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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파묻어버리고 새 성전으로 갑시다! (창 3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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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어버리고 새 성전으로 갑시다! (창 35:1~5)


 우리는 다음주일이면 신축성전 기공예배를 드린 후 1년 6개월 만에, 그리고 성전 부지 계약을 한 후 4년 7개월 만에 드디어 대망의 새 성전으로 이사하여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조금 전에 불렀던 ♪허락하신 새 땅에 들어가려면 맘에 준비 다하여♪라는 찬송가처럼, 새 성전에 들어가려면 우리 모두 마음에 무언가 새로운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입니다. 

우리 교회당을 시공한 김 장로님 내외는 서로가 배우자를 잃고 나서 다시 재건한 가정입니다. 그래서 저는 새벽마다 김 장로님 가정을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김장로님 내외가 각기 배우자 상실이라는 인생의 가장 큰 상실을 겪은 분들이니, 세상의 모든 욕심은 다 땅에 묻어버리고 인생의 남은 때를 주님을 위해 살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이미 여생을 그렇게 살기로 굳은 각오가 되어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 주일 감격스러운 새 성전에서의 예배를 앞두고 ‘파묻어버리고 새 성전으로 갑시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거의 머슴살이나 마찬가지의 힘든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야곱은 품삯에 대한 ‘라반’의 여러 차례의 속임수와, 외삼촌 아들들의 질시 속에서도, 하나님의 축복으로 거부가 됩니다. 마침내 귀향을 결심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형 에서가 400인을 데리고 자기를 치러 온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다가 천사와 결사적인 씨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야곱이 겨루었던 씨름의 대상은 참으로 신비하고 기이한 존재였으니, 하나님이면서 사람이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었습니다. 그리고 그 씨름은 물론 기도를 의미합니다. 

야곱은 환도 뼈가 부러지면서까지 사생결단의 기도를 하게 되고, 그 결과 놀라운 응답을 받게 되는데, 1)야곱이라는 이름이 변하여 ‘이스라엘’이 되는 축복을 받았고, 2)다음 날 형 에서와의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렇듯 기도의 능력은 환경과 상황도 변하게 하지만, 무엇보다 기도하는 사람 자신을 변화되게 합니다. 그러니까 참으로 기도한 사람은 반드시 변화되고, 반대로 변화되지 않은 사람은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20년 만에 이루어진 쌍둥이 형제의 극적인 상봉 이후, 야곱은 ‘세겜’이라는 땅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야곱의 커다란 잘못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떠난 롯이 죄악의 도성 소돔 앞에 장막을 쳤던 것 같이, 야곱 역시 죄악의 도성 세겜성 앞에 장막을 쳤던 것입니다. 세겜은 이곳도 저곳도 아닌 어중간한 지점으로서, 세상적인 쾌락을 좇아 살기에 알맞은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더러 벧엘로 가라 하셨지, 세겜으로 가라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외삼촌과의 위기도 넘기고, 형 에서와도 화해를 하고, 재물은 풍부하고, 한 마디로 살만하게 되니까, 이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20년 전 야곱의 서원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제 모든 위기와 커다란 역경을 넘기고 한숨 쉴 만하니까, 그만 하나님께 서원한 모든 언약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드리겠다던 십일조도 드렸다는 기록이 없고, 짓겠다던 하나님의 전도 지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한 허물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것이 곧 창 34장에 기록된 딸 ‘디나의 사건’입니다. 어느 날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성에 사는 여자들을 보러 나가게 되었습니다. 디나는 호기심이 많았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의 딸들이 무슨 옷을 입고, 어떻게 화장을 하고, 무슨 노래를 부르며,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였습니다. 디나의 마음속에는 이방 세계에 대한 유혹의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호기심에 의한 디나의 외출은, 디나 자신이나 그의 가족들에게 전혀 예기치 못했던 수치스럽고도 치욕스런 일을 당하게 합니다. 곧 디나가 그 성읍의 추장 세겜에게 성폭행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세상의 헛되고 악한 풍습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경종을 울려 줍니다. 디나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세겜의 여인들을 보러 나갔다가, 커다란 불행을 자초하였던 것입니다. 

