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몸으로 돌리는 영광 (고전 6:12~20)

  • 잡초 잡초
  • 350
  • 0

첨부 1


몸으로 돌리는 영광 (고전 6:12~20)

 
고린도전서 5~7장은 거의 한 문맥으로 그 사회에 가장 이슈가 되었던 문제를 교인들에게 바울이 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고린도 시대에는 왜 이렇게 성 도덕이 타락하였는가? 타락에 물들지 않은 것이 없을 만큼 그렇게 완전히 타락된 사회가 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가 종교의식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대도시로서 세계인의 출입이 잦은 상업도시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에 사람이 한번 갔다 하면 다 타락하는 것으로 생각하던 도시에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삶의 모든 철학이나 내용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래서 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길게 5~7장에 걸쳐서 이 문제를 계속해서 들고 나오는데 오늘은 우리 몸과 하나님의 영광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에 대해서 초점을 맞춰서 이 문제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 크리스천의 육체와 가치의 의미를 한번 찾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 육체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이렇게 우리가 생각해볼 때 학창 시절에 헤겔 철학의 정반합의 원리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독교에도 굉장히 영향을 많이 끼쳤고 또 그렇게 우리 기독교 역사도 되어진 것을 보게 됩니다. 세상의 다른 역사에서도 이 헤겔 철학의 정반합의 원리는 참 훌륭했다고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어떤 한 원리가 있어서 흐르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부작용이 생깁니다. 반드시 한 원리가 계속해서 가지 않고 부작용이 생깁니다. 그러면 거기서 그 부작용을 해결하기 위한 다른 진리가 하나 나옵니다. 그래서 과거 것에 개혁을 해서 새로운 역사를 찾아가면 그것도 한참 가다가 부작용이 생깁니다. 그러면 그것을 또 개혁하기 위해서 다른 원리가 나옵니다. 그래서 이 정반합의 원리로 이 세상은 가고 있다는 철학의 원리인데, 우리 기독교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우선, 신약 성경 자체가 다 헬라어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구약은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데 헬라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어쩔 수 없이 이 헬라 철학과 함께 신약을 연구하지 않으면 기독교 사상을 잘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헬라 철학의 영향을 어떻게 받았느냐? 헬라 철학에서는 물질은 악이라고 봤습니다. 우리 몸이 지금 여기 성경에서는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는데 헬라 철학에서는 물질은 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몸도 물질이란 말입니다. 

철분이 있고 수분이 있고 당분이 있고 다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 몸이 악이냐? 헬라철학에서는 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안의 헬라 철학 사상이 중세기 때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 악한 우리의 몸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생각해서 나온 답이 뭐냐 하면 금욕주의입니다. 

어쨌든 이 악한 것이 원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이 금욕주의입니다. 그래서 뭐든지 될 수만 있으면 육체에게 즐거움을 주지 않는 방향의 삶은 헬라 철학에 영향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이 영향을 많이 받아서 금욕주의가 꽤 오랫동안 지속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금욕주의는 가다가 고행주의로 더 발전하게 됩니다. 안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우리 몸에 고통을 줌으로 말미암아 고행주의 이것이 가장 훌륭하게 인간이 사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왜? 악이니까요. 악은 고통을 받아라 해서 자기 자신의 몸을 금욕주의 혹은 고행주의로 떨어뜨리는 역사가 한때 우리 기독교 안에도 유행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종교도 개혁! 우리 사회도 대통령 되는 사람마다 항상 들고 나오는 것이 개혁입니다. “내가 이것을 개혁하겠다.” 정반합의 원리로 항상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고행주의로 떨어지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 속죄의 능력도 고행주의 교리에 기초하게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이 왜 일으켰습니까? “고행주의는 아니다.” 라테란 성당의 그 많은 계단을 알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면 그게 얼마나 아픕니까? 여러분, 한번 예배 마치고 여기 계단 5개만 알무릎으로 올라가 보세요. 다른 것 의지하지 않고 무릎 자체로 올라가면 무릎이 다 까지게 되어 있습니다. 라테란 성당도 다섯 계단인지 일곱 계단인지 올라가다가 여행도 못할 것 같아서 그만 두었는데, 마틴 루터 생각하면서 일부러 해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높은 계단을 알무릎으로 올라가는 가면서 무릎이 까지고 피가 줄줄 흐르는, 계단을 오르는 그 고통 하나에 의해서 내 의가 쌓인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중세기 수도사들은 ‘나는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금하고 고행스럽게 살았기 때문에 의가 쌓이고 쌓여서 내 의는 남아돌아간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시내산 중턱에 있는 수도원 보세요. 그곳은 들어가는 문이 없습니다. 그냥 큰 돌멩이로 석조건물을 지었는데 들어가는 문이 없습니다. 그리고 창문이 하나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그 창문을 어떻게 올라가느냐 하면 바깥에서 사다리를 놓고 거기를 올라가서 사다리를 그곳으로 끌어내서 그곳으로 내려가고 그 창문 하나로 들어오는 빛에 의지해서 그 안에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몸을 고행하는 겁니다. 

