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갈 2:11~21)

  • 잡초 잡초
  • 241
  • 0

첨부 1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갈 2:11~21)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해서 결국은 죽음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태어날 때는 그 순서에 따라 태어나지만 가는 길은 순서가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모든 것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가 두렵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에 죽음 이후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애써 부인해 보려고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비켜갈 수도 없는 것이 바로 그 길입니다. 

생로병사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늙지 않고 젊음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을까 궁리하고 고민해보지만 그래서 나름대로 대책을 세워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병으로 인해 어려움들도 겪고 하루하루 늘어가는 주름살을 보며 한숨을 지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요 그러다가 죽음의 문턱에 다다를 수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죽으면 그만이라고 하면서도 이율배반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그 모습도 봅니다. 

죽으면 그만이라면서 제사는 왜 드리는 건지요? 결국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그런 모습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죽은 다음 그렇게 제사 밥을 얻어먹으러 다녀야 될 귀신 되어 구천을 떠도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귀신은 어디까지나 사탄의 졸개일 뿐 사람은 죽은 다음 곧바로 지옥 아니면 천국으로 그 길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지옥과 천국이 있음을 인정한다면 그 다음 문제는 어떻게 지옥이 아닌 천국으로 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래도 모두가 다 바르게 살았다고 할 정도가 된다면 선을 행하며 산다면 천국을 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그런 사람이라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그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먼저 기억할 것은 바른 삶으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도덕이라는 기준을 세워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회가 정한 도덕률에 적당하게 산 그런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참으로 좋은 사람, 그 사람은 참으로 의인이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 그런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면 그분은 생전에 참으로 의롭게 살았기 때문에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것이라고 하면서 위로를 합니다. 그럼 그래서 좋은 곳으로 가셨다면 왜 상청은 차려 놓는 것인지 왜 제사상을 차려 놓고 시간마다 음식을 올려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뭡니까? 그게 아니라고 하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첫째가는 제자를 꼽으라면 당연히 베드로 사도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베드로 사도에게도 잘못한 것이 있어서 바울이 베드로를 마주보면서 나무랐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습니다. 그래 이방인들과 한 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때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들이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먹는 것을 그만두고 그 자리에서 물러갔습니다. 그것은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과 함께 먹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이방인들과 같이 먹는 것을 보게 된다면 비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게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거짓된 행동을 했고, 다른 유대인 성도들도 그에 따라 그 자리에서 물러가는 거짓된 행동을 했습니다. 심지어 바나바조차 그들의 거짓된 행동에 유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의 교제라고 하는 것이 엉망이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베드로를 향해 “베드로여, 당신은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처럼 살지 않고 이방인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처럼 살라고 합니까?” 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연약한 사람들의 한계입니다. 

나는 바르게 살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난 받을만한 그런 일들을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바울 사도가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나는 마음대로 고기도 먹을 권한이 있지만 그런 나로 인해서 시험을 당하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고기조차 먹지 않겠노라.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당시는 대개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이방 신전에 바치기 위해서 잡은 고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당연히 우상의 제물입니다. 그것을 다시 시장에 내다가 파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아닌 것도 있겠지만 누구라도 시장에서 파는 고기라면 당연히 먼저 제물로 드렸던 고기라고 생각할 만합니다. 그러니 그것을 보는 사람이 어떻게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하면서 마음에 시험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연약한 믿음의 사람들 때문에라도 고기조차 먹는 것을 삼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런 바울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비난받을만한 그런 일들이 없겠습니까? 물론 아니겠죠. 결국 주님의 은혜 가운데 바르게 살라고 가르치는 제자들조차도 이렇게 비난받을 만한 일이 있습니다. 그건 우리들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교회 다니는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고개조차 들 수 없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천국을 이야기할 수 있느냐고도 합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행위로는 구원 얻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의인이 있는가 하여 찾아보았더니 한 사람도 없다고요. 그래요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죄 가운데 잉태되어 죄인으로 세상에 왔습니다. 그래 내가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바르게 살려고 해도 결국 여전히 죄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치 게가 아무리 바로 걸어보려고 애를 써도 결국 옆으로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이 게의 한계입니다. 아무리 가르치고 훈련해도 바로 걸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쳐도 하나님의 말씀처럼 120년을 넘길 수가 없습니다. 결국 불로초를 구해 온 세계를 뒤졌던 진시황도 죽었습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죽음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나갈 뿐입니다. 영생의 길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죄 가운데 태어난 사람들로서는 잠시 세상에서 살다가 죽어 지옥으로 가게 될 뿐입니다. 거기에는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배웠어도 안 되고 아무리 천사처럼 산 사람이라도 안 됩니다. 더군다나 사람들의 의라고 하는 것이 사람들의 기준으로 볼 때 선한 것이지 하나님이 기준으로 볼 때는 턱없이 악할 뿐입니다. 한 마디로 기준 미달입니다. 

