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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혼자라고 느껴질 때 (막 5: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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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라고 느껴질 때 (막 5:25~34)


한 목사가 사랑과 결혼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고 있었습니다."아담은 하와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와를 보자마자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어디 갔다가 이제야 왔어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면서 기뻐했는데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런 결혼이 되어야 합니다."한참 열 번을 토하는데 한 성도가 입을 삐죽거리면서 한마디 합니다."아이참, 목사님은 뭘 모르시네. 아 더 고를 게 있어야 고르지요!"하더랍니다. 맞는 이야기 같습니다. 

어쨌거나 하나님은 인간이 외롭게 살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인류가 시작되기 전에 필요한 인간의 조건들을 완벽히 해결해 주시고 인간들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인간은 결코 외로워서는 안 된다는 인간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 최초가정으로부터 시작해서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고독하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배려가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보면 인류는 영원히 외롭지 않을 것 같고 고독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실상은 여전히 외로움이 존재하고 고독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요즈음의 세상은 겉보기엔 화려하고 왁자지껄한 것 같아도 내면을 들여다보면 심한 고독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군중은 요란한데 개개인은 고독한 삶을 사는 것이 현대입니다. 직장에 다니면서도 조직 내의 경쟁체제 때문에 동료의식이 없고 서로 고립된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가정에서도 외롭습니다. 부부가 살을 맞대고 살면서도 때로는 살벌합니다. 두 남자가 자기 부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남자가 자랑스럽게 말합니다."내 아내는 정말 천사야 천사!"그 말을 듣고 있던 다른 남자가 한숨을 푹 쉬면서 말합니다."자네는 좋겠다. 우리 마누라는 아직도 살아 있어!"

현대인의 고독은 의외로 심각합니다. 문명은 발전했는데 인류는 여전히 외롭고, 문화는 발달하는데 더 큰 고독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쩌면 고독은 인류가 끝날 때까지 함께 가야할 동반자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외로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고독에 대한 인간의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고독을 이기지 못한 인간이 결국 자아상실의 길을 걷게 된다는[에릭 프롬]이나, "인간은 혼자 있는 고독한 순간에 악의 유혹에 넘어가게 된다."고 경고한[마르틴 루터]의 말처럼 고독은 그만큼 고통스러운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반면, 고독을 잘 승화시켜 극복을 하게 된다면 인생에 있어서 그것은 값진 기회가 될 것입니다. [베토벤]은 고독한 산책길에서 무수한 천상의 선율을 떠올렸으며,[뉴턴]이<만유인력>을 발견하게 된 것도 사과나무 아래서 그만의 고독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임을 생각해 본다면 고독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한 가지의 사실을 받아들여야합니다. 누구나 고독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고독을 받아들이는 유형은 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독이란 인간관계의 형태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 속에서 고독을 느끼기도 하고 해결하기도 하며 살아가는데 그 관계는 대략 몇 가지의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 대인관계 기피형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하고 귀찮게 느껴져 다른 사람의 간섭 없이 혼자 생각하고 일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위험이 있는 고독입니다. 

둘째, 대인관계 미숙형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친해지고 싶은데 사람 사귀는 기술이 서툴러 친구를 만들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말과 행동이 부적절하거나 공격적이어서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상대방에게 거부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먼저 말을 건네거나 먼저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고독 속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대인관계 피상형입니다. 겉으로는 대인관계가 원만하여 주변에 알고 지내는 사람은 많지만 절친한 친구가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속마음과 감정을 잘 털어놓지 않는 깊이보다는 넓이를 추구하는 인간관계형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은 많지만 진정 고민과 어려움을 상의할 사람이 없어 고독을 느끼게 됩니다. 

넷째, 대인관계 중독형의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의존적이어서 혼자 있으면 불안하고 허전해 하며 늘 누군가와 함께 있으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회성이 좋다고 오해할 수 있는 사람들인데 문제는 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만 지나친 기대를 가지고 있어서 현실 속에서 기대가 빗나갈 때 쉽게 실망하고 고독감을 느끼게 됩니다. 가령 믿었던 친구가 배신을 했다든가 상대방이 조금만 관심이 소홀해지면 우울해지는 성격이 되고 맙니다. 

철학자[하이데거]의"인생은 던져진 생애를 사는 것"이라는 말은 황량하기 그지없고 허전하기 짝이 없는 인생을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이 세상에, 고독에, 혹은 주어진 운명에 던져진 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독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외로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평생 고독과 외로움 속에 빠져 살다가 죽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고 역시 인간은 이 고독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가장 행복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외로움이나 고독은 반드시 이겨 낼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스위스의 내과 의사요 정신 의학자인[폴 투르니에(Paul Tournier)]는 오늘 날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이러저러한 심리적 덫에 걸려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점점 더 고립되어 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고독>이라는 책을 통하여 고독의 원인과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이 책에서<고독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과연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상구는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중요한 해답을 제시합니다. 인간적인 경쟁심, 이기적인 마음으로부터 오는 지나친 독립심, 탐욕, 자기주장과 질투 등 인간중심의 성격이나 자기중심의 품성들이 고독을 초래하는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 고독에서 벗어 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나누는 친교만이 고독을 벗어나는 길이라고 역설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사실을 깊이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마치 현대인을 대표하는 것 같은 중요한 인물이 나옵니다. 병든 여인입니다. 당시에 여자라는 존재만으로도 천대의 대상이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혈루증이라는 중병을 앓는 여인입니다. 그것도 지긋지긋하게 12년 동안이나 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많은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나 많은 것을 잃고 허탈한 상태입니다. 

