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광복절] 해방되어 자유하게 하심 (눅 4:16~19)

  • 잡초 잡초
  • 273
  • 0

첨부 1


해방되어 자유하게 하심 (눅 4:16~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 4:18-19)

우리는 지난주간 8,15 광복절을 지냈습니다. 우리 민족이 36년간의 일본제국의 지배와 압박에서 해방된 이 날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감격의 날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종결되고 일본의 히로이토 천왕의 무조건전인 항복으로 우리나라는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이 해방의 날은 우리 민족의 주권과 함께 자유를 되찾은 날입니다.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함석헌 선생은 8.15 해방을 “도적 같이 불의에 왔으며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광복절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해방과 함께 외적으로는 해방의 자유를 이루었으나 내적  으로는 이념과 비인간의 노예화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광복 후 우리민족의 역사는 이념적 대립과 갈등으로 분열의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그 이념을 이용한 대립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도록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립과 함께 분열의 혼란의 역사를 가듭해 오고 있습니다. 

이 이념의 노예화와 함께 극한 개인주의와 물질추구의 탐욕으로 있어서는 안 될 다양한 인간파괴의 역사를 만들고 있습니다. 아울러 정치적 대립과 경제적 계층 대립의 갈등의 아픔과 함께,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기를 좋아하고, 증오와  편 가르기로 희망과 보람보다는 절망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총체적 절망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진정한 자유를 누릴 해방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 자유를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며 생명까지도 바치려고 합니다. 그런데도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했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에서 사역의 시작과 함께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이 세상에 오신 자신의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우리를 자유 하게 하시고자 오신 그리스도이심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포로 됨에서 해방
  
예수님은 우리를 포로 됨에서 해방시키시어 자유 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예수님이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주시는 분이심을 말씀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죄의 지배아래에서 그 역사를 지배하는 사단의 포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포로 됨의 인간들이 만들어 놓는 것은 불의와 패역의 비인간화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거라사인의 지방에서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는 귀신들린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막5:1-20) 그들은 어느 누구도 제어할 수 없이 사납고 거칠었습니다. 여러 번 쇠고랑을 채워 보았지만 그들은 매번 쇠사슬을 끊고 쇠고랑을 깨뜨렸습니다. 그들은 무덤사이에서 살면서 소리를 지르며 돌로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 속에서 이들을 지배하며 조정하는 군대귀신들을 쫓아내시어 귀신의 지배에서 해방시키셔서 자유 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작은 자야 네가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2:5)고 하심으로 질병의 원인인 죄를 용서하심으로 그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이 왜 이렇게 패역하고 악해가고 있습니까? 왜 인간들이 고귀한 인간다움을 잃어가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왜, 진실과 공의가 무시당하며 거짓과 무질서와 향락과 타락이 난무하고 있습니까? 이념이 무엇이고 계층의 차이가 무엇이기에 왜 화목하지 못하고 정죄 하고 판단하며 증오하고 미워하면서 살아갑니까? 왜 화목하지 못하고 싸우고 죽이며 파괴하며 평화하지 못합니까? 이런 모든 것은 인간이 죄의 힘과 어두움을 조성하고 지배하는 악한 영의 포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우리를 이 포로 됨에서 해방시켜 자유 하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 하게 하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자유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악과 사단의 노예에서 해방된 참된 자유는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는(그리스도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엡2:1-7)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해방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세상의 사람들처럼 살아가서는 아니 됩니다. 바울은 세상의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경고하시면서 세상 사람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4:18-19)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아가지 마십시오. 예수님 안에서 죄악과 악한 영의 포로 됨에서 해방되어 자유 한 분명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암흑에서의 해방 
  
예수님은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서의 말씀으로 ‘눈먼 자에게 자유를’주시는 분이심을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암흑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어 볼 수 있는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리고의 바디매오는 소경이며 거지였습니다. 이 바디매오의 불행은 못 보는 것이었습니다. 보지 못함으로 거지가 되었고 불행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바디매오의 눈을 고쳐주시어 보도록 해 주셨습니다.     
  
인간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는 데 불행이 있습니다. 진리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보지 못하기에 암흑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임에도 그것을 바로 보지 못하기에, 수치와 부끄러움과 그리고 가난하고 가련한 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에게 보게 하심으로 암흑 속에 살고 있는 우리를 해방하여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진화론을 주장한 다윈은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포기하고 캐임브리지 대학으로 전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신학이나 목회보다는 동식물에 관심이 많아 식물학자 헨슬로와 교분을 맺고 그 분야에 지도를 받았습니다. 스물 두 살 때 헨슬로의 추천을 받아 해군 측량선 비글호를 타고 남아메리카, 남태평양의 여러 섬과 호주등을 다니며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특히 남태평양의 갈라파고스 제도의 여러 섬에서 동식물과 지질등에 대해 세밀한 관찰을 하고 진화론에 대한 심증을 굳히고 ‘종의 기원’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진화론을 주장하는 그에게 제일 어려운 과제는 원숭이가 사람이 되었다는 이론을 뒷받침 할 원숭이와 사람의 중간고리를 연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다시 남태평양으로 가서 그 흔적을 찾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남태평양에서 그의 이론을 주장할 연결고리가 될 만한 사람을 발견한 것입니다. 원숭이와 사람의 중간, 원숭이 같기도 한데 원숭이는 아니고 사람 같기도 한데 사람 같지는 않은 그런 무리들이 집단으로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이나 먹고 아무렇게나 자는 것 같았습니다. 두발로 걷다가 네발로 기어다니기도 하고 그들의 말이 언어인지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윈은 확신했습니다. 이들은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원숭이도 아닌 분명히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되는 과정의 중간고리일 것이라고 믿고 돌아갔습니다.
  