‘야곱의 가정에 왜 이 불행한 일이 일어났는가?’ 디나의 사건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산 야곱에게,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세상에서 엉거주춤한 상태로 살았기 때문에, 자녀들도 이방 문화에 물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디나의 성폭행 소식을 들은 야곱의 열두 아들들은 너무도 분하고 치가 떨려서, 어떻게 하면 원수를 갚을까 궁리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자기 아들의 잘못을 사과하러 온 추장 하몰은, 야곱과 그의 아들들에게 자기가 사는 땅에 함께 머물면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고, 두 집안이 서로 통혼을 하며 살 것을 제의합니다. 이 때에 야곱의 아들들은 간교한 꾀를 부려서, 하몰에게 당신 집안의 모든 남자들이 우리처럼 할례를 받으면, 자기들의 누이 디나를 줄 것이며, 서로 통혼하고 살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이 말을 좋게 여긴 하몰과 그 집안의 모든 남자들은 다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아 고통하며 누워 있는데, 야곱의 아들들이 하몰의 성을 급습했습니다. 그래서 힘을 쓰지 못하고 비실거리는 남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재물을 모두 약탈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자기 누이를 더럽힌 데 대한 피의 복수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야곱은 그 소식을 듣고, 큰 근심과 걱정이 생겼습니다. 아들들의 살인 행위로 말미암아, 가나안 족속들에게 소문이 퍼져서, 숫자가 적은 야곱의 가정은 온 가족이 전멸할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아무리 세겜이 먼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이제 와서 자기 아들들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피를 흘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참으로 큰 환난이었습니다.   

진퇴양난의 딜레마에 빠져 어떻게 할 줄을 알지 못하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벧엘은 야곱에게 있어 자신의 생애 중 가장 어려울 때 가장 뜨겁게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한 장소이자, 가장 순수한 심정으로 가장 진실 되게 신앙을 고백하였던 서원의 장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바로 그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한 것은, 


1. 하나님을 만났던 때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광야에서 혈혈단신으로 밤에 돌베개를 하고 잘 때, 하늘 문이 열리며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던 환상을 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던 그 때를 생각하게 하기 위하여, 벧엘로 올라가서 제단을 쌓으라 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삭개오가 가끔 말없이 집을 나가곤 해서 그의 아내가 뒤를 밟아 보니까, 전에 뽕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만나던 것을 생각하고, 그 나무에 물을 주고 그 나무를 어루만지며 눈물을 글썽이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어느 기도원에서 처음으로 성령을 받고 성령의 은사를 받던 그것을 기억하기 위하여, 해마다 그날이 되면 그 기도원의 그 자리에 앉아서 며칠씩 기도하고 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을 때는 뜨거운 구원의 감격으로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말씀과 기도에 열심이었고 교회 일이라면 모든 것을 제쳐두고 먼저 달려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 열심은 점차 식어지고 순수했던 신앙은 조금씩 세상과 타협해 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처음 은혜 받고 감격스러웠던 때를 잊어버리고 있지나 않습니까? 그 때의 첫 열심과 첫사랑을 잊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러하지 아니하면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경고했습니다. 은혜를 잊어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잘못된 죄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감격했던 그 때를 늘 잊지 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임을 잊어버리면, 사람은 반드시 우쭐대고 교만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늘 살기를 원한다면, 매일매일 순간순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임을 기억하고 명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서 유명해지거나 부자가 되거나 높은 사람이 되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늘 기억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신 8:17-18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기차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기차 안에는 백인과 흑인 노예들이 타고 있었는데, 흑인 노예가 말을 안 듣는다고 백인이 칼을 집어 들고 찔렀습니다. 그 때 같이 기차를 타고 가던 선교사 한 분이 재빨리 손으로 칼을 막았습니다. 흑인은 위기를 모면했으나, 대신 선교사의 손바닥에 칼이 박혔습니다. 선교사는 백인에게 오히려 노예의 값을 치러 주고, 그 노예를 자유롭게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노예는 너무 고마워서 선교사에게 따라가서 평생 동안 종노릇을 하겠다고 간청해서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같이 지내면서 노예가 생활이 편해지니까 가끔 선교사의 말을 안 듣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선교사는 자기가 대신 다친 손바닥의 상처를 펴 보이면, 노예는 과거의 일을 기억해서 누그러졌다고 합니다. 

우리는 항상 무엇을 기억해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억만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는 한이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상처는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잊어버린다면, 무서운 죄에 빠져 마귀의 종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과거의 고난 받던 때를 기억하고, 항상 겸비한 마음으로 믿음 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난날의 서원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야곱의 잘못을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 그제야 야곱은 정신이 번쩍 들어서 자신이 하나님께 서원을 드린 ‘믿음의 요람’인 벧엘을 향하여 올라가게 됩니다. 벧엘로 올라가는 길에서 야곱은 집안 모든 사람들에게 3가지 준비를 시키는데, 

1) 이방 신상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야곱의 집안에 어떻게 이방 신상이 있을 수 있었는가에 대하여서는, 라헬이 자기 부친의 드라빔을 소유하고 있었던 점과, 야곱이 얻은 노비 중에 우상 숭배자가 끼여 있을 가능성, 또한 세겜 성의 약탈물 중 이방 신상이 섞여 있을 소지가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2)자신을 정결케 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몸과 마음의 동시적 정결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원하는 자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3)의복을 바꾸라고 하였습니다. 

