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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겨자씨 믿음 (마 17: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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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 믿음 (마 17:14~20)


2008년 올림픽이 북경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우생순(우리생의 최고의 순간)의 여자 핸드볼이야기와 여자 농구의 선전에서 보여 주었던 투혼은 체력과 실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영화 같은 기적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올림픽은 실력 그 뒤에 있는 놀라운 힘은 우리에게 감동과 환희를 안겨 주고 있습니다. 북경으로부터 오는 긴장과 짜릿함, 흥분과 감동은 여름 피서의 최고 방법이 됩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축구가 4강에 진출하자 우리는 얼마나 좋아했지는 길거리로 뛰쳐나와서 그 감격과 기쁨을 모두 함께 나누었습니다. 수백 수천 번 ‘대-한민국’을 불러댔습니다. 우리는 기적을 보았고 세계도 놀랐고, 그리고 우리도 놀랐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일보다 더한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 날 수 있음는 비결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마 17:20)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1. 믿음이 없는 세대

본문의 사건은 마가복음 9장 14-29절과 누가복음 9장 37-43절에 도 발견됩니다. 

예수님은 변화산의 경험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자 어떤 간질병에 걸린 아이와 그의 아버지가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 그들은 먼저 제자들에게 병을 고쳐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이의 간질병을 치료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일찍이 예수로부터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악한 것을 고치는 능력을 부여받았다(마 10:1,8). 그러나 이번에는 권능을 나타낼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보통 복음 전도시에 병자들을 위해 기도하면 능력이 나타나 치료에 어려움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눅 10:17) 능력을 행하지 못했습니다. 

간질병에 걸린 아이의 아버지는 제자들로부터 치료를 받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지만 그러나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그 아버지는 병든 자식을 안고 주님께로 다가와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했습니다. 

(마 17: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제자들은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간질병을 치료하지 못했습니다. 평소 같으면 능히 치료할 수 있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이적이 일어나는 것이 예수님 능력보다는 자신들의 무엇에 의한 것으로 될 수 있다는 착각하였던 것입니다. 

(마 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책망은 한 마디로 모든 인간은 능력의 근원이신 예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무능과 실패는 자신의 힘을 의존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에 벌어진 현상은 참으로 한심했습니다. 

‘믿음이 없고’라는 단어의 뜻은 ‘적은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신앙’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없는 패역한 세대’라는 주님의 말씀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백성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믿고 기대할 수 있는 제자들마저도 믿음에 온전히 서지 못함을 보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믿음 위에 굳게 서야할 때에 믿음을 잃고 불신앙의 태도를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앙적 행위로 인하여 탄식하게 되신 것입니다.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을 보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불신의 담을 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 대한 실망스런 탄식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 대한 기대는 그들이 항상 믿음을 잃지 않고 온전히 서서 믿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약한 믿음과 불신앙은 다릅니다. 불신앙은 자신을 의지하는 자기 과신에서부터 시작되며, 약한 믿음은 말씀의 뿌리가 없어서 의심하는 신앙적 태도를 가르칩니다. 


2. 겨자씨 만한 믿음

제자들은 자신들의 무능한 모습을 보며 스스로 당황하기 시작하였고,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다가와 자신들이 왜 간질 병자를 고치지 못했는가를 주님께 물었습니다. 

(마 17:19)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제자들의 이러한 질문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당면 문제입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님의 대답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바로 믿음의 부족 때문입니다. 모든 제자들은 먼저 자신의 능력을 과시했고, 소리도 질러 보았고 안수도 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병자를 위하여 기도는 하였으나 주님을 제외시키고 자신들만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군중과 서기관들이 보는 가운데서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일찍이 주님께서 그들에게 권능을 주셨지만 그 권능은 주님을 의지할 때만 유효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들은 평소의 습관대로 병자를 향하여 기도했을 뿐입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 분을 신뢰할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능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분을 의지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나타내 보여 주십니다. 

