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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눅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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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눅 11:1~4)


새벽 기도가 끝나고 개인기도 시간에 슬피 울며 기도하는 나이 많은 권사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그 권사님의 기도는 너무나 애절하고 긴박했습니다. 
“하나님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그냥 죽으면 안되요 너무 불쌍해요 주여 살려주실줄 믿습니다. 살려 주세요”

권사님의 기도소리가 얼마나 크고 간절했던지 목사님의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목사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필시 권사님 가족중에 급환으로 입원ㅇ르 한 사람이 있거나 사경을 헤메는 사람이 있나 보다 라고 짐작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권사님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권사님 누구 지금 위급한가요?”

그러자 권사님이 울먹이면서 “목사님 너무 불쌍해요, 꼭 살아나야 해요. 목사님도 기도해주세요.”
"그럼요 저도 기도할께요 그런데 누가 그렇게 위급한가요?“
“목사님은 텔레비전도 안보세요? 가을 동화에 나오는 은서가 지금 위급 한데요” 

여러분 웃었습니까?
유머집에 나오는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에도 그렇게 감동하고 사실처럼 받아 드리고 진실하게 기도할 수 있는 그 순수한 마음이 부럽습니다. 

이 시대를 가리켜 감정이 메마른 시대라고 합니다. 정서가 불안하고 서로를 믿지 못하며 마음들이 굳어져서 남의 슬픔에 동정하지 않으며 남의 기쁨에 박수치지 않는 시대입니다. 마 11:17절에 예수님이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라고 하신 것처럼 감정들이 메마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말씀의 은혜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고 인격에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먼저 감정의 문을 두드리시기에 마음을 완고히 하는 사람은 은혜의 잔을 마실 수 없습니다. 마음을 열어 설교를 통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이 시대를 사는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부터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의 내용을 연속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먼저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봉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1. 기도문의 특징 

주기도문은 제자 한 명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부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면서 기도의 샘플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입니다. 주 기도 문은 주님이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처 주신 기도문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주의 기도문이 아니라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문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주님이 가르쳐 준 기도문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① 하나님 아버지 중심적입니다. 
주기도문은 하나님 아버지로 시작하여 아버지로 끝납니다. 마 6:9-13절의 본문에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로 시작하여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로 끝났습니다. 
기도를 받으시는 대상이 하나님이시기에 기도문의 중심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② 기도의 모범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유기적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어떤 기도문의 틀에 묶어 놓고 기계적으로 그 기도문만 암송한다고 해서 기도를 다 한 것으로 보면 안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기도문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기도의 모범인 것입니다. 
이 모범에 근거하여 성령의 감동에 따라 각자의 마음과 믿음과 사랑을 담아 주님께 표현하는 것이 살아 있는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왜 이런 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을까요? 
그것은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는 배우는 것 보다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기도에 대하여 공부하느라고 기도할 시간이 없다” 라는 말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③ 신앙 고백적입니다. 
주기도문은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신앙고백이 “나는 이렇게 믿는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라면 주기도문은 그 자체가 신앙 고백문이 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신앙 고백문 형식으로 바꾼다면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그의 뜻은 하늘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고 땅에서도 완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모든 시험과 악에서 건지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주기도문은 신앙 고백적 특징이 있습니다. 


2. 친히 기도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기도하시는 분이셨습니다. 1절에 보면 예수님이 한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친히 기도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기도로서 힘을 얻으셨고 기도로서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피곤하실 때도 기도하셨고 바쁘고 분주할 때도 기도하셨습니다. 때로는 산에서 기도하셨고 언제나 특별한 장소를 정하여 기도하셨습니다. 
“한 곳에서 기도 하시고 ...” 라는 이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공간적 측면에서의 한 장소를 의미합니다.

특별한 한 장소를 정해서 기도하셨다는 것을 의합니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을 떠나서 지정된 한 장소에 가셔서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눅 5:16절에 보면 “예수는 물러 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라고 했습니다. 
조용한 한 장소를 찾았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 한 장소를 지정한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물론 우리는 어디든지 계신 하나님께 어느 곳에서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어떤 장소를 특별히 구별하여 자신의 기도 처로 삼고 기도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좋은 일입니다. 