의복은 그 사람의 신분과 생활을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서, 의복을 바꾸는 것은 곧 새로운 삶을 위한 결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몸을 씻는 것이 회개를 의미한다면, 의복을 바꾸는 것은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기 전 온 집안 식구들에게 우상을 버리고, 몸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도록 하는데, 이는 야곱 일가의 회개의 철저함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나서 야곱은 가족들에게 벧엘로 올라가 제단을 쌓을 이유를 설명합니다.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그리하여 야곱 일가는 모든 이방 신상을 버렸습니다. 라헬은 가지고 있던 ‘드라빔’을 버렸습니다. 귀고리도 버렸습니다. 귀고리는 보통 장식용이 아니고, 미신적 행위에 사용한 부적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야곱의 식구들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버리고, 혹은 땅 속에 파묻어 버렸습니다. 야곱 일가의 이 같은 행위는 우상 숭배를 완전히 청산하고 아브라함이 간직했던 순수한 신앙으로의 복귀 선언이자,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우상들이 죽은 시체와도 같음을 뜻하는 행위였습니다.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파묻어 버리고, 야곱 일가는 벧엘을 향하여 올라가게 되었는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회개한 야곱에게 다시 나타나시어 이전에 하셨던 언약을 재확인하여 주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는 놀라운 복을 주셨습니다. 야곱의 가정에 일어난 모든 사건들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1)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외삼촌과의 위기도 넘기고, 원한으로 가득 차 있던 형 ‘에서’와의 화해도 이루어지고, 재물이 풍부하게 된 야곱은, 하나님께 드렸던 서원도 잊어버리고, 아비 집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도 외면한 체, 세겜에 머물며 살다가 커다란 환난을 만났습니다. ‘물망초’라는 꽃이 있습니다. 그 꽃의 이름은 ‘나를 잊지 마세요’ (forget me not)라는 뜻입니다. 이 꽃말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고 영원히 기억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인정해 주고,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것 이상으로, 우리 자신이 주님께 드렸던 서원을 잊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2)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야곱이 디나가 성폭행을 당한 일과, 아들들이 살인을 한 일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 무엇일까요?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미련한 사람은 환난을 당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합니다. 야곱은 세겜에서 물질적인 번영을 누리면서 세속과 어울렸지만, 이제 감당키 어려운 환난을 만나자 비로소 다시 하나님을 찾으며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환난과 고난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깨닫게 하시고, 죄악 된 길에서 돌이키게 하십니다. 

우리가 야곱처럼 인생의 위기와 고난을 당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벧엘을 찾게 된다면 그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도, 영적 각성과 부흥의 계기가 되는 벧엘의 경험을 맛보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삶이나 가정의 영적 상태를 보면 하루빨리 벧엘을 찾아야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겠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개인적인 문제, 가정적인 문제, 자녀들의 문제, 사업의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등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있는 성도가 있습니까? “오 하나님! 왜 나에게, 왜 우리의 가정에, 이 같은 어려운 일이 닥치는 것입니까?” 하면서 눈물로 부르짖는 성도가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에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깨닫고,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였던 벧엘에서의 처음 사랑과 감격을 회복할 수 만 있다면, 그것은 징계가 아니라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 새성전으로 옮겨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야곱 일가는 벧엘로 올라갈 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않는 모든 것들을 아낌없이 미련 없이 다 상수리나무 아래 파묻어 버렸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런 상수리나무 아래가 있습니까? 나의 옛적인 자아, 나의 옛 성품, 나의 거듭나지 못한 본성, 세상적인 가치관, 이런 것들을 파 묻으셨습니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고, 연인을 더 사랑하고, 쾌락을 더 사랑하고, 세상 일락을 더 사랑하는데, 이 시간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이 우상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께 심히 합당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야곱 일가처럼 모든 우상을 버리고 파묻어 버려야 합니다. 물질만 탐하고, 세상을 사랑했던 마음도 파묻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마음도 파묻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남을 헐뜯고 흉보는 악습도 파묻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하지 못한 마음도 파묻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음란하고 호색했던 일들도 파묻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정결케 하고, 그리스도로 옷 입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야곱일가가 철저하게 회개하고 벨엘로 올라갈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게 해주셨던 것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합치 못한 것들은 무엇이든지 아낌없이 미련 없이 단호하게 파묻어 버리고 새 성전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여러분들에게, 환난이나 불행이나 재앙이 따라오지 않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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