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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예수의 좋은 군사 (딤후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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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좋은 군사 (딤후 2:3~4)


제가 군복무를 할 때에 모든 군인들이 줄줄 외웠던 '전투수칙'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육군이라면 그 어떤 전투 상황에서도 절대로 잊어 먹거나 틀리면 안 되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원칙을 6가지로 요약한 것으로서 

"1. 나의 임무는 북괴군 격멸에 있다. / 2. 나는 초전에 적을 박살내겠다. / 3. 나는 공격전에 선봉이 되겠다. / 4. 나는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겠다. / 5. 나는 야간전투의 승리자가 되겠다. / 6. 나는 단 한발의 탄약도 아끼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전투수칙'을 평소에 철저히 숙지시켜 놓음으로써 총알이 날아가고 포탄이 터지는 등 정신없는 실전 현장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아예 본능적으로 각개 병사로서의 역할을 완수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기독신자는 일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는 '구원인'이 되어야 하며, 그처럼 구원의 확신이 분명한 신자는 필연적으로 '사명인'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명인'을 일컫는 별명들 중에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것들이 바로 '일꾼'과 '군사'입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명칭이 강조하는 바는 좀 다릅니다.
'일꾼'은 어떤 '생산적인 목표의 성취'를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자로서 여럿이 협력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혼자서 일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군사'는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적과 대항해서 싸우는 자로서 반드시 자기 전우들과 함께 싸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기독신자들이 '전투하는 지상교회'에 속해 있는 '군사'로서 과연 어떤 자세로 우리의 원수인 사단과 맞서 싸워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 민족은 이 짧은 100여 년의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서도 실로 맹렬한 싸움들을 싸워야 했으며 특히 지난 '8.15광복'은 그런 실전을 통하여 얻은 승리의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아직도 분명히 남아 있고 또 어느 한순간에 엄습해 올지 모르는 미래의 영적 싸움을 대비하는 마음으로,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각개 병사들이 꼭 숙지하고 실전에서 발휘해야만 할 '영적 전투수칙'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의 좋은 군사'는 그 어떤 고난이 닥쳐도 전우애로써 극복해 냅니다. 

이것이 일반 군대의 군사와 꼭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군사에게도 전장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철칙인데, 바로 그것을 두고 본문 3절에 "3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전파의 사명을 군대의 경우를 들어서 자주 비유했는데, 그 이유는 두말할 필요 없이 이 둘 사이에 유사점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와 함께 복음전파의 동역자 된 디모데를 두고서도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라고 했습니다. 

바울 본인이 이 디모데후서를 쓸 당시에 당하고 있던 현실은 그야말로 전투에 임한 군사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는 평생 '선한 싸움'을 끝까지 잘 싸우고 이제는 마지막으로 자기 목숨까지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어 순교의 제물로 바칠 각오가 된 가운데서 투옥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적어도 자신을 '그리스도의 군사'로 생각할 줄 아는 바울에게 있어서는 당연히 겪어야 할 "고난"이었습니다. 

하지만 말이 간단해서 '고난'이지 하늘 아래 어떤 군사도 그런 죽음의 공포를 간단히 이겨 낼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군사에게는 '전우'가 필요한 것입니다.
서로의 목숨을 자기 목숨처럼 아껴 주는 '전우애'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전우의 의리'가 그 어떤 죽음의 위험 앞에서도 서로에게 용기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역시 무슨 '강철 같은 심장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불사조 같은 초인'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평소에는 그저 대중 앞에 서기만 해도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던"(고전 2:3)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바울도 디모데처럼 '자기와 함께 고난을 받는' 복음의 전우가 있다는 사실에 늘 스스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군사에게는 옆에 같은 동료 군사, 즉 전우가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대장 밑에 병사 하나만 있는 군대는 하늘 아래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동료 군사끼리의 전우애라는 것은 적어도 혈연을 제외한 나머지 일반 세상사람 사이의 관계들 중에서는 최고로 끈끈한 것입니다.
  
