새사람을 입고 새로운 삶에, 새로운 부르심에 그 길을 가다보면 예사람, 옛 사람의 습관, 흔적, 죄의 기억, 죄의 영향력, 죄의 지배력, 이런 것이 떨어져 나가고 이제는 우리의 소원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고 감정마저도 변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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