베드로는 시몬의 집에서 지붕에 올라가 기도하였습니다.(행 10:9) 바울은 성령의 인도로 마게도냐의 첫성인 빌립보에 이르러 안식일 날 기도할 만한 장소 즉 기도처를 찾았습니다. (행 16:13)

신약 시대의 대표적인 사도인 베드로와 바울이 그들의 경건 생활을 위해 특별한 기도 장소를 찾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이 그러셨기에 그랬던 것입니다. 특별한 장소를 정하여 기도하는 것은 신비주의적 요소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기도를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부르짖고 간구할 수 있고 기도를 깊이 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진 한 장소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시간적 측면에서의 특별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장소적인 요소는 시간적인 요소를 포함합니다. 즉 한 장소를 정해놓고 그곳에 가서 기도한다는 것은 그곳에 가는 시간을 낸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가끔씩 특별한 시간을 정하고 특별한 장소를 정하여 주님과 만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도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장소에서 기도하여야 할 이유를 예수님이 기도하신 이유에서 찾아보겠습니다. 


3. 예수님이 기도하신 이유

예수님은 기도하실 필요가 없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신 내용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구분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① 육체적 연약함을 극복하시기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육체를 지니셨기에 그는 언제나 기도하셨습니다. 육체를 가졌다는 것은 육체적인 한계를 지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는 그 한계를 뛰어넘으실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육체의 한계로 인한 고통까지 느끼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피곤하셨고 배고프셨으며 마음이 상하시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연약해지신 것은 그가 육체를 가지고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지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육체의 한계를 느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는 한계를 느끼실 때마다 기도하셨습니다. 

히 5:7절에 보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통곡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입니다. 하갈의 통곡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창 21:16) 히스기야 왕의 통곡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왕하 20:3) 
주님의 통곡과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기도는 우리의 본이 됩니다. 우리도 한계에 부딪힐 때 마다 통곡과 눈물의 기도를 드립시다. 긍휼을 구하는 기도, 은혜를 간구하는 눈물의 기도 말입니다. 

② 사역을 감당하시기 위하여 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에 인간을 죄악에서 구원하실 목적으로 오셨습니다. 그 방법으로 십자가를 택하신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인간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심으로 인간에게 사죄의 은총을 베풀고자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이 땅에 계실 동안 주님의 생각 속에는 온통 십자가 뿐이었습니다. 즉 자나 깨나 그 사명을 위해 생가각하고 그 사명을 이루시기 위한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도해도 오직 자신이 해야 할 일 즉 사명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눅 22:42절의 내용에 보면 예수님이 자신의 사명에 대한 의식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육체적 연약함의 한계에 부딪힌 인간 예수님의 고민이 나오고 있지만 자신의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너무도 잘 아시기에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워지기를 구하는 예수님의 기도는 그가 언제나 사명을 위해 기도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명 즉 내가 해야할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한 인간을 태어나게 하시면서 쓸데 없이 나게 하시지 않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속에서 해야 할 일들을 받아서 태어납니다. 자신이 깨닫든 그렇지 않든 모두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명을 깨닫기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명을 이루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어떻게 사명을 감당해야 할지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③ 죄인들을 위한 대 제사장적 중보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신 이유는 중보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요 17:9절에 보면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에도 자신을 못받는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중보 기도입니다. 
중보기도는 나를 위한 기도라기 보다 남을 위한 기도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도 중보 기도입니다. 

이기주의에 빠져서 자기 유익만을 구하는 기도는 그만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이 바로 중보기도를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서 진심으로 남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면 그 기도는 하늘에 상달될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를 핍박하는 원수를 위해서도 복을 빌며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마 5:44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라고 했습니다. 
이게 중보기도입니다. 

주님이 기도하신 것처럼 중보기도 합시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나를 미워하고 욕하고 오해하고 원망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을 위해 오히려 기도해야합니다. 


4. 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이유

기도를 가르쳐 주신 주님의 뜻은 우리로 기도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주문이 아닙니다.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하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2절과 4절에 등장합니다.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이유가 바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기도하라는 명령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요 14:13-14절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기도할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그렇습니다. 
기도하면 응답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의심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이 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주님의 뜻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의자 옆에 앉아있던 개가 루터가 식사하는 모습을 열심히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손이 밥그릇으로 가면 눈이 밥 그릇으로, 손이 입으로 가면 또 입으로 손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루터가 개에게 감동 되었습니다. 

그래서 개에게 고기 한 점을 던져주었는데 정신없이 먹어치우고는 또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루터는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개가 내 손을 쳐다보는 것처럼 나도 하나님만 바라보았더라면 하나님은 내게 더 크게 감동하셨을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기도문 강해를 통해서 더 많이 기도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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