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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레스웃사 (삼하 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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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레스웃사(삼하6:1~11)


여러분, 혹시 이런 우화를 들어보셨습니까? 제목은 ‘소와 사자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소와 사자가 있었습니다. 둘은 몹시 사랑했습니다. 소는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풀을 매일 사자에게 대접했습니다. 사자는 괴로웠지만 참았습니다. 사자도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살코기를 매일 소에게 대접했습니다. 소도 괴로웠지만 참았습니다. 그러다가 다투기 시작했고, 끝내 헤어집니다. 그들은 헤어지면서 서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최선을 다했어! 난 잘못 없어!”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너무 안타깝지 않습니까? 소나 사자나 정말 잘해 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 게 탈이었습니다. 상대방의 뜻은 전혀 헤아리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동했습니다. 결국 열심히 한 모든 게 허사였습니다. 상대방을 실망시키고 자기도 실망했습니다. 부부 관계이든 부모 자식 관계이든 친구 관계이든 모든 인간관계에서 이런 일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큰 비극이죠.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자기는 열심을 다합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축복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섭섭해집니다. 원망하게 됩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 결과가 고작 이거야?” 심지어는 하나님을 멀리 하고, 신앙생활을 접는 경우도 생깁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하면서 혹시 하나님 앞에 이와 같이 섭섭하고 원망스런 경우가 없었습니까? 지금 혹시 그렇지는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데도 어렵고 힘든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하나님이 연단하시는 기간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좋은 길을 열어주실 겁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겁니다. 조금만 더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하나는, 죄송하지만 신앙생활을 잘못 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나는 잘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지만, 나는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그렇지 못한 경우입니다. 만일 이런 경우라면 속히 깨닫고 돌이켜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게 바로 이겁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보실 때 전혀 엉뚱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런 경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웃사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법궤를 운반하다가 즉사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비극적인 죽음입니까? 아니, 어떻게 신앙생활 하다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그렇게 비참하게 죽을 수 있단 말입니까? 본인도 그렇고 주변에서도 그렇고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부인할 수 사실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웃사가 신앙생활을 잘못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 앞에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살펴보면서 내 생각에 잘 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잘 하는 신앙생활이 되면 좋겠습니다. 

먼저 웃사의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법궤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법궤(法櫃)는 성막(聖幕)의 지성소(至聖所) 안에 놓았던 궤로서 하나님 임재의 상징물입니다. 성막은 광야 시대에 하나님의 지시로 건축된 것인데 천막이죠. 두 칸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안쪽에 있는 천막이 지성소입니다. 법궤는 지성소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법궤 뚜껑 부분이 속죄소이고, 그 위에 황금으로 만든 그룹 천사 둘이 마주 보고 있습니다. 바로 그 사이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며 이스라엘을 만나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시켜 주기 위해 성막과 법궤를 사용하신 겁니다. 

본문 2절에 보면 법궤의 의미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2절. “ ... 그 궤는 그룹들(cherubim)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법궤 안에 세 가지 물건이 들어있습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 십계명 돌판, 그리고 만나가 든 항아리 등입니다. 하나 같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 증거물들입니다. 그래서 법궤를 가리켜 증거궤(The Ark of the Testimony) 혹은 언약궤(The Ark of the Covenant)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 당시는 다윗 왕의 시대입니다. 본래 다윗은 목동 출신인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쳐부수고 일약 장수가 됩니다. 그리고 급기야 사울 왕의 사위가 됩니다. 그러나 백성들 사이에 다윗의 인기가 올라가자 질투를 느낀 사울이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다윗은 망명을 합니다. 그러던 중 사울 왕이 전사했고, 마침내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하지만 사울 일파의 반발과 블레셋의 침략으로 나라가 계속 어수선합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윗이 모든 반대 세력을 격퇴하고 왕권을 견고히 세워갑니다. 그 후 왕권 수립의 기념으로 예루살렘(다윗 성)을 수도로 정합니다. 그리고 명실상부한 신정국가로 세우기 위해 예루살렘에 법궤를 옮겨올 생각을 합니다. 당시 법궤는 거의 방치되어 있었는데, 수도 예루살렘으로 옮겨온다는 것은 정말 좋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법궤 운반 사건 도중 웃사가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1] 바른 신앙의 중요성 