(마 17: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겨자씨’는 씨앗 중 가장 작은 씨앗으로 팔레스타인 지방 또는 지중해 연안 등지에 많이 자라며 최대로 성장하면 3-4m까지 큰 나무로 자란다고 합니다. 이 ‘겨자’ 나무는 원줄기와 몇 개의 곁줄기로 자라는데 원줄기는 새가 앉아도 부러지지 않을 만큼 강하다고 합니다. 겨자씨의 교훈은 아무리 작은 씨라도 생명력이 있다면 큰 나무가 되는 것처럼 일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여기에서 ‘산’이란 문자적인 의미보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커다란 문제, 난제 등을 함축하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살아 있는 믿음은 어떤 큰 어려움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스포츠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승리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제공해 줍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인내와 투지로 승리할 수 있다는 삶의 원리를 배우기 때문입니다. 스포츠에서는 기록에 도전하는 자신과의 싸움 그리고 공격해오는 상대를 뚫고 골(득점)을 일구어 냅니다. 스포츠에서 중요한 단어가 ‘훈련’ 혹은 ‘인내’이라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Key Word는 ‘믿음’ 곧 ‘생명력 있는 겨자씨와 같은 믿음’ 일 것입니다. 

  
3. 겨자씨 믿음의 의미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작은 ‘겨자씨’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은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겨자씨 믿음’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첫째, 생명력이 있는 믿음은 성장합니다. 

‘겨자씨’는 작은 것이지만 ‘무한한 생명력’이 그 속에 감춰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한 바람은 작지만 생명력이 있는 ‘겨자씨 믿음’이었습니다. 이 씨는 비록 작지만 생명이 있으면 결국 자라게 됩니다. 죽은 믿음은 커보여도 자랄 수 없으며, 결국 썩어지고 버려지게 됩니다. 이 믿음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속에서 자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 생명력은 바로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꽃꽂이의 꽃이 겉보기에는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사실상 그 생명력은 이미 상실되었습니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둘째, 이 성장은 기도로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9장 14-29절 나타난 동일한 사건에서 제자들에게 그 믿음의 성격을 설명해 주십니다. 제자들은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를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그 생명력은 바로 기도로 나타남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며, 믿음의 성장은 기도로 이루어집니다.

(막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셋째, 능력은 주님이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 주님께서 직접 문제를 해결하시므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모든 문제의 해결자 되심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의 무능한 행태는 사건 해결의 근본이 혹시나 자신들의 어떤 역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마 17: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주님이 탄생하신 곳 베들레헴에는 평화가 넘쳤고, 나사로가 죽은 베다니에는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각종 병자들로 가득한 베데스다 못가에는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38년 된 병자가 자리를 들고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 모든 일의 주요 관점은 우리 주님이 우리의 실패와 무능의 자리에 와 주시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사 40:30,31)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대한민국은 2002년 두터운 축구의 벽을 허물고 4강이라는 대 위업을 달성하면서 더욱 투지와 단결된 신념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었습니다. TV와 신문, 라디오는 이 사실을 보도하기를 ‘세계 축구사에 새 역사를 쓴다’, ‘기적을 이루었다’, ‘신화를 만들어 내었다’, ‘신화는 계속된다.’ 등등 찬사와 수식어가 모자랄 정도입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잘 믿지 않습니다. 특히 경기장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믿으면서도 나와 우리 사이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사건에 대해서는 잘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올림픽은 우리의 선수들이 선전하며 기적을 일구어내는 일을 통하여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적용되기를 바랍니다. 

  
결 론 

제자들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무런 능력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들은 창피를 당했고,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혼란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이 혼란의 현장에 주님께서 찾아오심으로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생명의 주님을 전인격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작은 믿음은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한 생명의 성장은 계속될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에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승리와 기적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곧 ‘겨자씨만한 믿음’으로만 가능케 될 것입니다. 이 믿음은 생명력이요, 기도의 능력이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은총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삶의 현장에 오셔서 생명과 승리를 주시는 놀라운 경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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