원래 아무 상관없던 사이, 혈연은 물론 학연이나 지연이나 친구 사이도 전혀 아니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그처럼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자기를 죽이려는 적군을 같이 맞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실전처럼 극심하게 훈련시킨다 해도 어쨌든 훈련소와 실제로 총탄과 포탄이 오가는 전장은 천양지차입니다.
지금 고개 한 번 잘못 내밀었다가는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공포가 순식간에 온 몸을 엄습하게 되는 곳이 실전의 현장인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곁의 전우가 부상당하거나 죽게 되면 남아 있는 병사는 그야말로 눈이 뒤집히고 자기 몸을 사리지 않고 적군을 향해 사격하고 돌격하게 됩니다.
전우애란 기름이 적군에 대한 증오심에 걷잡을 수 없는 불을 질러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군사들 사이의 의리는 혈연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게 되고, 전장에서의 전우는 자기 친형제보다도 서로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며, 군사들은 바로 그런 전우애가 불 질러 주는 용기와 힘 때문에 용감히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전우애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전선에서 이탈하는 탈주병은 같은 편이라도 쏘아 죽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서로의 목숨을 의지하는 관계에서 한쪽이 도망치는 것은 자기만 사는 것이 아니고 다른 전우를 죽게 만드는 최악의 배신이기 때문에, 비록 조금 전까지 나와 같은 참호 속에 있던 동료라 할지라도 진지를 벗어나 탈주하면 그 도망치는 동료의 등을 자기 총으로 반드시 쏘아 죽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택동의 인민군도 일제의 침략 앞에서는 장개석의 국민군과 같이 싸웠습니다.
프랑스나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해 들어갔을 때에 내전 상태에 있던 러시아 사람들도 그 전쟁을 잠시 접어두고 공동전선을 형성하여 이 외적을 대항해서 싸웠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공동의 적을 맞이하여 같이 죽든지 아니면 같이 살든지 하는 전우의 관계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다 함께 그리스도의 군사 된 자들이라면, 바로 이런 영적 전우애를 서로 뜨겁게 발휘하고 의리 있게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공동의 적을 맞이하고 있는 같은 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으면 아니 됩니다.
바로 사단이 우리의 영원한 대적입니다.
이 '악한 용'과 그의 졸개 '마귀'들과 그의 사주를 받은 '짐승'들이 우리 기독교의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사실에 대하여 공감할 줄 알아야만 진정한 전우애 즉 '기독교의 단합'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일제가 천황숭배와 신사참배를 가지고 조선의 기독교를 탄압해 왔을 때 바로 이런 '전우'와 '배신자'가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충격적이었던 것은 '전우'의 수는 알고 보니 극히 소수였고 '배신자'의 수가 오히려 절대다수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평화시대에는 모두 다 '같은 교회'요 '같은 목사'요 '같은 기독교인'처럼 보였지만 일단 사단이 칼을 빼어들고 덤벼들면서 실전상태에 들어가게 되니까 이 '전투하는 지상교회'에서 진짜 같은 편에 남아 있는 신자와 목사가 누구인지가 백일하에 드러났던 것이었습니다.

1938년 9월 9일에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27회 장로교 총회는 100여 명의 일본 경찰들이 193명의 총대들 틈에 앉아서 삼엄한 감시를 펼치는 가운데 미리 짜 놓은 각본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한 총대가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인정하자'는 동의를 하고 재청이 들어오자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의제에 대한 토론도 없이 즉시 가부를 물었습니다.
  
겨우 몇 사람이 "예"라고 대답했지만 총회장은 반대 의견은 묻지도 않고 황급히 가결을 선포했으며 곧 이어 총회 서기는 준비해 두었던 대로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 의식임을 자각하여 이에 솔선 여행(勵行)"하기로 하는 성명서를 낭독했습니다.
  
한부선 선교사를 비롯한 몇 명의 총대들이 불법이라고 항의했지만 묵살되었고,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를 비롯한 23명의 총대들은 총회가 끝나자마자 평양의 신사로 직행하여 참배를 했습니다.
  
