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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상치 못한 날에 (눅 12: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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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날에 (눅 12:41~48)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이 비유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또는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누가 신실하고 슬기로운 청지기겠느냐? 주인이 그에게 자기 종들을 맡기고, 제 때에 양식을 내주라고 시키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고 있으면, 그 종은 복이 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그러나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여 있으면, 그가 예상하지 않은 날, 그가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주인이 와서, 그 종을 몹시 때리고, 신실하지 않은 자들이 받을 벌을 내릴 것이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도 않고, 그 뜻대로 행하지도 않은 종은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알지 못하고 매 맞을 일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많이 맡긴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한다.”]

• 위임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는 사람의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역도의 이배영 선수가 근육경련으로 쓰러지면서도 바벨을 잡은 손을 놓지 않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찡했습니다. 며칠 전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새벽에 우의를 입은 채 거리를 쓸고 있는 환경미화원을 보면서 잔잔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일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은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담아 일하는 이들은 일상적인 일들에 신성한 광휘를 부여합니다. 고진하 시인은 장독대의 항아리들을 닦고 또 닦으시는 팔순의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어제 말갛게 닦아놓은 항아리들을
어머니는 오늘도
닦고 또 닦으신다
지상의 어느 성소인들
저보다 깨끗할까
맑은 물이 뚝뚝 흐르는 행주를 쥔
주름투성이 손을
항아리에 얹고
세례를 베풀듯, 어머니는
어머니의 성소를 닦고 또 닦으신다
(<어머니의 聖所> 부분)

그 광경이 절로 그려지시지요? 10여 년 전에 읽은 이 시가 내 뇌리에 박힌 것은 어쩌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분주한 눈으로 보면 팔순 노인의 행주질은 부질없는 일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의 눈에 비친 어머니의 행주질은 마음을 닦는 수행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어머니의 장독대는 성소가 되는 겁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마음 닦음의 기회로 삼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초대 교회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던 신자들은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자 마음의 긴장이 많이 풀려 있었습니다. 누가는 바로 앞부분에서 주인이 언제 돌아오든지 간에 깨어서 맞이하는 종의 행복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그런 경고가 열두 제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인지, 다른 제자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인지를 묻습니다. 주님은 그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을 주는 대신, 제자들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신실하고 슬기로운 청지기겠느냐? 주인이 그에게 자기 종들을 맡기고, 제 때에 양식을 내주라고 시키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42)

질문 속에는 이미 답이 있습니다. 이 질문에 담긴 속뜻은 ‘너희는 청지기’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청지기에게 자기의 재산뿐만 아니라 자기 종들의 관리까지도 위임한 것으로 볼 때, 청지기는 대단히 신임받는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믿음직한 심부름꾼은 그를 보낸 주인에게는 무더운 추수 때의 시원한 냉수와 같아서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잠25:13)는 말 그대로, 그는 주인의 腹心이었을 겁니다. 그의 성실함을 인정한 주인은 그에게 자기 권한을 다 위임해 준 후에 한 가지를 당부합니다. 종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는 양식을 ‘영의 양식’으로 해석합니다. 즉 이 말은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쳐야 할 지도자들의 책임을 일깨우는 말이라는 겁니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양식’이 무엇을 의미하든 이 본문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야말로 위임받은 이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 주인의 부재

문제는 주인의 부재였습니다. 주인이 곁에 있을 때에 청지기는 더할 나위 없이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눈 앞에서 주인이 사라지자 그는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되었다기보다는 숨겨져 있던 그의 본성이 드러났다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일찍이 작가 윤흥길은 <완장>이라는 소설을 통해 인간의 권력 의지를 드러낸 바 있습니다. 동네 건달인 종술은 양어장 관리를 맡아달라는 최사장의 말에 시큰둥하지만 감시원이라는 완장을 채워준다는 말에 솔깃해 그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노란 바탕에 파란 글씨로 새겨진 ‘감시원’ 완장을 두른 종술은 권력의 단맛에 빠져 도시에서 온 남녀들에게 기합을 주기도 하고, 동창생들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읍내에 나갈 때도 그는 그 완장을 두르고 거리를 활보합니다. 결국 그는 권력이 얼마나 허무하게 스러지는 것인지를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이 소설이 나온 것이 제5공화국이 시작되던 80년대 초반이니까 작가가 <완장>을 통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비유에 나오는 청지기도 ‘완장’의 재미에 빠진 것 같습니다. 그는 주인이 올 날이 멀었다고 생각하면서 폭군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남녀 종들을 때리고, 먹고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살아갑니다. 狐假虎威한다고 말하지요? 여우가 호랑이의 권세를 빌어 위세를 부리는 이들을 보면 안쓰럽기조차 합니다. 권력은 청맹과니와 같아서 자신이 돌보고 섬기기 위해 권력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잊습니다. 종이면서도 자신을 주인이라고 착각합니다. 권력의 맛은 들큼해서 한번 맛을 들이면 좀처럼 끊어버리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일단 권력을 손에 잡으면 그것을 자기의 유익과 탐욕, 그리고 야망을 실현하는 데 사용합니다. 국회의원들이 선거에서 패하여 일반인으로 돌아가면 한동안 권력 금단현상에 시달린다고 하더군요. 권력은 그만큼 달콤한 유혹입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을 멀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거든 높은 자리에 앉지 말고 맨 끝자리에 앉으라(눅14:10)고 하셨고, 제자들에게는 누구 위에 군림하거나 은인으로 행세하지 말라면서 “너희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하고, 또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눅22:26)고 하셨습니다. 

