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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 그 다음(1) : 거룩한 성결된 삶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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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그 다음은(1) (롬 12:1~2)


옛날에 출신교회 중고등부 시절 때 수련회를 떠나면 반드시 만들었던 책자가 있습니다. 
소위 'handbook' 이라는 수련회의 모든 일정을 소개하는 소책자였습니다.
그 책에는 일정표를 비롯해서 조 편성에 대한 내용, 밥줄, 행동강령 등의 내용들이 줄줄이 들어 있었습니다.

교육부의 사역을 오래 전에 손을 놓고 이제는 부교역자들에게 맡겨 놓았기 때문에 요즘에는 어떻게 그런 책자들이 만들어지고 있는지에 대하여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옛날에 활동할 때 기억에 남는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수련회에 참석하는 멤버들이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소개한 것인데 ‘몽돌이’와 ‘몽순이’였습니다.

‘몽돌이’와 ‘몽순이’가 무엇인가 하면 수련회에 가면 뭔가 은혜를 받는 것 같은데 교회만 돌아오면 그냥 전혀 변화가 없는 학생들을 빗대어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수련회를 통하여 읏싸읏싸했던 그 분위기에서 한 동안 벗어나지 못하는 이른바 수련회를 통해서 일시적으로 은혜를 받은 아이들을 말하는 그들만의 언어였습니다.

거의 30여 년 전에 유행하는 이러한 단어가 꼭 수련회가 아니더라도 교회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명 기도원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은혜가 없다고 단정하고 일정 기간 동안 기도원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소위 성령파라고 하는 기도원 원장들에게 마약주사를 맞고 나옵니다.
목회의 여정 속에서 정말로 많이 보았던 일들이 있습니다.
기도원에서 마약주사를 맞고 나오는 부류들은 주기가 약 일주일이고 길면 한 달 정도가 됩니다.
교회 안에서 약발이 떨어지면 영락없이 또 주사를 맞으러 기도원으로 들어갑니다.
목회의 일선에 있는 현직목회자로서 이 부분은 아주 민감한 부분이기에 참 많이 목격되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경험하면서 얻는 소회가 하나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과연 저들은 과연 구원을 받은 자들일까? 의 질문입니다.

과연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성자 예수님께서 실천하셨고, 성령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구원의 결과가 이렇게 싸구려로 둔갑하여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극단적인 신비주의의 방향성으로 흘러가는 그런 종류의 결과만을 가지고 오는 것일까?

구원을 받은 자들의 모습은 오직 감정적으로 느껴지는 눈에 보이는 것들인가?
구원을 받은 자들의 이후의 모습은 오직 감각적인 것들인가? 
말할 것도 없이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부터 살펴보는 로마서 12장의 강해를 통해 저는 구원 받은 자들의 구원 그 다음의 내용을 집중적으로 살펴봄으로 이 부분을 다루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 로마서 12장을 시작하는 첫 번째의 단어에 주목하십시다.

‘그러므로’입니다.
이 단어는 원어성경에 보면 ‘oun’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운’ 이라는 헬라어 접속사는 인과관계 접속사입니다.
이 말은 ‘운’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앞에서 말한 어떤 원인이 있기 때문에 그 결과가 이렇게 나타나고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사진을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크로스웨이 1권의 마지막과의 그림인 30Ⓐ 의 그림입니다.

구약에는 죄 사함을 받는 방법이 바로 이런 방법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죄를 범하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내 죄를 위해서 대신 피를 흘려 죽어야 하는 제물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강림하여 성령을 받은 교회 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피 흘리심으로 인해 내가 죽어야 할 삯 대신에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섬기시는 종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도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의 그림입니다. 

로마서 12장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본문 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는 지난 42번의 로마서 강해를 통하여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1장-11장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로마서를 살펴보면서 얻는 은혜입니다.
우리 주님의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감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1-11장의 은혜를 소개하자마자 바울은 본문 12:1절의 시작을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우리들이 은혜로 구원을 받았음으로 당연히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로마서 12장은 ‘구원 그 다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구원의 감격을 누린 그 다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합니까?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점이 본문 1절에서 아주 강하게 바울에 의하여 역설이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바울은 로마의 있는 그리스도인들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바울의 관점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산 제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약성서 레위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에 대하여 살펴 본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은 제일 중요한 것이 흠이나 티가 없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순전한 제물이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5대 제사 중에 피 없는 제사인 소제를 제외하고 나머지 4가지의 제사법에 동일하게 나오는 문구가 있습니다.

