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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라 (계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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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라 (계 2:10)


지금 베이징에서는 올림픽 경기가 한창입니다.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안겨줍니다. 올림픽에 참여한 선수들은 하나같이 메달을 바라보면서 경기에 임하고 있을 것입니다. 각국에서 선발된 우수한 선수들을 물리치고 메달을 차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만큼, 선수들은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운동경기에 비유합니다. 

“24)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 

평생을 복음을 위해 바쳤던 사도 바울은 이같이 감회를 말했습니다. “7)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 

여기서 사도는 자신을 육상 선수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단거리 육상경기든, 장거리 마라톤 경기든 선수의 각오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 완주해서 상을 받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경주에 나선 성도들은 주님께서 주실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성경에 말씀한 ‘의의 면류관’이나 ‘생명의 면류관’은 각기 다른 것이 아니라 영생을 말합니다. 영생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이 시간에는 신앙의 경주에 나선 성도들이 생명의 면류관 곧 영생을 얻기 위해 어떠한 자세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말씀해 드림으로 서로 간에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목적을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는 누구나 메달을 따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이 목표가 있기에 선수들은 경기 규정을 준수할 뿐 아니라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는 믿음의 경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목적을 올바로 아는 신자라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인기가 좋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의 주류를 이룬 사두개인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싫어했지만, 서민 대중 가운데는 예수님을 존경하여 따르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벳새다 들판에 모인 사람들을 보세요. 성인 남자만 5천명이나 되었으니 여자들과 아이들을 합하면 만 명이 훨씬 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저녁때가 되어도 돌아갈 줄을 몰랐습니다. 이는 그만큼 예수님에 대한 민중의 기대가 컸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개중에는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듣기 위해 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병을 고침 받기 위해서 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는 주님께서 행하시는 신기한 이적을 보려고 왔거나 심지어는 떡을 얻어먹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같은 현상은 오늘날도 비슷합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교회로 나옵니다. 

병 고침을 받기 위해 예수님께 나온 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잘못된 행동이라면 주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셨을 리가 만무할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일에 얼마나 열심이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병을 고침 받는 것이 예수님께 나온 이유의 전부라면 그것은 너무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누어 주신 기적의 떡을 얻어먹은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부스러기를 열 두 광주리나 거두다니, 그런 떡을 나누어 먹는 감회가 각별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떡을 배불리 얻어먹은 것으로 만족하고 그로 인해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을 믿는 데 이르지 못했다면, 기적의 떡을 얻어먹은 것이 그리 의미 있는 사건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 날 저녁 기적의 떡을 얻어먹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이튿날 아침 일찍부터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6-27)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그들은 귀가 번쩍 띄어서  “그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하시자, 그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하기를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하면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도 가려느냐?”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 6:68-69)고 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떡을 얻어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 영생의 말씀이 있음을 알았기에 주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오되, 떡을 얻어먹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영생을 얻기 위해서인가 그 목적이 중요합니다. 

천재일우(千載一遇)라는 말이 있습니다. 천 년에 단 한 번 만난다는 뜻으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좋은 기회를 이르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 천재일우보다 더 귀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이지,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서 죽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들을 기회를 얻는 것처럼 행복한 일은 달리 없습니다. 그것은 어둠 속을 헤매던 사람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추인 것과 같습니다(사 9:2). 

어둠은 죄와 사망과 영적 무지 등을 말하고 큰 빛은 의와 생명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 등을 말합니다. 아무 소망도 없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처해 있던 사람이 예수 믿고 죄 사함을 받아서 하나님과의 불화를 청산하고 화목한 관계를 이루게 되고 그 결과 영생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날도 기독교인 가운데 적잖은 사람이 영생이 아닌 다른 목적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미국에서 유행하는 신학 가운데 번영신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믿으면 건강과 부와 성공을 가져다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이름도 번영복음(Prosperity Gospel)이라고 부릅니다. 

