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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과 경주하는 신앙 (렘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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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경주하는 신앙 (렘 12:1~6)


요즘 방송매체를 통해서 물가 이야기만 나오면 얼마나 많은 걱정과 두려움이 생기십니까? 그런데 모 방송사의 ‘극한직업’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나서는 조금 위로를 받았습니다. 최근에는 모대학병원의 흉부외과 의사들의 삶이 방영되었습니다. 드라마의 인기 때문에 흉부외과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은 높아졌지만 실제 의사들은 극심한 수면부족, 과중한 업무로 의학계의 3D로 통한다고 합니다. 

보통 8시에 시작해 오후 6시가 돼야 끝나는 수술 스케줄이 일주일 내내 줄줄이 잡혀 있고, 병실환자 회진에, 응급병동까지 돌보느라, 식사를 거르는 일은 빈번하고 하루 2-3시간 밖에 잠을 못 잔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순간 때로는 한밤중에도 달려 나와서 생과 사를 넘나드는 응급환자 수술을 해야 하고, 심장이식과 같은 조금의 오차나 지연이 용납되지 않는 수술에는 언제나 예상하지 못하는 돌발상황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항상 긴장해야 하므로 거의 사생활을 포기해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번 휴가에 지리산을 다녀왔습니다.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약 52km 정도 되는 길을 약 하루 반만에 다녀오는 참 힘든 등산길이었습니다. 이미 그날 오전에 김제에 들려서 약 왕복 13km정도의 모악산을 등정한 이후라 조금 더 힘든 일정이었습니다. 둘째날에는 새벽 3시부터 저녁 9시까지 약 18시간 동안 약 40km를 걸었습니다. 돌이켜보니 한편으로는 제 자신의 한계를 체험하는 기회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참 무모한 행동이었던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떤 광경을 목격하고 나서는 힘들다는 생각을 감히 할 수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정도로 보이는 쌍둥이 두 딸과 함께 그 멀고도 험한 산을 오르내리는 부모님들이었습니다. 때로는 격려를 하면서도 때로는 제가 듣기에도 심한 질책을 하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아이들을 저렇게 호되게 키우는 부모들은 도대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싶은 것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마 극한의 체험을 통해서 자녀들에게 강한 인내심과 자신감을 심어주려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고통의 강도는 상대적인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 모두 다 저마다의 삶의 현장에서 하루하루를 고통가운데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2008년도 하반기 경제는 저성장, 고물가, 고금리 추세의 장기화가 예상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 한 인터넷 취업사이트에는 새롭게 이력서를 등록한 30대 여성은 지난해 같은 기간해 비해 2배수준이라고 합니다.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믿었던 주부들도 식품, 생필품, 유류값 등 모든 물가 인상으로 인해 쇼핑도 줄이고, 문화강좌도 끊고, 외식을 줄여보아도 소용이 없어서 구직을 결정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 노인들의 생계 역시 매우 위태롭습니다. 보통 건강한 노인분들이 오전에 무가지 배포하고, 오후에 신용카드 배달을 해보지만 한 달에 50만원 벌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합니다. 월세와 공과금과 식비 등 아무리 적게 잡아도 한달 60만원은 있어야 하는데, 자녀들의 도움이라도 없으면 참 살기 막막한 실정이라고 합니다. 대학교 졸업이상의 학력을 가진 비경제활동인구가 257만명으로 1년 사이 8% 정도 증가했고, 20대 비경제활동인구도 232만명으로 1년 전보다 약 3% 증가했다고 합니다.

어느 한 사람 치열하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지 않는 사람 없는데 살아가기는 왜 이렇게 자꾸만 어려워져 갑니까? 대학병원의 흉부외과 의사들로부터 저 지리산 산자락을 숨을 헐떡이면서 오르내리는 초등학생과 그 부모들까지, 저마다 자기의 한계를 넘어서 보려고 얼마나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대학생과 청년들, 주부와 노인들 너나 할 것 없이 생활전선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보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하지만 어떤 선지자보다 힘든 고통과 눈물의 시기를 거쳐야 했던 예레미야 선지자와 우리를 비교해보면 어떻습니까? 이미 멸망으로 거침없이 내달았던 유다의 종말에 비하면 우리나라가 아무리 다각적으로 경제적, 정치외교적인 위기를 겪고 있는 때라고 해도 그나마 나은 상태 아니겠습니까?