본문의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법궤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삼상7:1~2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는 엘리 제사장 시대인데, 블레셋에 법궤를 빼앗겼다 도로 찾았을 때입니다. 기 ‘기럇여아림’(본문 2절의 ‘바알레유다’와 같은 곳)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하게 됩니다. 아바나답의 아들 엘리아살이 관리 책임을 맡았는데, 그로부터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렀는지 대충 계산해 볼 수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 이후 사무엘 시대 20년(삼상7:2 참조), 사울 왕 시대 40년, 그리고 다윗이 왕이 된 후 1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니까 무려 70년 동안 방치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다윗이 법궤 운반을 시도하는 겁니다. 그 광경이 대단했습니다. 백성들의 대표 3만 명이 동원되었고(1절), 각종 악기 연주자들도 동원되었습니다.(5절) 이때 법궤 운반을 맡은 사람들이 바로 웃사와 아효입니다. 3절 보면, 그들이 아비나답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70년 세월의 흐름을 감안하면 아들이 아니라 후손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흔히 후손들을 통틀어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이처럼 법궤를 성대한 모습으로 운반하는데, 도중에 어떻게 됩니까? 7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하나님의 진노로 웃사가 현장에서 즉사하고 맙니다. 그러자 누구보다 다윗이 당황합니다. 8절.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다윗은 웃사가 즉사한 장소를 ‘베레스웃사’라 명명했습니다. ‘베레스’는 히브리어로 ‘치다’ ‘찢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베레스웃사는 ‘웃사를 침’(Outbreak against Uzzah)이란 뜻입니다. 

사태가 이쯤 되니까, 다윗도 백성들도 벌벌 떱니다. 결국 법궤 운반 행사가 중단됩니다. 

그리고 법궤가 임시로 어디로 옮겨집니까? 오벧에돔의 집입니다. 11절.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법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 동안 보관되었는데, 신기하게 이번에는 오벧에돔이 복을 받았습니다. 아비나답(웃사)의 집안에 70년이 보관되어 있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석 달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무려 280배 차이가 납니다. 그렇다면 정말 이상합니다. 70년 법궤를 모셨던 집안의 웃사는 저주 받아 즉사하고, 3개월 모셨던 오벧에돔의 집은 큰 복을 받다니! 이건 정말 하나님이 너무 한 것 아닙니까? 너무 불공평한 게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적인 오해입니다! 법궤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자신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동일한 법궤를 모셨는데 두 집안의 형편이 전혀 달라졌다면, 하나님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 문제인 게 분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바른 신앙생활이 이토록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오래 믿었다고, 오래 봉사했다고 대수가 아닙니다. ‘오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런 말씀을 하셨죠. 눅13: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는가? 그 ‘길이’보다 “신앙생활을 얼마나 잘 했는가?” 그 ‘질’이 중요합니다. 다시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신앙의 연조(年條)/연수(年數)보다 신앙의 태도(態度)/방식(方式)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신앙의 연조를 무시해도 좋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신앙의 연조가 기본적으로 중요하죠. 1년 믿은 사람보다 당연히 5년, 10년 믿은 사람이 낫죠. 요셉이나 사무엘처럼 모태 신앙으로 평생 바른 신앙생활을 하면 가장 좋은 것이죠. 하지만 신앙의 연수가 길다고 무조건 신앙이 좋은 건 아닙니다. 오히려 뒤늦게 믿어도 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일찍 믿었어도 항상 제자리걸음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디 저와 여러분은 오래 믿은 것을 자랑하지 말고 바로 믿는 것을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바른 신앙의 기준   

그러면 바른 신앙의 기준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핵심적인 것 두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① 말씀 :   