‘흠이 없는’
레 1:3절입니다.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레 3:1절입니다.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제물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레 4:3절입니다.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 그가 범한 죄로 말미암아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레 5:15절이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부지중에 범죄하였으면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네가 지정한 가치를 따라 성소의 세겔로 몇 세겔 은에 상당한 흠 없는 숫양을 양 떼 중에서 끌어다가 속건제로 드려서”

하나님은 드려지는 제물의 엄격한 특성을 ‘흠이 없는’이라는 단서를 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드려지는 제물이 구별되어야 함을 특별히 강조했습니다.

구약의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말라기 시대는 예언이 선포될 당시의 이스라엘의 상황이 암담한 현실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바사의 지배 하에서 식민지 민족으로 겪어야 하는 설움 등을 당해야 했으며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을 했을 때 그들의 땅은 폐허 그 자체였습니다. 

참담한 현실 속에서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독려와 스룹바벨, 에스라의 진두지휘 아래 사마리아 백성들의 방해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데 성공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로 돌아온 후 실로 16년 만에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전을 완성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성전은 완공되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식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선지자가 그 옛날 예언했던 포로에서 해방된 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언약이 성취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이스라엘은 비참한 상태 그대로였고 영광스런 주의 약속은 깜깜 무소식이고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한 회의와 무관심이 날마다 커져갔고 결국 백성들은 물론이고 제사장들마저도 영적인 제사에 소홀하기 시작했으며 성스러운 주의 율례를 어기기 시작하고 아무 재물이나 하나님께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덕적, 윤리적으로 타락하여 이방 여인들과 잡혼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순결을 상실하기까지에 이릅니다.
바로 이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적 갱신과 하나님께로 회개를 강력하게 선포된 내용이 바로 말라기서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 예언자는 당시의 영적으로 무너진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상태를 이렇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말 1:13-14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흠이 없는 제물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 흠이 있는 것을 흠이 없는 것으로 속여 드렸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흠이 있는 것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훔친 물건, 저는 것, 병든 것이었습니다.
물론 문자적으로 말라기 시대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능멸했습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업신여겼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백성들의 능멸함에 대하여 분노하셨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구별됨을 살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이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아주 중대한 영적인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구별된 삶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 구원을 받은 저와 여러분에게는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까?

말 할 것도 없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별의 삶을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별이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거룩한 구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거룩성이 무엇입니까?
권위적인 것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로마서 12장에서 말하는 거룩한 구별은 권위적인 것이 아니라 분명한 단서가 필요한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구원 그 이후에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별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도전을 조금은 역설적으로 과격하게 표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별된 삶을 열매 맺지 못하는 자들은 아무리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입으로 시인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사를 묵상할 때 집중하는 은혜가 이런 것들입니다.
*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셔서 벳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시고 12광주리를 남기시는 은혜를 베푸셨다. 

* 이 기적의 물꼬는 어린아이가 갖고 있었던 오병이어였다.
* 안드레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 기적의 바탕을 제공한 주인공이 되었다.

물론입니다.
그런데 사실 오병이어의 기적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도전은 이 기사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주님은 벳세다의 영웅이 되셨습니다.
이 일 후에 벳세다의 사람들은 주님을 곧바로 자신들의 임금으로 옹립하려는 시도를 보입니다.

구약에서 말했던 메시아이신 것을 확신했던 벳세다의 민초들은 주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습니다.
주님에게는 인기몰이의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 인기몰이를 토대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는 것은 아마도 손쉬운 일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요 6:15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이 구절에서 눈물짓게 하는 감동은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입니다.
주님께서 세속적인 인기몰이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세속적인 인기몰이에 의도적으로 집중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시’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충분히 이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라고 번역된 ‘ pavlin’은 진동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상태를 말하는 부사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세력들의 집요하고 반복적인 요청을 받았음을 암시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더 높은 골짜기로 들어가셨다고 영어성경 New Living Translation 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so he went higher into the hills alone."