신학자인 앨버트 놀런(Albert Nolan)은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라는 책에서 예수의 권위와 바리새인의 권위의 차이를 인상적인 말로 드러낸 바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은 권위를 진리로 삼고, 예수님은 진리를 권위로 삼는다고 합니다. 자기 의에 사로잡힌 바리새인들은 늘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남들을 평가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자기를 텅 비우고, 늘 아버지의 뜻에 순응하며 살아갑니다. 참다운 카리스마는 여기서 나타납니다. 지위가 높아지면 우리가 전에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지위가 높아져도 우리가 알던 이전의 그 사람과 다르지 않은 사람을 보면 마음이 참 흐뭇합니다.


• 뜻밖의 시간에

비유에 나오는 청지기는 몇 가지 측면에서 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첫째,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들을 어떻게 감당하느냐가 곧 자신의 운명과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청지기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광경을 보았더라면 주인은 더 큰 일을 그에게 맡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맡겨진 일은 소홀히 했다면 주인으로부터 꾸지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일을 맡겨보면 성실하게 그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은 대충대충 하면서 자기에게 돌아올 몫만을 계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한눈이나 팔고, 먹을 거나 찾고, 불퉁거리기나 하는 사람들은 당장에는 이익을 볼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는 바보입니다. 누구도 그 사람과 다시는 일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이 흙으로 빚으신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처럼, 자기가 하는 일에 혼을 불어넣는 사람들을 보면 아름답습니다. 

청지기의 또 다른 어리석음은 주인이 언젠가는 돌아오겠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권세를 누리는 시간의 달콤함에 취하여, 스스로 만든 마음의 함정에 빠져버렸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가리켜 “죽음에 이르는 존재”(Sein-zum-Tode)라 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은 죽음이 자기 실존의 한계임을 자각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간해서는 죽음을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음으로 생각합니다. ‘나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이 아니라고 누가 보증합니까? 죽음은 정말 뜻밖의 시간에 우리를 찾아올 수 있습니다.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주인이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음을 자각하는 청지기는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주인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주인이 있는 듯 단정하게 처신하는 사람이 참 일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늘이 우리에게 품부한 일들을 기쁜 마음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삶을 예술이 되게 하라(使人生爲藝)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성도들의 삶은 그 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使人生爲禮).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저도 이게 정말 어렵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기왕 해야 할 일이라면 투덜거리며 하기보다는, 내 삶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마음을 담아 감당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 사람의 하루를 보면 그의 한 평생이 보인다고 하지요? 일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가 보입니다. 돌아가신 전우익 선생님은 마을 근처 분교의 여선생님 이야기를 하면서 거창한 말을 하지는 않지만 반찬 제일 잘 만드는 그 선생님을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말합니다. 말은 잘 하는 데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선생도 있다면서, 전우익 선생은 혀를 차듯 말합니다. 

“어떤 여선생은 화투 하재요. 물 헤프게 쓰고 빈 양동이 두고 갑니다. 그래서 미워요. 물 아껴 쓰는 선생님 우물물 양동이에 가득 길어다 놓고 가요. 별것 아닌 것 같은데 사람 판단이 납니다.”(전우익, <<사람이 뭔데>>, 현암사, 122-3쪽)

해놓은 일 그 자체가 그 사람입니다. 가지런히 벗어놓은 신발을 보면 그 신발 주인의 마음이 고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은 누구의 눈길이 아니라 맡겨진 일에 성실한 태도입니다.


• 인색의 박이 깨질 때

사람들은 일쑤 일의 크고 작음에 관심을 갖습니다. 자기 역량은 생각하지 않은 채 무턱 대고 남보다 큰 일이 맡겨지기를 바라는 이들이 많습니다. 학교에 있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정기공연을 앞둔 연극반 학생들은 대본이 확정되는 날 눈에 띄게 말 수가 줄어듭니다. 대본을 읽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아이들 사이의 긴장감도 높아져서 툭 치면 쨍 소리가 날 것만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누가 어떤 역할을 맡느냐가 결정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기가 주연으로 발탁되기를 바랍니다. 그 뜻이 좌절되면 눈물바람을 하게 마련입니다. 나는 큰 일을 하는 큰 종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제 역량을 제가 알기 때문입니다. 제 소원은 어떤 일이 맡겨지든 기쁘게, 성실하게, 내 혼을 담아 그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 말이 참 두렵게 다가옵니다.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많이 맡긴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한다.”(48b)

저는 지금 제 역량보다 큰 역할을 맡은 것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맡겨진 일이 무엇이든 그 일을 하나님께서 위임해주신 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것이 사람들 눈에 띄는 일이든, 아니면 돈으로 계산되지 않는 ‘그림자 노동’이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드러내려는 마음으로 사십시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제 때에 공급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넉넉한 데도 욕심 때문에 많은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을 괴롭혀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에게 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지만 여전히 배고픈 사람, 위로가 필요한 사람, 벗이 필요한 사람, 동지가 필요한 사람, 삶의 뜻을 잃은 사람, 배움에 목마른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참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뭔가 줄 것이 있습니다. 벳새다 광장에서 먹을 것이 없어 기진한 사람들을 보시며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셨습니다. 없는 것을 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것을 나눌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가장 귀한 선물을 가장 거친 포장지로 포장해 놓으십니다. 인색吝嗇의 박이 깨질 때 평안과 기쁨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주는 이들이 유의할 것은 받는 이들이 굴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는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시간에 주인이 돌아와도 기쁨으로 맞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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