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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힘을 주리라 (사 40: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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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힘을 주리라 (사 40:27~31)


하나님이 관여하신 모든 곳에는 놀라움과 신비로 가득합니다.  자연세계가 신비롭고, 우주와 그리고 인체가 신비롭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여 기록한 성경도 신비, 그 자체입니다.  성경을 대할 때마다 성경이 가진 독특성, 다양성, 통일성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성경이 귀하고 신비한 말씀이지만 그 가운데 이사야서가 귀한 성경입니다.  

이사야서의 신비는 이것이 성경을 정확하게 축소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66권인 것처럼 이사야도 66장입니다.  물론 장절의 구분은 성경이 기록한 이후시대에 만들어졌지만 사람이 의도적으로 맞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66권의 성경이 구약 39권, 신약 27권으로 나누어진 것처럼 이사야도 전반부 39장과 후반부 27장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구약의 주제가 하나님의 공의인 것처럼 이사야의 전반부도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가 주제입니다.  신약의 주제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처럼 이사야의 후반부도 하나님의 사랑, 은혜, 위로가 주제입니다.  성경이 창조로 시작하여 타락, 그리고 회복과 천국으로 끝을 맺는 것처럼, 이사야도 타락으로 시작하여 장래 메시야를 통한 궁극적인 회복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너무도 신비롭지 않습니까?  이처럼 이사야는 성경의 축소판으로서 은혜와 도전과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사야의 후반부가 시작되는 40장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과 은혜를 선포하는 말씀으로 문을 엽니다. 여기에서 강조하는 말씀은 한마디로 새 힘을 주리라, 새 힘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힘을 얻으면 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힘을 받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힘들고 지친 인생길에서 하나님은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자에게 새 힘을 주신다고 약속할까요?  본문은 거기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과연 어떤 자에게 주실까요?


첫째는 피곤한 자입니다. 

29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 힘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피곤한 인생에게 힘을 주시려면 하나님은 피곤하지 말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2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피곤치 않으십니다.  곤비치도 않으십니다.  그래서 무한한 힘과 능력으로 피곤한 자, 곤고한 인생에게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새로운 힘을 얻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요즘은 정말 지치고 피곤한 때를 보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지치고 피곤하게 하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사는 게 많이 힘든 때입니다. 나라의 경제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도 세계경제의 어려움과 함께 좀처럼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정치는 이념공방으로 첨예화된 대립각을 세우면서 골이 깊어져 갑니다.  보수가 무엇이고, 진보가 무엇입니까?  아니 보수면 어떻고, 진보면 또 어떻습니까? 서로를 존중히 여기고, 나보다 나라와 대의를 먼저 생각하는 한발 양보하는 마음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는 게 이기는 걸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안타깝고, 피곤함을 느낍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더욱 힘들게 하는 때입니다.

게다가 요즘 날씨가 아이들 말로 장난이 아닙니다. 이런 더위는 근래에 없었습니다.  저는 비교적 더위를 잘 타지 않는 체질입니다. 그래서 웬만한 더위도 잘 견딥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더위를 느끼면 정말 무더운 날씨입니다.  날씨가 무더우니까 사람이 쉽게 지칩니다.  입맛도 없고, 잠도 안 오고, 맥이 풀어지고, 나른해 집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 삶에 염려와 상처와 아픔이 그치지 않습니다.  이런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힘이 아니겠습니까?  힘을 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마음과 영혼이 지배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몸이 건강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몸이 지치고 피곤해도 마음이 편하면 어떤 피곤도 이깁니다.  우리 마음과 영혼은 하나님이 만져주지 않으면 안 되는 영역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다스려서 평안케 하고, 힘을 주시면 아무리 곤고한 육체도 힘을 얻어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 영혼에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복음성가 가운데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네, 일어나 걸으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으라 내 너를 도우리’  지치고 곤하여 주저앉고 싶고, 피곤한 우리 영혼에 힘을 주는 찬송입니다. 또 우리가 즐겨 부르는 노래가운데 이런 노래도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임하여서 나의 영혼이 힘을 얻었네, 오 나의 영혼아 빛을 발하라, 오 나의 영혼아 힘을 내어라”  주님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임하면 분명 우리가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지치고 힘든 우리 마음과 영혼을 향해 ‘오 나의 영혼아 힘을 내어라’ 하고 외치면서, 주님이 주시는 큰 힘과 능력으로 다시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무능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도 힘을 주지만, 무능한 자에게 또한 능력과 힘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진단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마디로 무능한 자요, 무능한 상태였습니다.  과연 그들의 무능이 무엇일까요?  이사야가 지적한 그들의 무능은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것이 무능한 것으로 진단합니다. 이사야의 전반부에서 끊임없이 반복하여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그들의 죄요, 악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원하는 참되고 바른 길을 걸어야 하는데 그 길을 가지 못합니다.  