몸은 악한 것이니 고통을 주어야 한다고 하며 좋아하는 것을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서 고행을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문이 없으니까 나오지도 못해서 나오려면 그 창문으로 기어 올라가서 다시 나와야 됩니다. 그렇게 고난스럽게 일부러 만든 겁니다. 그래서 금욕주의로 떨어졌다가 고행주의로 떨어졌는데 마틴 루터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가 이렇게 고행주의를 통해서 고통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내 의가 되어 그것이 구원의 조건에 이른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뭐가 필요 하느냐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자기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주체가 된다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아무 소용도 없어지는 겁니다. ‘이건 아니다. 기독교의 십자가 진리가 이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 계단을 올라가다가 중간에 걸어 내려왔단 말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이 개신교 탄생을 이루었잖아요? 지금 가톨릭교회조차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한쪽으로 가다가 다시 헤겔 철학과 같이 유턴해서 다시 돌아오고 다시 만나고 이런 일이 기독교 안에도 계속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정말 악인가? 아니면 선인가? 그러면 선이 왜 죄를 짓는가? 이런 어려운 문제가 신학적으로 대두하게 됩니다. 만약 물질이 정말 헬라 철학대로 악이라면 하나님은 악을 창조하신 분이 됩니다.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하나님이 나무도, 채소도, 공중의 새도, 바다의 고기도, 나중에 사람도 물질이란 것은 하나님 때문에 생겨났지 창조자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물질의 주인공이십니다. 또, 예수님 자신도 세상의 육체를 입으셨다는 것은 물질로 세상에 오셨단 말입니다. 물질 속에 예수의 영이 함께 계신 겁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인카네이션(incarnation) 사건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셨단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가 보는 물질에 대한 선악은 도대체 어떤 것이냐? 오늘 바로 이런 문제가 물질된 우리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되는데 이것을 어떻게 하느냐? 물질은 악한 것과 선한 것이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물질이 “이것은 악한 것이니까 건드리지 마라.” “이것은 선한 것이니까 괜찮다.” 물질은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개념이냐? 그 물질이 이용되어지는 과정에 따라서 악해지기도 하고 선해지기도 한다는 겁니다. 

본래부터 물질이 악이라면 하나님은 물질을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 창조하셨잖아요? 물질의 근본은 하나님이시잖아요? 그러므로 악이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아름다운 물질을 악으로 이용하는 세력이 생겼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떤 한 물질을 놓고 “이것은 악한 것이다, 선한 것이다.” 어떤 사람을 놓고 “이 사람은 악인인가, 선인인가?” 이렇게 할 수 없는 겁니다. 