십여 년이 지난 후 다윈이 다시 그 곳에 갔을 때 그 사람들이 모두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찬송하며 예배를 드리며 극히 정상적 문명인으로 문화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원숭인지 사람인지 구별이 안 되는 무리가 아니라 문명인이었습니다. 
  
그것은 ‘요한 패턴’이란 선교사가 그 섬에 들어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는 그들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가르치고 음식을 만들어 먹게 했습니다. 그들에게 기도와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요한 패턴은 그들이 원숭이와 사람의 중간 고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고귀한 사람으로 보았음으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게 되자 그들의 영혼이 갇혔던 암흑에서 해방하여 진리의 빛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을 깨닫고 찾게 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룩하고 신령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들은 원숭이와 같은 무지의 암흑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다움의 삶을 살아가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 진리 비인간의 암흑 속에서 짐승처럼 살지 말아야 합니다. 짐승과 같은 삶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가는 자유인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눌림에서 해방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을 읽으시면서 자신이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든 감정과 상처 난 감정에 억눌리어 살면서 그것을 가지고 병들고 파괴된 인격을 형성하며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그 잘못된 감정과 인격에서 해방되어 자유하지 못하고 불행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교만과 편견에 억눌려 스스로 자신을 책임지지 못하는 불안과 불안정한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다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16:24-25)  예수님은 그 분의 ‘말씀’과 ‘생명’과 ‘영’으로 우리를 이 모든 억눌림에서 해방시켜 우리를 자유 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런 병든 감정과 의식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는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회사에 전화교환수와 사무원이 있었습니다. 그 전화교환수는 절대로 사과하지 않는 삶의 태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상처 난 감정과 병든 인격에 억눌려있기에 사고한다는 것에 무서운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심지어, “사과를 하기보다는 차라리 죽겠습니다.” 라고까지 했습니다. 이에 반해 사무원은 “나는 하루에 열두 번이라도 사과하겠습니다. 사과는 제일 쉬운 일입니다”고 했습니다. 이 사무원의 사과는 건강한 감정과 온전한 인격에서 자연스럽게 사과할 수 있었던 입니다. 그런데 전화교환수는 평생을 전화교환수로 머물렀고 사무원은 후에 회사의 최고 경영자가 되었습니다. 전화교환수는 자신의 감정에 억눌려 사는 여인이었고 사무원인 다른 여인은 순간순간 자신을 억누르는 감정에서 해방된 자유를 누리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시대의 인간들의 병든 감정, 상처 난 마음, 교만과 자만의 삐뚤어진 의식의 억눌림 속에 살아가면서 이 세상을 얼마나 병들게 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분의 용서와 사랑, 그분의 권능으로 그 억눌림에서 해방되어 자유 하여야 합니다.  
  
실존주의 작가 ‘카프카’가 쓴 “아카데미 보고서” 란 단편소설에 보면 어느 날 아프리카의 황금해안에 살던 원숭이가 ‘하렌백’ 상회의 사냥꾼에게 잡혀 배 안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배에 갇힌 원숭이는 자유를 찾아 그 배에서 탈출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써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생각해 보니 비록 빠져나가야 갈 데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원숭이는 생각 끝에 그 배에 탄 사람들의 흉내를 내면서 살아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결국 사람들처럼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고 말도 배워서 지껄이다 보니 인간처럼 되어 버렸고, 이렇게 인간과 같이 된 원숭이가 아카데미 회원들에게 편지를 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원숭이는 철장 속에서나 철장 밖에서도 자유를 찾을 수 없었으나 인간처럼 됨으로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배 안에 갇힌 원숭이처럼 비인간의 모습으로는 자유 할 수 없습니다. 원숭이가 인간처럼 되듯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데서 자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의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 하게 하리라” 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데서만이 참 해방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을 ‘포로 됨’과 ‘암흑’과 ‘눌림’에서 해방시키시어 자유하게 해 주십니다. 그 자유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며 갈망하는 가난한 자의 마음이 되십시오. 그러므로 복음의 능력을 받아들이십시오. 복음을 주신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여 베푸신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진정 해방의 기쁨을 가지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년의 은혜의 해를 주셔서 해방되게 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이신 예수 안에서 해방의 자유를 가지고 사는 복된 자가 되십시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