개인은 물론이고, 나라가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은 없어지고 온 땅을 이방신으로 가득 세웠습니다.  윤리도 도덕도 무너지고, 양심과 상식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은 질투하기까지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이젠 하나님이 진노하고 심판을 선포합니다.  결국 그들의 죄로 나라는 망하고 백성은 흩어집니다.  

그런 지경까지 왔는데도 여전히 깨닫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무능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른 것에 행동할 의지가 약합니다.  마음에는 정함이 없고, 갈대와 같이 몹시 흔들립니다.  두 마음을 품고, 두 길을 갑니다.  옳다고 판단한 것에 대한 강력한 행동이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말씀이 선포된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정말 무능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많이 닮은 바울의 고민이기도 했습니다.  바울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시편 14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인간이 바로 이런 존재입니다.  이렇게 무능한 자입니다.  옳은 것을 알지만 갈 힘이 없습니다.  바른 것을 알지만 너무도 의지가 약합니다.  분명 선이 무엇인지를 알지만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런 무능한 자에게 힘을 주겠다고 말씀합니다.  인간이 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관여하시고, 주도하여 이끌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면모를 다시 갖추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나의 열정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열정으로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생각해도 이스라엘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바울의 고민이 바로 지금 나의 고민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지만 여전히 적은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의지가 있지만 지속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고민이 있지만 죄악의 자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괴로워하고 탄식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힘입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와 열정입니다.  내 의지로 살면 실패하고, 넘어질 수밖에 없지만, 내가 아니라 나를 잡고 계신 하나님,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주도하시고 이끌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무능한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다시 강력한 의지로 주님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하고, 성령에 이끌려야 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날마다 성령 충만으로 내 힘이 아닌 주님의 힘으로 선을 행하고, 바르고 참된 길로 나아가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입니다. 

31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달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새 힘을 주신다고 선포합니다.  그래서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아서 달려도 걸어도 곤비치 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앙망한다는 말은 어떤 뜻일까요?  이 말은 바라본다, 의지한다, 믿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배경과 본문의 정황으로 보면 이 말의 실질적인 뜻은 ‘소망한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를 소망으로 삼는 자는 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에서도 ‘여호와를 소망으로 삼는 자’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런 자에게 새 힘을 주신다고 선포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합니다.  예루살렘은 파괴되고, 성전은 무너지고, 백성은 포로로 끌려갑니다.  이젠 살 희망과 용기가 나지 않는 상황입니다. 바로 그런 때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소망으로 불어넣으십니다.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 같지만 넘어지지 않고, 망한 것 같지만 아주 망하지 않고,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언젠가 하나님의 회복이 임하고, 지금은 절망과 고통이지만 다시 일으켜 세우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오면 모든 절망에서, 고통에서, 아픔과 괴로움에서, 실패와 좌절에서 다시 극복되어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근심을 대신하여 그들로 하여금 의의나무 곧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아주 넘어지지 않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떠한 경우에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말고 주를 바라보고, 기다리고 소망하면서 지금의 난국과 어려움을 잘 극복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는 자에게 끊임없이 이런 소망에 대해 강조합니다.  로마서 15장 1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소망을 주시고, 넘치도록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자는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 19절에서는 우리의 소망이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다고 강조합니다.  우리가 가진 가장 큰 힘은 바로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으면 여지없이 우리는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으면 살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기에 지금 내가 살고 있고, 소망이 있기에 미래와 영원한 세계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결국 소망이 우리를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살아 있는 것이 사는 게 아니라 절망하는 순간 우리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디도서 2장 13절에 보면 소망을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소망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결국 인생은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요, 삶입니다.  기다리지 못하면 믿음이 아니요, 믿음을 가진 자는 기다리는 자입니다.  


이제 광복절을 맞이합니다.  이 민족위에 임했던 해방의 기쁨도 바로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임한 축복입니다.  그 가운데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믿음은 한마디로 기다리는 믿음이요, 소망의 믿음입니다.  그들은 소망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으로 해방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기도와 소원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북경올림픽에서 우리 한국에 첫 메달을 안겨준 유도선수 최민호는 금메달이 확정된 순간에 매트에서 엉엉 울었습니다.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울려펴질 때 그는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는 그를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의 눈물이 무슨 의미가 있는 압니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절망과 아픔의 순간이 지나간 뒤 흐르는 감격의 눈물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다가 얻은 큰 수확입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말합니다. 환란 중에도 연단된 인격으로 소망이 솟아나고, 결국 소망이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극복케 하는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혹이라도 지금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까?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까?  말할 수 없는 고통가운데 힘들어하십니까?  어찌할 바를 몰라 탄식하며 울부짖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에게 약속대로 새 힘을 주실 것이고, 그 힘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 무능한 자에게, 그리고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분명 새 힘을 주십니다. 우리 모두 이 말씀을 마음 깊은 곳에 새기고 이번 한 주간도 힘 있게 살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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