바른 신앙의 기준은 무엇보다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사느냐?” 이겁니다. 웃사가 죽임을 당한 게 황당해 보이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3절.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법궤를 어떻게 운반했나요? 수레에 실어서 운반했습니다. 이게 탈입니다. 원래 법궤는 사람이 어깨에 메어 운반하는 게 규칙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수레에, 그것도 좋은 새 수레에 운반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편리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블레셋을 비롯한 이방인들이 우상 신상을 운반할 때 사용하던 방법입니다. 아마 별 생각 없이 그들이 쓰는 방법이 좋아보여서 그냥 따랐던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수레로 운반하다가 그 다음에 어떻게 됐나요? 6절~7절 보시죠. “6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한참 가다가 도중에 길이 고르지 못했는지 수레를 끄는 소가 펄쩍 뜁니다. 법궤가 기우뚱 하면서 땅바닥에 떨어지려고 합니다. 웃사가 당황한 나머지 손으로 붙잡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그를 치셨고, 그는 즉사합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민4:15 보면 이런 규정이 잇습니다. “ ...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법궤는 아무나 운반하는 게 아닙니다. 레위 지파의 고핫 자손만 담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성물인 법궤에 손을 대면 안 됩니다. 촉수 금지! 운반할 때도 조심스럽게 어깨에 메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법궤에 채가 달려 있는 겁니다. 웃사가 이 규정을 어기고 하나님께 불경죄를 범한 것입니다. 안타깝게 다윗도 백성들도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웃사가 죽은 후에도 한참 동안 몰랐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모르고 저지른 게 죄인가요? 무죄인가요? 무죄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죄입니다. 무지도 죄입니다! 예를 들어 교통 신호를 모르고 위반했다고 합시다. 죄인가요? 아닌가요? 죄입니다! 신호등을 못 보고 위반했을 때는 사고가 안 납니까? 알고 위반할 때만 사고 납니까?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있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르고 한 경우 한번만 봐 달라고 말합니다. 인정이 많아서 서로 양해가 됩니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은 절대 봐주지 않습니다. 냉혈 인간들 같지만 그게 맞는 겁니다.

재미 교포들이 다른 문화에 살면서 경험한 것을 빗대어 만든 이야기입니다. 운전하다 잘 모르고 신호를 위반했습니다. 교통순경에게 딱 걸렸습니다. 몰라서 그런 거라고 사정합니다. “Look at me only one time!”(한번만 봐 주세요!) 콩글리쉬입니다. 그러자 미국인 교통순경이 스티커를 떼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No soup!"(국물도 없습니다!) 이게 맞는 겁니다. 모르고 잘못해도 죄입니다. 국물도 없는 겁니다. 

신앙생활 할 때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는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엉뚱합니다. 다윗도 백성들도, 특히 웃사가 그런 실수를 저지른 겁니다. 그들이 얼마나 정성을 다했습니까? 얼마나 열심이었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자기 방식으로 하니까 오히려 화가 된 겁니다. 다윗도 그렇고 훌륭한 신앙 인물들조차 이따금 실수하는 경우가 있는데, 하나님께 묻지 않고 행동부터 옮길 때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해야죠! 그게 바른 신앙입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대로 한 겁니다. 그게 탈이죠! 바른 신앙이 아니라, 무지한 열심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어요! 덮어 놓고 믿으면 안 된다! 열어 놓고 믿어라! 무슨 말입니까? 성경책 덮어놓고 믿으면 곤란합니다. 부지런히 성경 말씀을 듣고, 읽고, 알고 믿어야 합니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신앙은 말씀을 들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계속 들음으로 신앙이 성숙해집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읽지 않으면 공부하지 않으면 10년 교회 다녀도 ‘황’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모르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는 다니는데 세상의 방식으로 세상의 풍조와 유행을 따라갑니다. 그러면 웃사 같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강조합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 40년 동안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습니까? 한 가지 원칙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구름기둥 불기둥을 따라간 겁니다.(민9:15~23) 자기 생각, 자기 경험, 자기 열심, 자기 판단을 다 버리고 겸손히 따라갔습니다. 