여러분, 바울 선생을 보세요. 바울 선생이 선한 사람입니까, 악한 사람입니까? 잘 모르겠지요? 바울 선생은 2000년 역사에 제일 선한 사람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뭐라고 그럽니까? “내 속에 악이 있도다.” 한 물질 안에, 한 주체 안에 두 가지가 다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가 물질을 보는 하나의 물질관입니다. 

보세요. 여기 칼이 있습니다. 칼이 악입니까, 선입니까? 물질이잖아요? 여러분이 칼을 가지고 수박을 잘라서 나눠먹는다든지 요리를 만든다든지 하면 그때 그 칼은 얼마나 선한 도구입니까? 그러나 강도가 그 칼을 가지고 사람을 죽였을 때는 악한 것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용도에 따라서 물질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합니다. 악하게 사용되면 악이고 선하게 사용되면 선이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몸은 어떠냐? 똑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고민은 바로 “내 속에 이 두 가지가 싸우는 도다.” 이것이 기독교의 물질관입니다. 

여기 지금 포도주가 하나 있습니다. 포도주가 악입니까, 선입니까? 악도 아니고 선도 아니고 악도 되고 선도 됩니다. 이런 말입니다. 이 포도주를 술이라고 볼 때 알코올중독자가 이것을 마실 때는 악이 됩니다. 그러나 성찬 예식에 쓰일 때는 선이 되잖아요?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그렇게 되니까 오늘 우리들은 기독교 윤리학에서 “자아는 아가페 사랑의 주체가 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 그 사랑의 모체가 내 안에 바로 이루어져서 내가 있다는 것은 이 땅에 아가페 사랑의 실천의 주체로서 나 자신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라! 실천할 수 있는 주체가 필요하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육체는 그리스도인에게 고귀한 재산이요 하나의 도구인데 이 육체를 사용하는 자유권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이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어떨 때는 악한 일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선한 일도 하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제가 지역 예배 때 더러 말씀을 드린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인간으로서,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훌륭하게 우리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네 가지 카테고리를 이렇게 정하고 살아가자.” 라고 정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우선 “하나님이 주신 육체를 건강하게 노력하자.” 노력하는 것은 나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건강을 해치는 일을 삼가고 건강의 도움을 주는 것이 선이다. 건강을 해치는 것은 악이 된다.” 여기 오늘 “창기와 더불어 한 몸이 되는 자”라고 나오는데 “그러면 그렇게 신선하고 좋은 몸을 가지고 그렇게 가서 창기와 잠을 자서 에이즈가 걸리고 병이 들어서 죽게 된다면 하나님이 주신 몸을 가지고 그게 도대체 뭐냐?” 이런 이야기가 됩니다. 

오늘은 몸으로 돌리는 영광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우선 하나님이 주신 몸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 노력을 하는 것이 선입니다. 건강을 해치지 않도록 노력을 해서 건강하게 살도록, 그래서 한국 교회가 건강을 위해서 제일 열심히 한 것이 뭡니까? 금주, 금연운동이었습니다. 그것을 했기 때문에 한국 교인들이 건강하게 사는 겁니다. 그렇지 않아 보세요. 

여러분, 담배를 과학적으로 연구한 것을 들어보세요. 담배 한 대만 잘못 피어도 폐암에 걸릴 수 있는 확률이 굉장히 높다는 겁니다. 폐에 니코틴이 달라붙어버리면 해결할 수 없이 폐암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미국에서는 어린아이 낳았을 때 장애가 있으면 첫 번째 산모에게 묻는 말이 “담배 피우셨나요?”입니다. “당신 임신 중에 담배 피우셨나요?” 그 말입니다. 

여러분, 술을 보세요. 술은 다른 음식은 그렇지 않은데 술은 마시자마자 혈관에 직통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술이 취해 버리는 것 아닙니까? 혈관이 알코올로 전부 왔다 갔다 하니까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그러니까 금주, 금연 운동하는 것은 구원의 교리는 아니더라도 한국 교회가 바로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 건강을 위해서 아주 잘한 일이라고 합니다. 아직도 술 못 끊으신 성도님들은 끊으십시오. 

