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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에게 보여주십시오 (요 1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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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보여주십시오 (요 14:7~11)  

 
안소니 드 멜로라고 하는 분의 저서 「일분지혜」라는 책에 나오는 한 편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스승이 그제자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말라. 그냥 바라보아라. 하나님을 찾지 말라. 그냥 바라보아라. 그러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스승은 대답했습니다. “무엇을 바라볼 때마다 거기 있는 그대로만 보고 다른 것은 보지 마라.” 그래야 보게 될 것이라는 대답입니다. 

제자가 당혹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스승은 다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달을 바라볼 때는 달만 보고 다른 것은 보지 마라. 가령 배고픈 사람은 달을 보면서도 ‘저게 빵떡이라면..’하고 빵을 생각하면서 보니 달을 달로 볼 수가 없느니라. 또 사랑에 빠진 사람이 달을 쳐다보면 달을 보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만 생각하니까 달을 바로 볼 수 없느니라. 하나님을 볼 때는 하나님만 보아라. 그래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의미있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과 제자의 아주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중요한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는 말합니다. ‘예수님,하나님을 보여주십시오. 하나님을 보면 족하겠나이다. 하나님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소원했습니다만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벌써 보았느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데 아직도 못보았느냐. 아직도 너희는 하나님을 못보았느냐.’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목사님께 찾아온 한 집사님이 있는대로 자기의 근심걱정을 다 털어놓는 것입니다. 남편에 대해서,아이들에 대해서, 가정에 대해서, 직장에 대해서, 좌우간 숨도 쉬지 않고 자꾸만 주워섬깁니다.목사님이 한 시간을 듣다듣다 못해서 말합니다.“이제 그만합시다. 그런데 하나만 물을 텐데요. 혹시 그 모든 생각을 하는 중에 하나님을 생각해보았습니까? 하나님을 아십니까?” 그랬더니 이 여자가 “그럼 나도 하나 물읍시다” 하더니 “목사님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합니다. 목사님은 대답합니다. “No, I don't.” 아니요. 나도 잘 모릅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I am surprised by God in every moment.” 대단히 의미있는 대답입니다. “I am surprised by God in every moment.” (나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매 순간마다 놀라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일 아닌 것이 없습니다. 풀포기 하나에서부터 돌맹이 하나까지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역사 아닌 것이 없어서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고 삽니다. 명답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눈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일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어느날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아침식사를 하는데, 집에서 키우는 개가 무릎앞에 앉아서 루터를 쳐다봅니다. 루터가 빵을 집으면 빵을 보고 고기를 집으면 고기를 보고 음식을 입에 넣으면 입을 보고... 고개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열심히 쳐다보는 것입니다. 하도 열심히 쳐다보기에 한 조각 찢어서 주고나서 루터는 무릎을 탁 치고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이 개가 이 고기조각을 쳐다보는 것같이 내가 하나님을 쳐다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이 개는 이 고기조각을 쳐다보는 동안 다른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집중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하나님 아버지’ 해놓고 또 이 생각 저 생각 한다. 이래서 되는 것인가.” 그것 참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만 쳐다보아야 하나님을 보겠는데 무엇이 그렇게 복잡하고 무엇을 그렇게 가리는 것이많은지? 그래서 하나님을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을 지식이라 한다면 먼저는 논리적 지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봅니다. 그런데 이성이 병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이성을 통해서 추리, 분석, 통합하면서 우리는 눈으로 볼 수없는 것을 생각으로 봅니다. 비록 보이지 않아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지식의 주체다.’ 그가 우리를 창조하셨고 그가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것 만큼 그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알려주심으로 우리가 아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이성으로, 그 능력을 따라, 그 기능을 따라서 논리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감성적 지식이 있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자신의 어린아이를 아는 것처럼 가슴으로 아는 것입니다. 울 때 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압니다. 가슴과 가슴으로 압니다. 그 아기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아기의 사정을 어머니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마음으로 압니다. 보십시오. 사랑을 하게되면 가슴이 열립니다. 그래서 알수가 있습니다. 미워하게 되면 가슴이 닫힙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게 됩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지식의 문이 꽉 닫히고 맙니다. 그 미움에서 벗어나야 무엇인가 생각이 나겠는데, 무엇인가 들리기도 하고 보이기도 하겠는데... 너무도 답답합니다. 이 미운 마음 때문에 마음의 문이 꽉 닫히고 눈도 어두워지고 귀도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사람이란 의심하게 되면 지식이 굴절작용을 일으킵니다. 의심하게되면 오해가 생깁니다. 의심이 이미 마음에 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해도 오해합니다. 이래도 오해하고 저래도 오해합니다.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감성이 깨끗해야, 마음이 깨끗해야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하나님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체험적 지식입니다. 몸으로 경험하면서 얻는 지식인데 소중한 것입니다만 경험 자체만으로는 지식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속에 이미 있는 지식이 그 경험 속에 작용해서 이미 있는 지식의 방향에서 이해하고 그 분량 만큼 이해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무엇을 보았다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경험이라는 것은 이상하게도 사람을 스스로 위험에 빠뜨립니다. 그래서 고집이 생기고 자기우상화에 빠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경험한 것 외는 인정하지 않으려합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경험속에 가두고 제한하려는 어리석음에 빠집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스스로는 하나님을 잘 알고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지식과 삐뚤어진 경험이 만나면 걷잡을 수 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게 됩니다. 이것이 이단의 모습입니다. 

