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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처음 사랑과 열정을 회복하라! (계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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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사랑과 열정을 회복하라! (계 2:1~7)

 
지난 금요일 광복절에 안 집사님네 가족이 오랜만에 부산으로 나들이를 나갔습니다.  고속도로를 타고 안 집사님이 운전을 하는데 태현이가 옆으로 지나가는 자동차를 보더니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자동차 바퀴는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안 집사님은 어떻게 대답을 해 주어야 할는지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연료가 연소되면서 발생하는 열 에너지를 기계적 에너지로 바꾸어 자동차가 움직이는데 필요한 동력을 얻지.  후륜의 경우 클러치-변속기-추진축-차동기-액셀축-후차륜 순서로 동력을 전달하여 자동차를 움직인다."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에게 이렇게 대답을 해 준다는 것은 좀 어려운 것 같아서 다시 대답할 말을 찾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밥을 먹어야 마음껏 뛰어놀 수 있듯이 자동차도 엔진이라는 곳에다 기름이라는 밥을 주게 되면 움직인다."
이것은 자상한 아빠의 대답인 것 같은데, 뭐가 좀 허전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안 집사님이 나름대로 열심히 생각을 하는데 답답했는지 태현이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자동차 바퀴는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러자 류 집사님이 단 한마디로 이렇게 대답을 끝내 버렸다고 합니다.
"빙글빙글!"

우리 인간은 자꾸만 복잡한 것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해답은 단순한 데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도 단순한 데서 시작됩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인생을 복잡하게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환경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태도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늘 건강한 인격으로 일해야 합니다.  넉넉한 성품으로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은 그 사람의 환경을 고치기 전에 삶의 태도를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있는 모든 나쁜 태도들을 버리십시오.  올바르지 못한 불경건한 삶의 태도들을 성령의 불로 태워버리십시오.
 