왜 주님께서 더 깊고 높은 골짜기로 들어가셨습니까?
왜 주님은 왕으로 추대되는 것을 거절하셨습니까?

주석가 버렛(C.K Barrett)은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일련의 시도는 당시의 쿠데타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일이었고 정치적인 메시아로 옹립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주님이 거절한 것은 그 분의 사역 자체가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아이셨기 때문에 세속적인 부분과의 구별함을 갖기 위해서였다.”

저 역시 버렛의 국제성서 주석에 동의하고 싶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사람들의 관심과는 전혀 별개의 삶을 사신 것은 세상을 정죄시하여 세상과 완전히 유리되어 산신령처럼 산에서 도를 닦는 그런 종류의 도피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공생애를 사시면서 철저하게 구별하려고 했던 것은 세속적인 욕심이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세우거나 만드는 세속적인 욕심과 이기주의와 구별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사셨던 주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가는 구원 받은 자들입니다.
아니, 구원을 받은 자가 세속적인 것과 성별된 삶을 사는 것은 너무나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마땅히 우리들이 행하여야 하는 삶입니다.

저는 오늘부터 로마서 12장 강해를 시작했습니다.
본문 1절의 후반절에 아주 주목해야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에서 ‘영적인 예배니라’라고 번역한 ‘영적’이라는 헬라어 단어‘logiko"’는 ‘영적’이라는 번역보다 오히려 ‘합당한',‘마땅한’이라는 의미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구원을 받은 백성들은 구원 그 다음에 제일 먼저 열매를 맺어야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합당하고 마땅한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합당한 예배자가 되는 것은 우리가 지금 드리는 이런 신령과 진정의 예배도 물론이지만 우리들의 삶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렇습니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별된 자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받은 자의 그 다음의 결과요 증거이기도 합니다.

지난주에 우리 교회의 집사님과 교제를 하는 어간에 아주 소중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목회를 하는 목회자로서 한 가지 감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의료직에 근무하는 현직의사들 중에 많은 분들 가운데 신실한 주의 백성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의료선교회를 구성할 정도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그 집사님의 이야기 중에 우리 지역에서 그렇게 신실하게 주의 사역을 감당하는 한 의료인이 개업한 병원을 정리하고 중국으로 사역지를 옮겨 의료선교로 자신의 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한 형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것처럼 한국에서 의사는 가장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직업군 중의 하나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부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직종입니다.
그래서 대학에서 가장 많이 선호하는 학과가 의학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형제가 이 땅에서의 열려져 있는 출세와 부귀의 길을 과감하게 버리고 중국의 심령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고 달려가겠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마음으로 그의 앞길을 축복했습니다.
진해에서 목회를 할 때 섬기던 노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이제는 자식들의 봉양을 받으며 편히 쉬실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중앙시장에서 좌판을 깔고 산에서 당신이 직접 캐낸 칡과 정구지(부추)를 정성스럽게 다듬어서 파는 그런 집사님이셨습니다.
경제적으로 그렇게 풍족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이 노집사님이 한 번은 제 서재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봉투를 하나 내미셨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그 안에는 100만원이라는 돈이 들어 있었습니다.

노집사님이 이렇게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큰돈은 아니지만 교회 식구 중에 병원비 때문에 많이 힘들어 하는 분이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익명으로 그 분에게 전달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자세히는 알지는 못하지만 당시의 그 노집사님이 전달한 100만원은 그 분의 좌판 장사 두 달 치의 수입에 해당되는 그 분에게는 정말로 큰 물질이었습니다.
그 물질은 당사자에게 전달하면서 얼마나 큰 감동의 눈물로 전달했는지 모릅니다.

2주 전 특새를 은혜 중에 마쳤습니다.
역전 앞에서 거리를 청소하는 날 역전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택시 운전기사들이 청소 사역을 하는 권사님과 교제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들이 말 한 것을 전언해 주었습니다.
“자식을 나면 교회에 보내야 돼 그래도 교회는 좋은 일을 많이 하거든”
  

결론)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구원을 받으신 교우 여러분!
이제 구원 그 다음의 나는 무엇을 하고 있으며 해야 합니까?

롬 12:1절을 가슴에 새기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심으로 예배하는 진정한 구원 받은 자로서의 구원 그 다음의 사역을 감당하는 우리 교회의 지체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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