지식이라 하면 또한 감각적 지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을 봅시다. 베이징 올림픽의 열기가 우리들의 일상사를 모두 멈추어 놓은 듯 합니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선전하고 있습니다. 어제밤, 장미란의 여자 무제한급 역도인살 140kg, 용상 185kg, 6번을 완벽하게 했습니다. 정말 드라마보다 더 큰 감동이 그 속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가령 볼을 찰 때, 저기서 오는 볼을 보고 ‘가만있자, 이렇게 차면 어떻게 될까? 아니, 저렇게 차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생각하고 차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많은 시간 훈련이 되어서 볼을 보자마자 벌써 발을 갖다대는 것이 아닙니까. 감각적입니다. 아주 자동적입니다. 여기에 무슨 판단이고 결정이고 할 겨를이 없습니다. 아주 몸에 익은 것입니다. 완전히 익숙해진 감각적 지식, 그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감각화한 지식입니다. 

이렇게생각해 본대로 우리 인간은 논리적 지식, 감성적 지식, 체험적 지식, 감각적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들로 하나님을 알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하나님을 아는데 도움은 되지만 때로는 방해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들로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어 답답하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도 때때로 가슴을 치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십시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하는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무슨 말씀입니까. 벌써 보았다 하십니다. ‘너희는 나와 함께하지 않았느냐?’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하나님을 보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느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벌써 깨달을 수 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을 만나야 됩니다. 이 인식적인 방법론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계시론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만큼 하나님을 보고 삽니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와 같이 다니면서 보지 않았느냐. 네 마음속으로는 나를 보면서 하나님을 벌써 만났어야 되는데 아직도 못만났느냐?’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교훈인지 모릅니다. 경험은 있으나 이해가 부족합니다. ‘오늘 네가 하나님을 못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네게 보여주시지 않아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가 불충분해서가 아니고 네가 무엇인가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 마음속에서 오해가 있고 의심이 있고 정욕이 있고 욕심이 있고 무엇인가 가득찬, 잘못된 것이 있어서 아직도 하나님을 못보았구나.’하는 말씀입니다. 또 ‘내게 듣는자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느니라’- 

여러분, 성경을 읽으면서 내게 주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설교를 들으면서 영으로 내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모든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주의 음성을 듣고 주의 역사를 눈으로 보게 됩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음성을 듣고 양심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순간순간. 영이 깨끗한 자는 계속 들려지고 계속 보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보여집니다. 충분하게 보여집니다. 이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돌아온 탕자를 생각해보십시오. 탕자가 집을 나갔다가 돌아옵니다. 그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결코 쉽고 간단한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 자기자신을 생각하면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자기의 잘못, 자기체면, 자기자존심 생각하면 못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는 어버지를 생각했습니다.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를 생각할 때 그는 그만큼 자신이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볼 때 나는 소중해집니다. 나를 위하여 수고하신 분을 생각할 때, 나를 위해 희생하신 분을 생각할 때, 십자가를 생각할 때 나는 소중해집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 사람의 가치를 높게, 소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탕자는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맞이해주십니다. 아버지가 나를 인하여 기뻐하십니다. 그럴 때 나라고 하는 존재가 이렇게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으로 볼 때는 버려진 것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만 아버지의 밝은 얼굴을 생각하고 나를 생각하니 내가 너무도 소중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요.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란 예수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예수믿는다’란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자기존재를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작품에「리어왕」이라고 하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리어왕이 이렇게 절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젊어서는 육신의 눈은 떴으나 마음의 눈이 멀었고, 나이가 드니 마음의 눈은 떴으나 육신의 눈이 멀었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알 것 같습니다. 차라리 육신의 눈이 멀더라도 마음의 눈이 열려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쯤은 마음의 눈이 열려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시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셔서 역사합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이미 보았습니다. 지금도 보고있습니다. 지금도 듣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조용히 마음문을 열고 여러분의 삶 속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라고 말하는 빌립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요, 나의 모습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한 일을 당할 때, 받아들일 수 없는 아픔과 실패를 당할 때, 그리고 오랜 세월 기도하고 기다려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우리도 빌립 처럼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대답하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고, 내 말을 들은 자는 이미 아버지의 말을 들은 것이요. 내가 행하는 일을 보면서 내 안에 계시는 아버지를 믿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더 중요한 것은 12절의 말씀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것도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를 보는 것은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예수를 통하여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을 하시는 예수를 믿는 것은 그를 믿는 우리도, 나도 이보다 큰 것도 할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을 통하여 다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속에 있는 하나님을 보라고 사람들에게 말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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