중국은 마약으로 다 망했잖아요? 그런데 기독교가 들어가서 마약을 근절시켰잖아요? “기독교인은 마약하지 말아라. 건강을 해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건강한 노력을 우리가 열심히 해야 되는 겁니다. 조금 귀찮더라도 건강하게 살도록 하십시오. 저도 건강한 목회를 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합니다. “목사님은 어렸을 때 약하셨다더니 어떻게 이렇게 건강하게 되셨습니까?” 노력을 얼마나 많이 하는데요. 새벽기도 마치고 나서 체조하고 팔굽혀펴기하고 운동장 10바퀴 뛰고…. 

그런데 운동하는 방법도 참 여러 가지입니다. 내가 운동하는 안말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나와 내 또래의 남자 이렇게 두 사람이 항상 운동을 하는데 저는 뛰거든요? 운동장 10바퀴를 뛰는데 그분은 운동하는 방법이 다르더라고요. 딱 발을 붙이고 한 시간 동안 발을 한 발자국도 안 떼는 운동을 합니다. 저는 그게 무슨 운동인지 모르겠습니다. 한 발자국도 안 뗍니다. 그러다가 팍 수그렸다가 팍 일어났다가…. 제가 운동장 10바퀴 뛰는 동안 그 사람을 계속 보면서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분도 아주 건강하신 것 같습니다. 아마 요가 같은 것을 하시는 것 같아요. 오늘 아침에도 그분과 둘이서 운동했습니다. 그분은 한 발자국도 안 떼고 저는 계속 뛰고…. 그리고 몸을 해칠 만한 음식은 제가 안 먹잖아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육체를 잘 보존해서 하나님이 오래오래 쓰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대로 가면 난 90세까지 목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육체를 가지도록 우리 모두가 노력을 해야 됩니다. 노력하면 노력하는 대로 되도록 우리 몸이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심리적 평화를 이루라! 마음 비우기 운동입니다. 이것은 육체적 노력보다 더 힘듭니다. 이것은 너무너무 힘들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이 마음 비우기 운동을 하면 효과가 있습니다. 여기는 그런 곳이 없는데 제가 전에 살던 곳은 바닷가란 말입니다. 바닷가에서 제가 오랫동안 목회를 했는데 끝도 없는 바다, 캐나다까지 올라가는 바다가 저희 동네에서부터 연결이 되니까 어느 때는 나가면 달밤에 아무도 없죠? 큰 모래 사장에 명사십리라고 하는데 이것은 명사만리입니다. 그 큰 모래사장에 파도만 밀려오는데 거기 가서 조용히 앉아보세요. 그러면 정신적 통일이 오고 내 마음에 ‘나를 괴롭히는 이 문제들이 뭔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가지고 내가 이렇게 왜 속상하고 이것 때문에 내가 이것을 얻지 못함을 마음 아파하는가?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목사로서 부끄럽다. 그러니 이 넓은 바다를 보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세계,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저 영원한 세계가 내 것이라고 하나님이 약속해주셨는데 내가 이 세상에서 무슨 욕심이 생겨서 이렇게 마음을 들볶이고 그 작은 것 때문에 내가 이렇게 속상하고 밤잠을 안자고 그러는가? 부끄럽다.’ 그렇게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러니까 효과가 있습니다. 