나쁜 태도가 불행을 만들고 좋은 태도가 행복을 낳습니다.  인간의 우수성이란 단일 행동이 아니라 바로 습관에 의해서 판명됩니다.  좋은 습관이 좋은 인생을 만들고, 나쁜 습관이 삶의 비극을 낳습니다.  좋은 습관이 행복과 기적을 낳습니다.  습관의 씨앗이 성품을 얻고, 성품은 인간의 운명을 결정 짓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건강하고 풍성한 삶을 살려면 삶의 태도부터 바꾸십시오.  부정적인 감정과 파괴적인 문제의식을 제거하십시오.  아집과 독선으로 감정의 포로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의 포로가 되십시오.  마음의 평화를 탐내십시오.  산과 같은 평정, 호수같은 안정을 가지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체질화를 옷 입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체질화된 태도는 원숙한 태도였습니다.  쾌활한 태도였습니다.  낙관적인 태도였습니다.  관용의 태도요, 개방의 태도였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삶의 선입관이나 옹고집은 금물입니다.  독선과 거만함은 우리의 건강한 인간 관계를 일그러뜨리는 가라지와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그의 생각이 그의 행동을 낳고, 그의 행동이 그의 자리를 낳습니다.  성경은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습관적으로 악인의 길을 쫓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악인'이란 뜻은 습관적으로 불경건한 자, 어리석은 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악한 자들의 말을 듣지 않아야 합니다.  그들을 본받아서도 안됩니다.  그들이 걸어가는 길에 서 있지도 말아야 됩니다.  생각이 거만하고 거짓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언제나 그의 생각이 경건해야 됩니다.  그의 삶이 경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경건한 자의 삶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경건한 자를 축복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무엇을 묵상하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런 행동이 나옵니다.  돈만 묵상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구두쇠 같은 인색한 행동이 나옵니다.  땅의 것만을 묵상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옹졸하고 거짓되고, 편협된 행동이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위엣 것을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은총의 열매를 묵상하고 하늘의 계시를 깨닫고 항상 즐거워하면,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마음이 달라지고 인생관이 달라져서 복을 받게 됩니다.  인생의 행복과 불행, 가치와 보람을 좌우하는 것은 환경에 있지 않고 우리 마음과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 주변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한없이 찌그러뜨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찌그러뜨리는 기계는 '미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향하여 미움과 원망, 시기와 질투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준 인생을 찌그러뜨리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미워하면 미움을 받는 사람보다 미워하는 사람의 마음이 더 삭막해집니다.  사단은 우리의 마음에 미움이라는 가라지를 던져서 우리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미움은 행복한 삶을 가로막는 장애물입니다.  미움은 우리 마음에 평안을 빼앗아갑니다.  때문에 미움과 분노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사단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인생을 한없이 팽창시키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팽창시키는 기계가 바로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도 멍청해지고, 영리한 사람도 바보가 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논리나 상식을 초월합니다.  사랑은 이성의 능력도 마비시킵니다.  사랑은 모든 위선의 탈을 여지없이 거부합니다.  인간이 가진 능력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은 사랑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랑으로 정복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사랑은 순수한 사람들만이 찾을 수 있는 숨겨진 하늘의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온 영혼에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의 축복을 탐내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때문에 사랑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임재하심을 경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정복당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아직도 미움의 씨앗이 자라고 있다면 그는 온전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하나님의 사랑에 정복당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온전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사랑에 정복당한 사람은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저는 어떤 사람이 믿음이 좋은지 잘 모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믿음이 좋지 않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공통점 한 가지가 있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부드럽습니다.  대게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은 얼굴이 부드럽습니다.  그리고 말하는 것을 보면 언행이 부드럽습니다.  성품이 부드럽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은 딱딱합니다.  얼굴이 딱딱합니다.  말하는 언행이 딱딱합니다.  결국 이것은 사랑의 있고, 없음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주님의 사랑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끊임없이 남을 미워하고 자신을 미워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찾아오시면 나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서 딱딱한 인생이 부드러운 인생으로 변화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실한 사랑에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사랑은 말장난이나 유희가 아닙니다.  사랑은 학문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단순한 자선 사업도 아닙니다.  사랑은 그냥 사랑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사랑은 온유한 것입니다.  온유하다는 말은 친절하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을 살아가면서 온유한 것 이상 편리한 것은 없습니다.  온유하게 살면 참으로 편한데 강하게 사니까 힘이 드는 것입니다.  성경은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온유한 사람이 되십시오.  그래서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세상에서 사랑만큼 편한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면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무례히 행동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자신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성내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을 덮어 줍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을 믿어줍니다.  사랑에는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생명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능력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피차 서로가 사랑을 나누는 일에 인색하지 마십시오.  더 많은 사랑을 나누지 못함에 안타까워하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도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예수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사실을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벗을 수 없는 예수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이 옷을 벗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올 때에만 이 옷을 입으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매일 매일의 삶에서 예수의 옷을 입고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여러 벌의 옷을 준비해 두었다가 교회에서는 예수의 옷을 입고 교회당을 벗어나는 순간 편리한 대로 이방인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다중인격의 사람들은 아닌가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옷을 입고 살아간다는 것은 사랑의 옷을 입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옷을 입고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에베소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마디로 에베소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은 아주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먼저, 에베소 교회는 아주 열정적인 교회였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안다"고 하시면서 그들의 수고를 칭찬하셨습니다.  여기서 수고란 부지런한 노동을 의미합니다.  기진맥진하기까지 하는 노동, 혹은 격렬하게 힘을 소모시키는 노동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고 힘든 일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그만큼 활동적인 교회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모든 성도가 무엇인가 바쁘게 수고하였습니다.  그들은 부지런했으며 양심적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의 행위를 안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에베소 교회는 입술로만 '주여, 주여'하는 그런 형식적인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듣고 행함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더구나 행하기 쉬운 말씀만 행하는 교회가 아니라 스스로 지켜 행하기 어려운 말씀도 지키려고 애쓰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에베소 교회는 인내할 줄 아는 교회였습니다.  교회를 섬기다가 있을 수 있는 웬만한 고난과 어려움 쯤은 쉽게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아주 작은 사소한 문제 때문에 교회가 시끌벅적하고 흔들리는 그런 나약하고 힘없는 교회는 적어도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현지인들의 강렬한 핍박과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에베소는 황제 숭배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때문에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민들에게 미움을 당하는 것과 공개적으로 푸대접을 받으며 개인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교회를 굳건히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어떤 교인들은 고객을 잃고 사업이 어려워졌습니다.  수많은 장사꾼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물건을 팔려 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교인들은 시장을 보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황제나 혹은 다이아나를 숭배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회적인 추방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신체적인 폭행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환난에도 불구하고 에베소 교인들은 주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향해서 칭찬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안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을 뒤로 미루지 아니하고 즉시 행하는 아주 성실한 교회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가 어느 교회처럼 게으르지 아니한 교회라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에베소 교회는 영적인 분별력이 높은 교회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거짓 사도들에게 속지 아니하고 저들의 잘못을 드러내고 진리를 지켰던 신앙의 수준이 높은 교회였습니다.
 