예레미야 선지자는 어느 누구 보다도 치열한 삶을 살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어느 누구보다도 올라가보지 못한 최상의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그는 폭풍처럼 몰아치는 적대감과 무서운 의심의 소용돌이를 거치며 평생을 살았습니다. 가장 힘든 역사의 위기에,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13년부터 유다의 왕 시드기야의 11년말까지 약 40년동안 유다와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위임받은 예언자였습니다. 그의 몸은 늘 피곤에 지쳐 극한 상황에 도달했고, 그의 생각은 늘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로 가득찬 배척의 분위기로 사로잡혀 있었으며, 그의 마음과 감정은 늘 조롱과 멸시의 불길을 통과하며 견고해져 갔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즉 ‘여호와께서 그를 높이신다’는 그 이름의 뜻처럼 그는 우상숭배와 반역, 악인들과 속이는 자들이 뒤엉킨 천박하고 죄악된 세상 가운데서도 말씀으로 시대를 환하게 밝힌 높은 산과 같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 가운데 예레미야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았습니까? 예레미야 그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선포라는 무거운 시대적 책임을 걸머지고 홀로 거친 광야를 질주하는 한 마리 말처럼 평생동안 경주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제 저녁에는 0.01초를 다투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를 가리는 남자 100m육상경기가 있었습니다. 자메이카의 볼트라는 선수가 9초69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말과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가운데 누가 더 빠르겠습니까? 말이 더 빠릅니다. 경마장에서는 200m 단위의 속도를 펄롱(Furlong)타임이라고 하는데 약 10초에서 12초사이라고 합니다. 즉 말의 100m 기록은 약 5초라는 이야기입니다. 말은 어떻게 그렇게 순간적으로 빨리 달릴 수 있을까? 말에게는 1분에 100-120회까지 숨을 쉴 수 있는 큰 허파가 있고, 달릴 때 무려 220회까지 혈액을 공급해주는 심장이 있으며, 더 힘을 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산소가 없어도 에너지를 낼 수 있는 백색근이라는 특수근육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너무나 힘든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단순한 보행자의 신앙 정도가 아니라 말과 경주하는 신앙이 필요했습니다. 큰 산을 오르는 것과 작은 언덕을 오르는 것과의 준비과정과 마음가짐을 비교해보면 훨씬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작은 언덕은 편한 신발과 마실 물 정도만 있어도 되지만, 매우 높고 험한 산은 세밀한 계획과 실질적인 장비가 갖추어져야 합니다. 여벌의 옷과 구급약은 물론이고, 든든한 먹을거리와 여러 전문적인 등산장비가 필요합니다. 만약 그것을 무시하고 산행을 감행한다면 큰 곤란을 경험하거나 때로는 생명의 위협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매우 높고 험한 산을 오르는 시기에 살았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시대는 신앙에 있어서는 예레미야 시대와 견줄 수 있을만큼 험한 산을 오르는 시기가 아닐까요? 그러므로 어떤 위기라도 벗어날 수 있는 빠르고 민첩한 굳센 말과 같은 신앙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말과 경주하는 신앙은 무엇입니까? 말과 경주하는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이고, 둘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주를 향한 내 마음과 헌신을 항상 감찰하신다는 확실하고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신뢰입니다. 그 신앙은 하나님께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 것입니다. 주만 바라보는 나의 전적인 사랑은 내 마음 깊은 곳에, 나의 뼛속 깊이 자리하고 있어서 세상 권력과 부귀도, 세상의 능력있는 사람도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조금도 흔들리지 않던 하나님에 대한 예레미야의 전폭적인 신뢰도 주위, 특별히 고향 아나돗 사람들의 살인위협 앞에서는 조금의 의문과 회의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생각하기에 그의 지금 형편은 최악이었습니다. 11장 19절 말씀입니다. “나는 끌려서 도살 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합니다.