바다를 보면서 ‘아! 겉은 이렇게 평온해도 이 평안한 바다 안에는 지금 수천 종류의 고기들이 맘대로 물결치고 재미나게 살고 있고 놀고 있다. 그래! 목사의 마음은 바다 같이 넓어야지! 넓고 넓은 바다같이! 그래서 목사의 마음 안에서 수천 명의 교인들이 맘대로 뛰어놀아야지! 너는 나쁜 고기니까 집어던지고 그래서야 되겠는가? 그래! 이 품에서 다 놀아라!’ 이렇게 마음을 먹고 마음 비우기 운동을 해도 효과가 있습니다. ‘세상이 잠시 왔다가 가는 건데…. 재벌도 감옥에 가고 대통령도 감옥에 가는데 내가 무슨 욕심이 생겼다고 목사가 무슨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거면 됐지! 나는 처음에 하나님과 약속한 것이 건강해서 설교할 수 있으면 그 두 가지로 내 생애 만족을 삼는다고 약속했지 않는가?’ 이런 마음 비우기 운동! 그러면 몸도 편안해지고 욕심이 하나도 없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성령이 충만해지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여기 이웃관계가 나오는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인간관계에 정상화를 이루는 것이 우리 크리스찬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싸움하고 나가는 사람은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조금만 생각을 달리 하면 훌륭하고 행복하게 얼마든지 교회 생활도 할 수 있고 사회생활도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마음 비우기를 안 해서 그런 겁니다. 기도를 하고 마음 비우기를 하면 심리적 평화도 오고 육체도 건강한데…. 

마지막으로 결국 인간은 어디로 가느냐? 영적인 존재이다. 영적으로 충만 하라! 그래서 이 네 가지 방향이 우리 크리스찬들이 몸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향입니다. 이 방향만 잘 가면 행복합니다. 다소 성취 못하였다 하여도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위해서 노력하고 그러는 것인데 오늘 여기 성경말씀에 “너희 몸은 너희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값을 지불하고 사셨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다. 그러므로 내 속에 그리스도가 계시므로 그리스도가 생각한 것과 같이 생각하고 그가 살았던 방향대로 내가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찬의 삶이다.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관계가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위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제일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이렇게 많이 드리는 겁니다. 예배 행위가 없으면 인간은 다 타락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정한 공식 예배는 빠지지 말고 항상 다니면 우선 신앙은 보존이 됩니다. 그러므로 일생 우리는 예배드리는 겁니다. 

결혼식 할 때부터 예배를 드리잖아요? 아기 낳으면 그 아기 위해서 예배드립니다. 돌잔치 예배드립니다. 그러면 뱃속에서부터 예배 믿고 나와서 계속 예배드리는 겁니다. 그러면 영아부에서부터 유아부, 유치부, 유년부, 초등부, 소년부, 중등부, 고등부, 대학부 계속 예배드리다가 그 다음에 청년회에서 예배드리다가 장가들어서 장년 예배드리고 마지막에는 임종예배로 끝이 납니다. 예배로 시작해서 예배로 끝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정해주셨습니다. 

구약에는 그래서 제사가 많습니다. “이것을 안 하면 안 된다. 하나님을 생각 안한다. 그러니까 예배는 모이기를 힘쓰고 철저하게 예배 참석하라.”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새벽부터 날마다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정립을 예배로 합니다. 그 다음에 이웃은 뭡니까? “사랑으로 연결하라.”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물질이 있잖아요? 이것은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사용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라.” 그리고 “나 자신에게는 진실 하라.” 이래서 네 가지 방향을 우리가 가지고 사는데 가끔가다 이 순서가 바뀔 때 죄가 되는 겁니다. 

어떻게 바뀌느냐? 물질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사용해버리면 안됩니다. 이 순서가 바뀌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예배의 대상입니다. 물질은 내 맘대로 선하게 사용하면 그만입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몸을 가지고 건강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심리적 평화를 이루고, 영적으로 충만하고, 이웃 관계는 정상적으로 살고, 그래서 이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겁니다. 죄의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네 가지 목표를 향해서 우리가 지금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1968년에 폴 틸릭이 죽으면서 미국 사회에 대해서 네 가지의 경고를 했습니다. “미국은 앞으로 로마와 같이 멸망할 것이다. 왜 그러느냐 하면 사람들의 생각이 모두 변해져서 미국이 세계를 주도할 만큼의 군사력도 가지고 있고 물질도 온 세상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도 더 많이 가지고 있고 안 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망한다. 로마가 그랬다.” 왜 그러느냐? 미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것을 그 사람은 네 가지로 분석을 했습니다. “하나는 에고이즘(egoism)이다. 이기주의다. 모두가 자기만 아는 사람이 되어간다. 