이 번영신학이 미국에서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들어와서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존 파이퍼란 분은 번영의 복음에 관해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 메시지를 믿으십시요. 그럼 당신의 돼지들은 죽지 않을 것이며, 당신의 부인들은 유산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손가락에는 금가락지가 껴져 있을 것이며, 당신의 등에는 고급코트가 덮여질 것이고, BMW를 몰고 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예수가 당신이 가진 그걸 주었습니까? 오, 그렇다면 저도 예수를 받아드리죠” 그것은 바로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지, 복음이 아니다.》 

번영신학이 말하는 내용을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는 무속적 기복 신앙과 같은 메시지입니다. 번영신학을 전하는 사람들은 현세적인 번영으로 영생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도 영생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생은 예수 믿을 때 이미 따놓은 전리품과 같으므로 더 이상 관심 둘 것이 없으며,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서 현세적인 번영을 누리는데 힘쓰라고 말합니다. 과연,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같이 말씀하셨을까요? 유감스럽게도 그런 말씀은 사 복음서에서 단 한 구절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요즘 유행하고 있는 번영복음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공 출세를 위해서 목숨을 거는 미련한 인간들에게 “36)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충고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 부와 성공을 약속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고난과 희생을 기꺼이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23)…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4)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 9:) 우리가 현세적인 부와 성공이 아닌 핍박과 환난을 감수하고서라도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장차 생명의 면류관 곧 영생을 받아 누리게 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주님께서는 현재 우리의 믿음 상태를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올림픽 경기에 출전한 선수에게 중요한 것은 지난날의 화려한 전적이 아니라 현재의 실력입니다. 티비를 통해서 경기를 관전하다 보면,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인데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등수에 들지 못하고, 그 대신 지난날에는 빛을 보지 못하던 선수가 메달을 따는 것을 봅니다. 이처럼 현재의 상태가 중요한 것은 신앙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현재의 신앙상태를 보십니다. 과거에 내가 예수님을 잘 섬긴 것도 귀하지만, 만일 지금 내가 예수님을 멀리 떠난 상태라면 그 좋았던 과거가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바울 서신에 보면, 데마의 이름이 세 번 나옵니다. 골로새서 4장 14절에 보면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 하였고, 빌레몬서 1장 24절에 보면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데마는 사도 바울의 충실한 동역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신실한 사역자 중 하나로 인정받다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나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 보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슬픈 이야기입니까? 데마가 지난날에는 주님을 사랑해서 복음의 증인으로서 온갖 고초를 무릅썼지만, 언제부턴가 세상이 그 마음속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더니 그만 데마의 마음을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드디어 데마는 세상의 즐거움과 안락한 생활을 위해 복음 사역자의 길을 버리고 사도 바울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우리 자신의 신앙상태를 한번 점검해 봅시다. 지금도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아니면 불 꺼진 화로처럼 사랑이 식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어느 이른 아침에 갈릴리 해변으로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둘러앉아 조만을 먹었습니다. 조만을 먹은 후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지난날 나를 사랑했느냐고 물으신 것이 아니라,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다면 과거에 사랑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주님께 대한 현재의 자기의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 아침에 주님께서는 똑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하셨고, 그 때마다 시몬은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똑같은 대답을 반복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 각 사람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아무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무쪼록 주님의 이 물음에 여러분 모두 “주여, 그렇습니다. 제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진심으로 대답하게 되시길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신앙을 지켜나가는데 방해거리가 많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데마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무엇보다도 현대는 물질만능주의가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천한 자도 귀한 자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황금 앞에 절하며 굴복합니다. 

이번에 해방 60주년을 즈음해서 MBC와 한국사회학회가 한국인의 삶에 대한 생각을 조사해 보았더니, 행복의 조건으로 7년 전인 2001년도에는 건강이 36.8%, 가족이 35.0%, 돈이 14.1%였는데, 7년이 지난 2008년도에는 건강이 32.1%, 가족이 24.0%, 돈이 32.3%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건강이나 가족보다 돈이 행복의 첫째 조건이 된 것입니다. 