내가 아무리 잘 해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합격이라고 말하기 전에는 소용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기준에 죄값은 사망이요 그 다음에는 심판이 따를 뿐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어릴 때부터 악할 뿐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대로는 안 됩니다. 특별한 조치가 없이는 천국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을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하신 하나님께서 그래서 새 길을 열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새 길이 무엇입니까?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울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방인, 곧 죄인이 아니라 유대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죄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랍니다. 결국 무슨 말입니까? 유대인들은 결코 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율법을 지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계속해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하지만 우리는 율법을 따른다고 해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었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이지,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 아닙니다. 율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여김을 받지 못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 율법을 지키고 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당연히 자기들은 의롭다고 아니 하나님이 자기들을 의롭게 여기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 율법을 지켰다고 해서 의롭다고 여김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지 아무리 율법을 지킨다고 해도 아무리 나름대로 선하게 산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도록 열어 놓으신 길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를 믿으면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습니까? 죄의 값은 사망인데 그 죄 값을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내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죄값을 대신 치르셨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됩니다. 더 이상 죄값을 치를 일이 없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문제는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그게 믿음의 능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불 뱀을 보내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뱀에 물려 죽어가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이를 보고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살려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구리로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매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시는 말씀이 누구든지 그 구리 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살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니 뱀에게 물렸는데 해독을 해야지 그냥 장대 위의 구리 뱀을 쳐다본다고 어떻게 살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그 말씀을 믿고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다 살아났습니다.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십자가가 나를 위한 십자가라고 믿기만 하면 그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을 믿기만 하면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신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열어놓으신 길입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이게 바로 믿음의 능력이요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길입니다. 우리는 다 그 약속의 말씀을 따라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은 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영생을 받은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사신 예수님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된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흔들림 없이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의롭게 살아가야 합니까?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내 몸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구하시려고 자기 몸을 바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내가 내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마땅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사시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살도록 이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말씀을 벗어나게 되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탄식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탄식이 내 마음을 두드립니다. 몇 걸음 엉뚱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냥 그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내 안의 예수님이 계속해서 내 마음을 두드리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차를 몰고 가는데 요즘 내비게이션이라고 하는 것이 길을 안내하지 않습니까? 목적지를 설정해 놓고 가다가 엉뚱한 길로 갑니다. 그러면 바른 길을 다시 설정하면서 그 바른 길로 가도록 다시 안내를 시작합니다. 내가 원하는 목적지로 가려면 그 안내를 따라야 합니다. 그 안내를 따르지 않으면 엉뚱한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다가 속도위반이라도 하면 어떻습니까? 계속해서 시끄럽게 떠들어댑니다. 속도를 줄이라고 계속해서 띵똥합니다. 아주 대놓고 말하는 내비게이션도 있습니다. 그래도 안 줄이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벌금을 물게 되겠죠?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사람이 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를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로 하여금 바른 길로 가도록 마음에 감동을 주시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를 책망하십니다. 어려움을 주십니다. 그러니 견딜 수가 없습니다. 결국 다시 바른 길로 갈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하지만 반대로 말씀을 따라 바른 길을 따라 살아가게 되면 상급이 있습니다. 복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의롭게 살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이제 우리가 바른 길로 가며 의롭게 사는 것은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받은바 은혜에 감사해서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 영생을 얻은 의롭다 함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당연한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미국에 가서 산다고 합시다. 미국에서도 영어를 쓰지 않고도 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여러 가지로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영어를 배워야 되고 영어를 써야 됩니다. 그게 거기서 편하게 살 수 있는 비결 중 하나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천국 백성이 되었기에 천국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미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의로운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의롭게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니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살 수밖에 없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 마음도 편하고 몸도 편하고 삶도 더 좋아집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니 결과도 뻔한데 굳이 아니라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굳이 어깃장 놓아가며 불편하게 살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차가 있는데 불편하게 걸어갈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건강을 위해 운동 삼아 걸을 수는 있겠죠. 

그런데 가까운 거리가 아닌 예를 들어 발안에서 수원을 간다고 합시다. 누구라서 그 길을 걸어가겠습니까? 당연히 차를 타겠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바로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른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또한 자연스럽게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드러나게 됩니다. 내게서 향기가 퍼져나가게 됩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입니다. 냄새가 나게 되어있습니다. 김치를 먹었는데 당연히 김치 냄새가 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었기에 내게서 예수 냄새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안 날 수가 없습니다. 그 예수님을 아는 냄새가 바로 우리의 바른 삶입니다. 선행입니다. 그렇게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안 살고는 견딜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로 그런가 한번 내 멋대로 살아보자고 하시겠습니까? 그것처럼 미련한 일은 없습니다. 부산에 간다면 몇 날이 걸리던 걸어서도 갈 수 있겠죠? 하지만 미국이라면 걸어서 갈 수 있나요? 배 아니면 비행기 밖에 더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는 당연히 예수님과 함께 살도록 되어져 있습니다. 그 삶의 모습은 당연히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바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는 못한다고요? 아니요 결국에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별짓 다하면서 살아보려고 해도 그건 불가능합니다. 이제는 그렇게 살 수가 없게끔 되어있습니다. 왜요?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버티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오직 말씀대로 은혜 아래서 사십시오. 그러면 자연스럽게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선은 베푸는 모습으로 드러나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하나 된 저와 여러분이 또한 그 예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베푸는 자로서의 귀한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려운 일만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자녀답게 살도록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 주십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를 깨우쳐 주십니다. 그리고 필요한 모든 능력도 주십니다. 

그러기에 내 힘으로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나의 능력이 되어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그대로 따르십시오. 가장 편한 길이 바로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먼저 받았습니다. 그 받은 것으로 다시 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손이 비게 된다고요? 아니죠. 주님이 다시 채우십니다.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린 아이가 더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먼저 감사하십시오. 찬양하십시오. 그리고 끊임없이 주는 자 베푸는 자로서 사십시오, 그러면 더 풍성해질 것입니다. 이 귀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오늘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