바로 그 직후 전국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회들이 이 조선예수교장로회를 탈퇴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장로교회가 처음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던 것이며, 주기철 목사, 이기선 목사, 한상동 목사, 주남선 목사 등이 일본 경찰의 온갖 탄압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참된 신앙을 사수하면서 소수의 참된 신앙운동을 이끌어 나갔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에 와서는 그처럼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목사들이 오히려 '한국장로교회를 분열시킨 장본인'이라고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주객전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적군이 공격해 왔는데 대항해서 싸우기는커녕 비겁하게 백기를 들고 항복했던 자들, 아니 오히려 그 원수의 앞잡이 노릇에 발 벗고 나섰던 '배신자'들이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싸웠던 '예수의 좋은 군사'들에게 거꾸로 욕을 퍼붓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신사참배 탄압 이전까지는 하나였던 우리나라의 장로교회가 그렇게 나누어지게 된 것이 정말 적군에 대항해서 싸웠던 '용감한 군사'들의 책임이겠습니까 아니면 '전우'들까지 팔아넘긴 '배신자'들 때문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배반하고 성경 말씀을 거역하고 교회와 동역자들과 성도들까지 배반한 그 극심한 죄를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네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하여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분열주의자'라고 몰아붙이는 소위 목사나 신학자들이라 하는 자들의 한심한 작태에 저는 그저 말문이 막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전우의 의리'조차 지킬 줄 모르는 자들이 어떻게 '같은 편'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오늘날 한국교회는 공산주의라는 또 하나의 적군과 대치하고 있습니다.
일제 때와 꼭 마찬가지로 이 전장에서도 '전우'와 '배신자'는 극명하게 구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2천만 인민 위에 신격화시켜 놓고 온갖 탄압과 악행을 일삼고 있는 김정일에게 머리를 숙이고 악수하고 아양을 떨고 있는 목사들이야말로 저 일제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목사들의 전철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는 '배신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오직 '소수의 참된 전우'들은 끝까지 이 싸움을 잘 싸우고 또 반드시 승리하고 말 것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의 군사들에게는 필연적으로 닥치게 되는 '고난'을 받는 중에도 '서로의 생명이 결탁되는 전우애와 의리'를 끝까지 지킴으로써 참된 기독교의 공동의 적을 맞아 싸우는 전장에서 피차 용기와 힘을 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의 좋은 군사'는 대장이 맡긴 임무를 목숨을 바쳐서라도 완수하고야 맙니다. 

그런 전우애는 그저 서로를 격려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반드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해 내는 결과로 이어져야 하는데, 바로 그것을 두고 본문 4절에 "4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군사로 모집한 자"는 곧 대장입니다.
군사로서 그 대장을 기쁘게 하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명령에 대한 절대 복종과 그 명령에 따라 주어진 임무를 반드시 완수해 내는 것뿐입니다. 
이것 또한 일반 군인들이나 그리스도의 군사나 공히 지켜야 할 최고의 전투수칙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임무 완수를 위해서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여유라는 것이 조금도 있을 수 없음이 또한 당연한 일입니다. 
  
명령이 내려지면 집에 휴가도 못 가고 전선을 지켜야 할 뿐이며, 일단 임무가 주어지면 고향의 가족에 대한 생각까지도 접어두고 그 임무 수행에만 전념해야 하며, 그 임무 완수를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을 내 놓는 것도 불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제대로 된 군사의 당연한 자세인 것입니다.

영국의 넬슨 제독은 저 유명한 트라팔가 해전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 해군과 조국의 명운을 건 일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영국 함대는 프랑스 함대에 비해서 1대 2의 수적 열세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질 수는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그처럼 불리하기만 한 상황에서 그러나 무조건 반드시 이겨야만 할 일전을 앞에 두고 넬슨 제독이 유일하게 믿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부하들 한 사람,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투에 돌입하기 직전에 자기가 타고 있던 기함 빅토리 호에 이런 내용의 신호 깃발을 올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말, "영국은 각자가 자신의 의무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기대한다."(England expects that each man will do his best.)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전장에서 넬슨 제독이 믿을 수 있는 사람, 아니 사실 다른 아무 믿을 사람이 따로 없는 가운데, 그가 믿어야만 할 사람은 바로 자기 부하들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하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만을 다해 주면 그 전투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저는 우리 대장 예수님께서도 이 전투하는 지상교회 안에 혹은 목사로, 혹은 장로로, 혹은 집사로, 혹은 평신도로 각각 배치를 시켜 놓으시고, 똑같은 기대를 가지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무도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직분에 충성을 다하여 당신의 왕국 교회를 지켜 낼 것이라고, 그렇게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다함으로써 자신을 모집한 대장을 기쁘게 해 줄 것이라고, 우리 주님 역시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같은 기대를 하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에서 주님께서 나에게 목사로, 전도사로, 선교사로, 신학교수로 각각 임무를 맡겨 주셨으면, 그 위치는 바로 나 자신이 지켜내지 아니하면 그대로 뚫릴 수밖에 없는, 아무 보충병도 없는 자리처럼 생각하고 목숨을 걸고 지켜 내야 할 뿐인 것입니다.