이게 바로 신정정치(Theocracy) 곧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신정정치의 기본 원칙은 ‘말씀의 통치’(Logocracy)입니다. 다윗이 신정국가를 이룬다고 하면서 이 원칙을 무시했으니 잘 될 리가 없죠. 하나님이 진노하신 겁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바른 신앙은 말씀 중심의 신앙입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미신 믿듯이, 우상 종교 믿듯이 하지 마십시오! 은사도 중요하고, 기도도 중요하고, 체험도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것은 말씀입니다. 말씀을 무시하고, 말씀에 어긋나면 모든 게 헛것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은 말씀 중심의 바른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② 진심 :  

두 번째 바른 신앙의 기준 ‘진심’입니다. 아비나답의 집안이 70년 동안이나 법궤 모셨지만 건성으로 형식적으로 했습니다. 진심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오벧에돔은 비록 짧은 기간을 모셨지만 진심으로 했습니다. 

웃사가 죽임을 당했을 때 누가 감히 법궤 모시기를 자원했겠습니까? 다윗도 꺼려하던 판국에 말입니다. 한 마디로 당시 법궤는 기피대상이요, 애물단지 취급을 당했습니다. 사실으 복인데 무지해서 그랬던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오벧에돔이 그 일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섬겼습니다. 9절~10절. “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10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보십니다. 사람은 겉모습만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삼상16:7 “ ...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the heart)을 보느니라”

그래서 성경에 진심을 강조하는 구절이 많습니다. 신4:29 “ ...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등등 ... 주님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셨습니까? 마음 속에 진심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마15: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말씀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되, 진심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기 바랍니다. 이게 바른 신앙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3] 바른 신앙의 축복   

오벧에돔은 바른 신앙으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실이 본문 11절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대상13:14 보면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상13:14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역사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1세기 유대의 역사가) 

에 의하면, 오벧에돔은 본래 아주 가난한 사람이었고 합니다. 그런데 석 달만에 온 동네가 부러워하는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게 영적이 법칙이요 축복의 원리입니다. 바른 신앙이 정립되면 영육 간에 복을 받습니다. 요삼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것은 축복의 기원이지만 동시에 원리이기도 합니다. 또 잠22: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잠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이른바 3통(三通)의 원리입니다. “신통(神通) → 인통(人通) → 물통(物通)” 하나님과 잘 통하면(바른 신앙), 사람과 잘 통하게 됩니다. 그리고 물질과 잘 통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통(神通)하면 인통(人通)하고, 인통(人通)하면 물통(物通)하게 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성경을 잘 살펴보면, 오벧에돔 그 본인만 복을 받은 게 아닙니다. 형제들, 아들들, 후손들이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 집안의 사람들은 대대로 법궤를 지키는 문지기직을 맡았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고 영광스런 직분입니다. 대상26:8 “이는 다 오벧에돔의 자손이라 그들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은 다 능력이 있어 그 직무를 잘하는 자이니 오벧에돔에게서 난 자가 육십이 명이며” 다윗 당대에 그의 집안에서 62명의 문지기가 나왔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된 겁니다. 출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어제 밤 기분 좋은 일이 있었죠! 역도의 장미란 선수 이야기입니다. 올림픽 역도에서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면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경기를 마치고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는 모습을 보셨죠! 평소 신앙이 좋은 자매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바쁜 훈련 일정 가운데서도 늘 말씀을 공부하고, 신앙훈련도 받고, 더 나아가 주변 사람들을 신앙으로 인도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바른 신앙생활을 하면서 거둔 승리라 더욱 기쁩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바른 신앙생활의 승리를 거두면 얼마나 통쾌하겠습니까? 

여러분! 이제 말씀이 마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중요한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오래 믿는 것도 중요하고, 교회 열심히 나오는 것도 중요하다 ...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바른 신앙이다! 말씀대로 신앙생활 하고, 진심으로 신앙생활 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면 절대 웃사처럼 되지 않는다, 베레스웃사는 없다! 오벧에돔처럼 된다!” 이겁니다. 부디 이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바른 신앙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남은 생애 승리하는 인생,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인생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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