이번 조사의 표준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 3.1%라고 하니까, 천 명 중에서 1/3 가량이 돈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7년 전에 비해서 돈을 더 좋아하게 되었거나 또는 생활하는데 돈의 필요성이 더 커졌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돈을 행복의 첫째 조건으로 삼는 사람이 늘어났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타락해 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저는 이번 조사결과를 보고서 과연, 돈을 행복의 첫째 조건으로 내세운 32.3%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포함되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이 돈을 사랑하게 되면 신앙을 지켜나가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절대로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9)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하신 디모데전서 6장의 말씀이 그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여러분의 신앙상태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주님과 사랑의 사귐을 갖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형식적인 종교생활로 위안을 삼고 있지는 아니한지 말입니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믿음이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나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에 의해서 평가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신자들이 내 믿음을 어떻게 볼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평가하실까가 중요합니다. 

주님과 내가 얼마나 친밀한 사랑을 나누는지는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기독교 신앙 때문에 핍박 받는 일이 거의 없지만, 그 대신 물질만능주의와 세속의 유혹이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시험을 물리치고 믿음을 지켜나가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과거에 안주하지 말고 지금 나의 신실한 믿음을 주님 앞에 나타내고 인정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영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떤 경기 종목이든 선수가 중도에 기권하면 상을 기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세인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맙니다. 선수가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 남자 역도 69kg에 출전한 이배영 선수는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으나 용상 1차 시기에서 종아리 경련이 일어나서 바벨을 들어 올리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2차, 3차 시기에 도전했습니다. 

결국, 그는 마지막 3차 도전에서 바벨을 어깨까지 들어 올렸으나 그만 다리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무릎을 꿇으며 앞으로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벨을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선전하는 이배영 선수를 본 관중은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비록 메달을 따지는 못했지만 많은 사람이 그의 투혼을 칭찬합니다. 

신앙생활도 이처럼 끝까지 믿음을 지켜나가는 투혼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입술로만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다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믿고 그 이름을 부르는 자 곧 입으로 그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천국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요한 계시록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느 주일에 밧모섬에 유배 중인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신 계시를 기록한 것인데, 거기 보면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죽도록 충성을 바치는 성도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믿는 우리에게 죽도록 충성할 것을 요구하실 권리가 있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간혹 보면, 예정론을 잘못 알고 있는 나머지 한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은 중도에 믿음을 상실해도 구원을 받는데 지장이 없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는,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될 일을 이 같이 예언하셨습니다. “9)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12)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과 적그리스도의 위협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견디는 성도들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때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선지자 노릇을 하고, 병자를 고치고, 큰 권능을 행했을지라도, 그것 가지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성도들이라야 영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간혹 보면, 시험과 역경을 만나서 믿음생활을 중단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취할 믿음의 태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0)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마 13:)라고 하셨습니다. 

돌밭에 뿌리운 자나, 가시떨기에 뿌리운 자나 결실치 못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 두 종류의 밭은 시험 앞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데마가 우리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것은 그가 믿음의 경기를 하는 중도에 시험에 넘어져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간혹 데마처럼 세상으로 나갔다가 다시금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께 돌아오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신자들은 비유컨대 불 가운데서 건짐 받은 것과 같습니다. 

♪  “그 귀한 세월 보내고 이제 옵니다. 
    나 뉘우치는 맘으로 주여 옵니다.     

    나 죄에 매여 고달파 이제 옵니다. 
    주 크신 사랑 받고자 주여 옵니다.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 주소서.“ 

우리가 주님을 멀리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때 주님께서 기꺼이 용납해 주시는 것도 크신 은혜지만, 그런 방황 없이 끝까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자들은 더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말세가 가까울수록 성도들의 믿음을 훼방하는 마귀의 역사와 세상 유혹이 극심해 질 것입니다. 그런즉 항상 영적으로 깨어 기도함으로 끝까지 믿음을 지켜나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제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가 가까웠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번영신학과 같은 거짓된 가르침에 현혹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목적을 올바로 알고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지난날 신앙생활 잘 한 것을 자랑하거나 주님을 위한 헌신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열심을 다해 믿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중도에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완주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주님 앞에 설 때 한 사람도 빠짐없이 생명의 면류관을 받고 영생의 복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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