저는 목양실의 제 자리에 앉게 되는 순간순간마다 바로 그런 감동이 새롭습니다.
그 자리는 보통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자리가 '경향교회 당회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자리여서가 아니라, 그 자리 하나는 바로 저만 앉을 수 있고, 그 자리에 앉은 사람으로서 제가 반드시 해야만 할 사명이 있고, 만일 제가 그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면 제 대신 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침 조회 시간에, 혹은 주일 아침에 그 자리에 앉게 될 때마다, '주님, 이 자리에 따른 사명을 제대로 완수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떨리는 각오와 기도와 함께 앉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부교역자들에게도 꼭 같이 가르칩니다.
목양실에서 자신의 명패가 붙어 있는 자리, 교육국에서, 선교부에서 자신의 이름과 직책이 붙어 있는 자리, 그 자리에 매일 아침 그냥 습관적으로 앉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각 자리들은 보통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는 바로 대장되신 예수님께서 바로 그 부목사, 바로 그 강도사, 바로 그 전도사 한 사람에게 주신 고유한 임무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바로 내게 맡겨진 사명은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지켜내어야 합니다.
중대장이 전선을 형성하고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각 소대장에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그 소대가 지켜야 할 것인지 임무를 부여하고 나면, 중대장은 일일이 뛰어다니면서 직접 진두지휘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 할당된 구역만큼은 오직 그 소대장이 책임지고 막아야 할 뿐입니다. 
만약 어느 한 소대장이라도 자기의 위치를 사수하지 못하여 뚫리면 역시 그 부대 전체가 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대장 되신 예수님께서 제게는 경향교회라는 전선을 완전히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경향교회의 전선을 교구와 구역과 교육부서 등으로 나누어서 각 부교역자들과 또 평신도 직분자들에게도 맡깁니다.
일단 그렇게 각 지휘관들과 각개 병사들에게 임무가 주어지고 나면 이제 남은 것은 바로 자기가 서 있는 자리를 죽을 때까지 지키는 일밖에 없습니다.
대장되신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나 한 사람에게 맡기신 사명, 나를 충성되이 여겨서 믿고 맡겨 주신 사명, 내가 못 지키면 전열에 구멍이 생기면서 아군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는 그 절대적 사명을, 바로 그 강단에서, 그 선교지에서, 그 찬양대석에서, 그 주일학교 교실에서, 그 구역예배가 모이는 자리에서, 그 기도의 골방에서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완수해 내어야 하는 것이 바로 '평화시대를 사는 순교자의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앞에서 언급했던 대로 제27회 총회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일제에 굴복한 교회와 목사들은 그 이후로 예배드리기 전에 먼저 일본 천황이 있는 동방을 향해 경례를 했고 '황국신민의 선서'라는 것을 제창했으며, 제31회 총회의 일정표는 총회 본연의 회무는 간 곳 없고 그 대신에 평양의 신사부터 먼저 참배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시국강연이니 국방헌금이니 하는 순서들로만 짜여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일제는 목사들로 하여금 모세오경과 다니엘서, 요한계시록 등 이스라엘의 역사와 하나님의 왕적 주권을 많이 언급하고 있는 성경책은 보지 못하게 했으며 나중에는 아예 설교본문을 신약의 사복음서에서만 택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1945년에는 국내의 모든 기독교회 교단들을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이라는 명칭 하에 통합시켰고 7월 20일에 김관식 목사가 이 통합교단의 통리로 취임했으며, 그럴 즈음에 50여 명의 목사들은 서울의 한강과 부산의 송도 앞바다에서 일본의 '간누시'(일본 신사의 신관)들에게서 소위 '미소기바라이' 즉 일본 신도(神道)의 세례까지 받는 추태를 버젓이 자행했던 것이었습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일제의 신사참배에 항거하던 목사와 성도들은 그들이 주님께로부터 명령 받은 자리를 끝까지 사수함으로써 '진짜 순교자'들과 '살아 있는 순교자'들이 되었습니다.
1940년 7월에 일본 경찰은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전국적으로 일제히 검거하여 약 2,000여 명을 체포했고 그 가운데 70여 명이 장기 복무를 하다가 50여 명이 끝내 순교하였으며 나머지는 해방과 더불어 출옥했습니다.
그 대부분의 신사참배 반대자들은 다 보수적이며 개혁주의적인 신앙을 소유한 장로교회 신자들이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으며 신앙과 생활의 절대 표준으로 받아들였으며, 그런 까닭에 신사참배는 십계명 제1계명과 제2계명에 위배되는 어김없는 우상숭배인 줄로 알고 끝까지 거부했던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대장의 명령을 자기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려 하는 자세는 '순교한 군사'나 '살아 남은 군사'나 다 같은 것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출옥성도 주남선 목사님 같은 분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마 6:24)는 말씀을 자주 강조했고, 끝내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도 당신의 일기에서 "내가 예수님을 위하여 마땅히 겪어야 할 핍박을 피한다면 장차 주님 앞에 설 때 내가 어떻게 주님의 낯을 대할 수 있을까? 주님께서 '내가 너희에 물려 준 십자가는 어디에 벗어 두었느냐?'하고 물으시면 나는 무엇이라고 대답할까?"라고 썼던 것은, 양자가 똑같은 '전투수칙'을 따라 끝까지 선전분투한 '좋은 군사'들이었음을 잘 보여 주지 않습니까? 