한마디로 에베소 교회는 흠잡을 것이 없는 자타가 공인하는 아주 모범적인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모범적인 교회의 모습이 과거의 모습이 아니라 말씀이 기록될 당시 현재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고 보면 에베소 교회가 얼마나 멋있는 교회입니까?  얼마나 우리가 닮고 싶어하는 교회입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 교회에는 아주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본문 4절의 말씀입니다.  본문 4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 교회는 분명히 모든 면에서 모범적인 교회인 것처럼 보입니다.  교인들은 힘에 지나도록 봉사로 바빴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고난 중에도 참았습니다.  교회 안에 가만히 침투해 들어오는 이단을 막으면서 신앙의 정통성도 지켰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셨습니다.  그것은 처음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에베소 교회의 모습 속에서 처음 사랑이 없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모든 면에서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였습니다.

여기에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에베소 교회에도 예전에는 사랑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부터 사랑이 없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랑이 충만했던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 20장 36절 이하에 보면, 바울이 밀레도 섬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합니다.  그리고 헤어질 때에 장로들과 바울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합니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은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눈물의 이별을 했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없으면 못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특별히 목회자를 깊이 사랑했습니다.  성도들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사랑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때로부터 40년이 지난 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렇게 사랑이 충만한 에베소 교회가 40년이 지나서는 차디찬 얼음 같은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처음 사랑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 속죄받은 구원의 감격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설교 말씀을 들을 때마다 가슴을 울리던 그 감격이 사라졌습니다.  회개의 눈물이 사라졌습니다.  교회 올 때마다 설레이는 가슴, 뜨거운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주를 향한 믿음이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들의 교회 안에 아무리 놀라운 믿음의 역사가 힘차게 일어나고 있다고 할지라도 사랑의 사역을 잃어버리고 나면 지금 우리는 사단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역 가운데 중요한 첫 번째 사역은 사랑의 사역입니다.  두 번째 중요한 사역도 사랑의 사역입니다.  세 번째 중요한 사역도 사랑의 사역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중요한 목적은 이 사랑의 사역을 감당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고린도 교회의 모습에서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한마디로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일어나는 교회였습니다.  교회 안에는 방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언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병을 고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각양의 성령의 은사들이 뜨겁게 역사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열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문제를 세상 법정에 끌고 갔습니다.  이러한 고린도 교회를 보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방언을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산을 옮길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준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일이다.  설령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가 화형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사랑이 없는 교회, 사랑이 없는 성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바로 이 말씀에 해당되는 교회였습니다.  저들에게는 행함이 있었습니다.  주를 향한 수고와 인내가 있었습니다.  말씀을 통한 정확한 영적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주를 위한 순교의 정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행위 속에는 가장 중요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연약한 형제의 아픔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의 모습도 나타내지를 않았습니다.  따라서 에베소 교회는 겉으로 볼 때는 참으로 모범적인 교회였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닌 교회였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랑이 없는 교회, 그 교회는 울리는 꽹과리처럼 요란한 소리만 내는 교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에베소 교회의 비극적인 모습이었다고 한다면 어쩌면 이것은 오늘 이 땅의 교회들의 초상이 아닐까요?  만약에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 그리고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 사단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서로 사랑하고 애써 하나가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구미에 맞는 한 두 사람과 인사하고 지내면 그만입니다.  교회에 너무 깊이 들어가면 서로 상처를 주고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름뿐인 교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밝히는 죽은 교회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이 없는 수고를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피곤합니까?  야곱은 라헬을 단지 사랑했기 때문에 라헬을 위해 보낸 7년의 세월이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며칠 같이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없는 수고는 고역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의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사랑이 충만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서 반드시 들어야 하는 말이 있다면 이것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다.  교회에 가니까 참된 사랑이 있더라"
 