미국이 본래 청교도의 국가인데 몇 백 년 만에 이렇게 변하여 지금은 모두 다 이기주의가 되어서 자기만 알지 남을 생각하지 않는 그런 나라가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복을 못 받는다. 하나님은 더 이상 미국을 축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 내리막길을 갈 것이다. 에고이즘을 해결하라.” 

그 다음에는 물질주의입니다. “돈으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려고 하는 그 정신상태가 이미 틀렸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미국 같은 곳을 보세요. 청부살인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내가 돈 1000달러 줄 테니까 저 사람 죽일래?” 하면 “오케이!” 다 죽여 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살인사건이 그렇게 많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회를 축복하시겠느냐? 돈이면 뭐든지 하는 그런 사회는 틀렸다.” 

그 다음에는 휴머니즘입니다. 미국 대학의 99.8퍼센트가 휴머니즘입니다.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고 인간이 좋다고 하면 뭐든지 하려는 지나친 휴머니즘 사상은 미국 사회를 병들게 한다.” 그렇게 경고했고 네 번째는 향락주의입니다. “인간이 경건하게 살 수 있는 그런 법 제도를 만들어야지 이렇게 모든지 즐거운 대로 마음대로 하라고 하면 그 사회가 얼마나 가겠는가? 로마와 같이 망한다. 로마가 딱 그랬다.” 맞는 말이잖아요? 

그러니까 오늘 성경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신 최대의 선물이 뭐냐 하면 우리 몸이란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가? 평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사역자로 내가 건강을 유지하면서 심리적인 평화를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게 내 몸과 마음을 항상 사용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하나님이 열매 맺는 가지는 깨끗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건강하게 도와주시고 사역에 효과도 많이 나타나게 해주십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겁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누구나 다 받은 최대 선물은 우리 자체입니다. 한 의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경쟁 사회에서 우수한가?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임신이 될 때 그 많은 정자들이 서로 투쟁을 해서 마지막에 하나가 남아서 성공한 것이 나란 말입니다. 그러면 투쟁을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했다는 겁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생명체 가운데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그 모든 것을 다 없애버리고 마지막에 나를 하나 선택하신 것이 나의 출생이다.”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신 겁니까? “내가 하나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은 그만한 경쟁을 뚫고 나온 하나의 승리자로 하나님이 축복하신 결과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큰 축복을 받고 세상에서 사는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우리는 우리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서 소요리 문답이라고 하는 질문서에 항상 인간으로서의 최대의 의무가 무엇이냐고 하는 질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려는 노력이 인간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다.” 이렇게 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들이 한때는 중세기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우리 몸도 물질이니까 악하다.” 그랬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 몸을 악하게 사용할 때 악이 되고 선하게 사용할 때 선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선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을 키우자는 것입니다. 물질은 선악, 흑백 논리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이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악으로 사용할 때는 악한 일이 됩니다. 총으로 사람을 쏴 죽이면 그것은 살인강도 아닙니까? 그러나 올림픽에 나가서 사격을 잘하면 금메달로 조국에 영광입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여러분 몸에서부터 여러분의 손에 들려진 모든 물질이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훌륭하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그 주체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나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이 있는 겁니다. 우리 모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고린도교회에 주신 말씀을 통해서 현대 생활을 저희들이 조명했습니다. 여기 있는 모든 하나님의 성도들이 건강하게 도와주시고 마음에 평화를 주시고 인간관계는 사랑으로, 하나님께는 영적으로 충만하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 몸을 비롯한 모든 물질을 가장 선한데 사용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