먼저는 소속감을 잃어 버렸습니다. 아무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외톨이 입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귀찮은 존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짜증나게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더 큰 문제는 스스로도 존재 가치에 대한 자신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단지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쓸모없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스로가 그러니 다른 누구에게도 그 가치 감을 인정받을 소망이 있을 만무합니다. 누구하나 달려 와서"당신 정말 필요한 존재니까 건강하게 회복되어서 오래 살아야 돼"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자신에 대한 신뢰감이라고는 단 몇 퍼센트도 없습니다. 무능해도 이리 철저히 무능할 수가 없는 자신을 믿을 만한 마음이 무너진 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여인이 겪는 고독은 엄청난 고독입니다. 그 여인이 겪었던 심리적 고독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하루하루 새날이 다가오는 것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것이 때로는 원망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큰 심리적 고독 속에 무려 12년을 지내 왔고 이 고독은 또 앞으로도 얼마나 계속 되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고독이 이 여인을 괴롭힙니다. 도덕적 고독이 그것입니다. 오늘 이 여인의 질병은 아주 고약한 질병이었습니다. 성경은"혈루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이 병은 다른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본인 스스로가"나는 이런 고약한 병이 걸려서 당신과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라고 표시하고 멀리 떨어져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도덕적으로 완전히 분리 된 삶을 살아야 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남에게 버려졌다고 느껴질 때 그 설움이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 남이 나를 버린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제는 나도 나를 버리고 모든 사람 앞에 무관심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게 도덕적 고립이요, 얼마나 괴로운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만나주지 않아서 괴로운 게 아니라 오히려 누가 나를 찾아와서 만나줄까 걱정입니다. 가까이 오는 사람을 일부러 피해야 하는 사람이니까요. 

자 그런데요 이 모든 고독이 아무리 깊다 해도 특별히 견딜 수 없는 고독이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 고독입니다. 민 15:37절이나 신22:12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이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을 부정한 여인이라고 규정했으며 회중 앞에 나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특별히 성전에도 들어갈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데에 가지 말라 하는 것은 하겠습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는 데까지도 가지 말아야 하는 그런 사람이니 이것이 견딜 수 없는 고독 중의 고독입니다.
불행합니다. 철저히 불행 속에 사는 여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정도의 불행에 처했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이 여인에게도 행복을 갈망할 자격은 있다는 사실입니다. 행복에 목말라 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믿었고 이 여인은 이 사실에 매달립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그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택했습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께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 불행 속에서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나옵니다. 예수님만은 내 사정을 아실 것이라고, 내가 말을 안 해도 아실 것이라고, 그에게 지혜가 있고, 그에게 능력이 있고, 그에게 자식이 있고, 그에게 유일하게 사랑이 있다고 믿고, 말없는 신앙고백과 함께 나옵니다. 사실로"어디가 아프냐? 무슨 문제를 가졌느냐?"고 예수님이 묻는다면 대답할 수도 없는 여인입니다. 이런 고독한 마음, 이런 절박한 마음, 철저히 혼자라고 느껴질 때였지만 행복을 향한 목마름으로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며 마지막으로 생각한 한 가지 방법, 그것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이었습니다. 

고독한 그 여인, 홀로된 그 여인이 생각해 낸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 나름의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비밀한 경배요, 말없는 예배요, 소리 없는 고백이었습니다만 바로 거기에 주님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오늘 이 여인에게는 이제 비방도 상관없습니다. 과거를 캐묻는 어떤 사람의 말도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그저 마냥 행복할 뿐입니다. 이 행복이 있을 때 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타나게 되고,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남을 행복하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고독하십니까? 정말 이 여인보다 더한 고독입니까? 외로우십니까? 정말 이 여인만큼 외롭습니까? 그래서 그 고독 앞에 절망하고 그 외로움 앞에 포기하고 떠나가시겠습니까? 남처럼 살지 못해서 고독합니까? 가진 것이 부족해서 외롭다고 느낍니까? 아무도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혼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은 한평생 불행하게 살수도 있습니다. 한 평생 행복하게 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진짜 행복을 경험한 사람은 다시는 불행해 질 수가 없습니다. 고로 여러분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행복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때때로 혼자라고 느끼고 있다면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살다가 때로<혼자라고 느껴질 때> 그때 주님이 바로 내 곁에 계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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