이 시간 자신을 한 번 돌이켜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주님을 내 구주로 처음 모셔들일 때의 그 벅찬 기쁨이 있습니까?  혹여 이전에는 찬송만 불러도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그 감격이 다 사라지고, 우리의 신앙과 봉사가 기름이 떨어진 등불처럼 희미해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입술이 원망과 불평으로 점점 채워지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다면 당신은 처음 사랑의 감격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무엇보다도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면 주님으로부터 준엄한 심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을 회복하십시오.  지금은 우리 모두가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여기에서 처음 사랑은 주님에 대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원문에서는 이 사랑을 아가페적인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랑은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죽기까지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 사랑에는 요구가 없습니다.  이 사랑은 이론이 아닙니다.  그저 가슴으로 느끼고 온 몸으로 실천하는 사랑입니다.  돌아오는 것이 없어도 주님을 바라보면서 베푸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베풀면 베풀수록 더 충만하게 되지만, 베풀지 않으면 삭막한 사막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이 사랑을 회복하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다"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가 입으로는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하면서 믿음의 형제를 계속 미워하고 있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자기 눈앞에 있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사랑의 계명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마땅히 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사랑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합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의 오아시스가 되어주십시오.  우리 교회가 사랑이 없는 사막 가운데서 방황하고 있는 영혼들을 위로할 사랑의 오아시스가 되도록 힘써주십시오.

본문 5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첫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와 오늘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세 마디 간결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첫 사랑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자신을 진단하십시오.  무엇 때문에 언제부터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이 시들해졌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어디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발견하고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첫 사랑을 회복하십시오.  처음 믿을 때의 신앙적 열심을 회복하십시오.  말씀을 붙잡고 살던 그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봉사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무엇보다도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뜨겁게 교통하던 경건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말입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에서 '떨어진'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주님은 오른손으로 교회를 붙잡고 계십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떨어진 교회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통치권과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다스리심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심령에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은 주님의 손에서 떨어진 사람입니다.  주님의 다스리심을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가룟 유다처럼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에서 떨어진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생각하라'는 말은 현재 명령어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다시 주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촛대를 옮긴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준엄하신 말씀 앞에서도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않았던 에베소 교회는 지금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 흔적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촛대가 옮겨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도 주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머물러 있는 약속의 촛대가 옮겨질 것입니다.  축복의 촛대가 옮겨질 것입니다.  성령께서 떠나가실 것입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우리는 에베소 교회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랑하는 여러분, 처음 사랑을 회복하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몸부림치면서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7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 승리한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주어 먹게 하리라.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분명히 들으십시오.  이 말씀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그 사랑으로 신앙의 삶을 아름답게 사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주어 먹게 하신다는 주님의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모두가 장차 누려야 할 영광된 축복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처음 만난 첫 사랑을 회복하십시오.  사랑이 있는 교회는 부흥하는 교회입니다.  사랑이 있는 교회는 행복한 교회입니다.  사랑이 있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가 주님을 사랑하는 한 마음으로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교회와 성도를 섬기십시다.  내 교회가 귀한 줄 알고 이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변치 않고 서로 소중히 여기며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우리 지체들을 귀하게 여기며 사랑의 동산으로 만들어 가십시다.
 
그러면 주님 오시는 그 날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잘했다 칭찬 듣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지금은 나와 내 가정을 위해서, 그리고 내가 섬기는 우리 교회를 위해서 처음 사랑과 열정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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