이런 핍박을 당해도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11장 22-23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으며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남는 자가 없으리라 내가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곧 그들을 벌할 해에니라”

그런데 아나돗 사람들에게 곧 내려질 것이라던 하나님의 재앙은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1절 말씀을 보면 악한 자들의 길은 더 형통하며 패역과 반역을 일삼는 자들은 다 평안함을 누립니다. 그래서 2절 말씀을 보면 예레미야에게 이런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심으시지 않고서야 그들이 어떻게 심기울수 있으며 그들이 든든히 뿌리가 박히며 더욱 장성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그들의 입은 주님께 가깝지만 그들의 마음은 멀리 떠나있는 데 어찌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1절 첫마디 “의로우십니다 주 여호와여”(짜디크 아타 아도나이)를 끝까지 붙듭니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 신속히 성취되지 않아도, 악한 자의 길은 더욱 형통해지고 반역을 일삼는 자들은 온갖 안락을 독차지 하더라도 주 여호와의 의로우심을 신뢰하는 데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잠시 흔들릴수는 있으나 그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주 여호와만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주 여호와만은 나를 알아주시고(웨아타 아도나이 야다으타니) 나를 보고 계시며 주를 향한 내 변하지 않는 사랑을 감찰하실 것이라는 신뢰에 있어서 예레미야의 믿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도살할 양처럼 여긴 아나돗 사람들과 악인들을 마침내 도살할 양처럼 끌어내실 것이고, 살육할 날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3절). 

비록 자기의 기대가 곧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아나돗 땅의 악한 주민들의 이런 소리만 그의 귀에 들려오더라도 말입니다.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4절) 한계 상황 가운데에서 예레미야는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서 탄식함으로 자기의 심정을 토로합니다. “사람이 악하면 그들이 사는 이 땅에도 재난이 미칩니다. 악한 사람들로 인해 이 땅이 언제까지 슬퍼하며 언제까지 온 지방의 채소가 말라야 하겠습니까? 언제까지 짐승과 새들이 멸절하도록 그들을 가만 내버려두시렵니까?”(4절) 

어떻습니까? 예레미야가 이 정도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참고 기다려왔으면 할 만큼 한 것 아닙니까? 예레미야가 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레미야에게 더 무엇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들을 징벌할 것이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간접적으로 수사의문문을 통해서 그에게 닥칠 더 큰 어려움과 더 오랜 시간 동안의 인내를 요구하십니다. 

5-6절 말씀입니다.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네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에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더니 오히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묻고 계십니다. 

지금 상황에서 피곤해하고 지친다면 지금보다 몇 배 더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장차 닥치게 될 터인데 그 때에는 네가 어찌 하려느냐는 말씀입니다. ‘너의 생애 최악의 날은 아직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현재 그가 겪는 어려움은 보행자와 함께 달리는 정도라는 것입니다. 장차 그에게 닥칠 큰 어려움은 말과 경주하는 정도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래도 네가 안전한 땅에 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앞으로는 요단 강물이 높이 치솟을 때처럼 큰 어려움이 닥친다면 네가 어떻게 그 시험을 견녀낼지 참으로 염려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그나마 악한 사람들이 너를 해하려할 것이지만, 조만간 아주 가까운 사람들, 심지어 부모와 형제들조차도 너를 속일 것이고 너를 비방하고 조롱할 것이며 너의 생명을 해하려고 할 터인데 그 때에는 네가 어찌하려느냐는 물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레미야에게 물으신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2008년도 우리를 향하여 물으십니다.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잠언 11:31) 그렇습니다. 여호와의 의로우심과 여호와에 대한 신뢰가 그렇게도 분명한 예레미야에게 네가 어찌하려느냐 하고 물으셨다면, 질그릇같이 연약한 우리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2008년도 하반기 경제가 어렵다는 몇몇 정보에 온 나라가 이렇게 크게 들썩이는데 앞으로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경기침체가 이어진다면 우리나라가 어떤 국면을 맞이하게 될지 참으로 걱정됩니다. 개인과 가정, 직장과 사업에서 지금 겪고 있는 힘든 상황에 대하여 이렇게 크게 불평하고 원망하는데, 앞으로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면 언제까지 이 땅에서 성도들의 감사 찬송 소리와 화해의 복음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큰 어려움의 때가 되면, 변함없이 하나님께로 돌이키어 영과 진리의 예배로 회복되고 이 위기를 잘 극복해 낼 수 있겠습니까? 주님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예레미야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이 시대의 사람들을 향하여, 성도들을 향하여 보행자와 힘겹게 겨우 달리고서 피곤해하는 정도의 신앙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큰 허파와 심장과 특수근육으로 무장한 말과 경주해도 피곤하거나 지치지 않는 신앙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주님 앞에 경주하는 신앙, 달리는 신앙으로 응답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거룩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다 말과 경주하는 신앙으로 응답하시길 바랍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땅 끝까지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되십니다.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비상하는 인생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말과 달음박질하여도 지치거나 피곤하지 않도록 힘 주시고 도와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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