이처럼 제대로 싸운 지상교회에는 필연적으로 부상자나 전사자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출옥성도나 순교자를 낸 교단은 결코 무슨 '독선주의자'들의 집합이 아니라 정말 충성스럽게 잘 싸운 명예로운 군사들이었음이 분명할 뿐입니다.
오직 싸우지 않고 도망친 교회, 아니 오히려 적과 동침했던 목사들에게서는 순교자가 나올 리 없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은 그들이 사실은 '예수의 좋은 군사'가 결코 아니었음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증거였던 것입니다. 

물론 순교는 신자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지만 꼭 다 죽어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대장의 명령에 복종하면서 언제든지 죽을 각오로 싸우는 '그리스도의 군사'는 사실상 '살아 있는 순교자'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싸우다가 살든지 죽든지 하는 것은 오직 주님 뜻에 달려 있는 줄로만 알고 이처럼 우리에게 '반시 동안의 고요함'을 주시는 동안에도 '평화시대를 사는 값을 하는' 순교적인 신앙으로써 우리의 대장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준행하며 각자에게 주어진 귀중한 사명을 필히 완수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언젠가 누군가가 "찬송가에서 '분투와 승리'의 곡들을 다 빼내어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분이신데 그런 찬송가를 부르면 그 예수님을 싸움꾼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주적 개념'을 흐려 놓음으로써 "나의 임무는 북괴군 격멸에 있다."는 '전투수칙 제1조'를 무색하게 만들고, '선제사격 금지'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나는 초전에 적을 박살내겠다."는 '전투수칙 제2조'를 오히려 금지시켜 버린 어떤 대통령과 꼭 같지 않습니까?
  
그 사람도 명색은 기독교인이겠지만 적어도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조차 읽지 않았든지 아니면 믿지 않고 있는 사람임에 또한 틀림없습니다.
  
바로 그래서 빌립보서 1장에서도 '같은 믿음'은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같은 고난"에는 동참하지 않는 교인이 있으며 '같은 복음'은 전파하고 있는 것 같지만 "같은 싸움"은 하지 않는 교회가 분명히 있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투하는 지상교회의 대장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은 이미 '그리스도의 군사'는 절대로 아니며 오직 탈영병이나 배반자나 스파이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같은 고난'을 나눌 줄 모르고 '같은 싸움'을 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편'일 수가 있겠습니까?

'Band of Brothers'라는 영화는 미국의 101공수부대에 속한 Easy중대가 2차 세계대전 때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적진 후방에 깊숙이 공수로 투입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저 유명한 바스통 작전에서 압도적인 독일군에서 완전포위된 가운데서도 십 며칠을 사수해 내는 등 혁혁한 무공들을 세우는 전사를 담은 영화입니다. 
  
그 영화에 제일 끝에 가면, 그 이지중대의 중대장이었던 사람, 물론 그 영화를 찍을 당시에는 이미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는데, 그 본인이 나와서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그때 그 중대장은 언젠가 자기 손녀가 "Grandpa, are you a hero?"(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영웅이에요?)라고 자기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 할아버지는 실제로 미국의 최고 훈장인 은성무공 훈장까지 받은 진짜 전쟁영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는 자기 손녀딸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I am not a hero, but I served with heroes."(나는 영웅은 아니야. 하지만 나는 영웅들과 함께 싸웠단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전쟁에서 멋진 승리를 거두는 영웅은 절대로 혼자 탄생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명령 수행을 위하여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우들이 곁에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예수의 군사'들도 꼭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같이 이기고 같이 사는 군사가 되기 위해서는 대장께서 내리신 명령을 자기 목숨을 걸고 지키면서 함께 싸워야만 할 뿐인 것입니다.
  
적군의 세력이 더욱 커지고 원수의 위협이 더욱 강력해질수록,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처럼 끝까지 같은 편으로서의 전우애와 의리를 지키고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순교의 각오로 사수함으로써, 이 조국의 국운이 걸린, 아니 교회와 성도 전체의 존망과 생명이 걸린 큰 전투에서 꼭 함께 최후의 승리를 거두고 우리의 대장을 기쁘시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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