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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참음과 본성의 인내 (고전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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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참음과 본성의 인내 (고전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 13:4) 


Ⅰ. 사랑의 참음 

사도는 과격하고 독선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난 후 가장 눈에 띄게 변화한 성품이 ‘인내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사도직을 의심하고 그의 교훈을 뿌리칠 때, 사도는 자기의 사도된 표가 표적과 기사보다 먼저 ‘오래 참음’이었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끊임없는 참음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오래 참음을 통하여 사랑의 성향은 유지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참음의 실천이 가지는 비밀스러운 효과입니다. 

A. 참음의 실천: 그리스도를 알아감 

참는다는 것은 자신의 본성 안에서 일어나는 욕구를 억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참음은 욕망과 욕정을 참는 것이라기보다 원하지 않는 질서 속에 들어가는 고통을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참사랑을 알고 그 사랑의 일부가 되었다할지라도 세상 모두가 예수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사랑을 거절하는 많은 이들이 일으키는 질서로 들어갈 때 고통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사랑의 질서가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임을 믿으면서 참는데 이것을 ‘오래 참음’이라고 말합니다. 

또 그 참음의 이유는 세상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큰 상급이나 고통을 뛰어넘는 행복 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 사랑의 질서를 펼치려하셨고 그 질서를 따라 사셨던 분입니다. 여전히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고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자기사랑의 파문을 일으키며 하나님 사랑의 질서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께 고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고난을 인내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참아야할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창칼로 무릎 꿇리는 사랑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영혼을 변화시켜 예수를 주인 삼게 하는 사랑입니다. 억압으로 굴복시키는 일은 단숨에 가능하지만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은 사랑의 감화이므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을 때 저 사람이 욕하면 나는 저주를 퍼부을 거라던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는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참음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고 우리를 위해 오래 참으셨던 그리스도 고난의 깊이와 넓이를 알게 됩니다. 

종종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됐어 용서해줄 테니까 이제 그만 말해. 그리고 다시는 보지 말자!” 이 대화의 숨은 의미는 용서가 아니라 복수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 용서는 단지 복수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 관계를 계속하고 거기에 사랑을 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참된 용서의 의미는 예수님의 고난을 보고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깊이 참회할 때 그만하라 하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용서하신 후에도 우리를 당신의 친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끊임없이 사랑해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누리는 곳 까지 데려가십니다. 이것이 진정한 용서의 계획입니다. 이러한 용서도 참음 없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일체의 오래 참으셨고 오래 참음 자체가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이를 향해 참다보면 우리의 본성이 참는 것에 힘겨워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마음으로는 끊임없이 사랑과 용서를 다짐하다가도 어느 한순간 사람들이 우리의 기대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관계를 끊고 싶은 격한 감정에 휩싸이거나 그동안의 희생과 고난을 생각하며 분을 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는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이미 사랑했노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사랑을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이미 사랑을 충분히 내가 소유했다함도 아닙니다. 처음 그리스도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알게 된 큰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매 순간 부어주시는 은혜가 있어야 사랑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구원 받은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신데 내 안에 자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언약백성에게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이 떠오릅니다. 바로 계명에 순종하는데 필요한 은혜를 무제한 공급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품과 같이 안에 있는 것으로 사랑하게 하지 않으시고 당신께 끊임없이 매달려 그 은혜의 효과인 사랑으로써, 즉 예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충만한 사랑의 사람이 예외 없이 기도의 사람인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아침마다 새롭게 늘 새롭게 부어주시는 은혜 없이는 아무리 결심해도 사랑을 계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사랑의 사람은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젯밤에는 죽일 듯이 미워했던 사람을 향하여 이튿날 새벽 주님의 은혜가 강물처럼 밀려와 그를 용서할 수 있게 되는 일은 성도만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구원받는 성도들이 계속 사랑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B. 자기의존을 버림(절대의존과 절대사랑) 

또 위와 같은 끊임없는 경험 속에서 성도는 자기가 사랑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을 사랑하고 오래 참음으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당하셨던 고난과 고통이 자신 속으로 투영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렇게 예수 닮지 않은 성품은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 닮은 성품이 자라게끔 해주십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자 절대 의존의 마음입니다. 만약에 사람에게 사랑할 능력이 남아 있고 모든 계명을 준수 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다면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리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어찌하든지 스스로를 의지하려는 인간의 빗나간 독립심이 타락한 본성의 일부임을 너무 잘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끊임없이 자기에게 실망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자기를 불신하고 미워하는 만큼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사랑하게 만들어주십니다. 오래 참음 속에서 사랑을 온전히 이루어가려고 애쓸수록 사람은 사랑의 대상의 크기와 상관없이 예수를 더욱 닮아가게 됩니다. 비록 그가 내 옆의 작은 한 사람일지라도 참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애쓰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를 닮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주님을 향한 절대 의존의 마음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사람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영혼이 주님을 찾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맨 처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다가 예수의 사랑에 사로잡혀 회심하던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 우리 죄를 깊이 뉘우치고 엎드렸을 때 차가운 우리의 마음은 물같이 녹아내렸고 우리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우리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내가 어떻게 그분의 사랑의 도구가 되어서 그리스도께 쓰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주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사랑이었습니다. 

흔히 기도제목이 없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기도 제목을 우리의 물질생활이나 외적인 환경에서만 찾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에 사로 잡혀 사는 사람은 육체가 행복하면 더 이상 기도의 이유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십시오. 만약 예전에 우리들이 오래 참았더라면 지금은 원수가 된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웃이 돼 있지 않았을까요? 

예전에 내가 주님 사랑에 의지해 견뎌냈더라면 우리는 교회에 상처를 내지 않고 많은 지체를 세웠을 텐데 한 적도 있을 것입니다. 과거의 일들에 대한 이치가 이러하다면 앞으로의 이치도 그러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주님의 그 큰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붙들려서 항상 우리가 못 박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보며, 주님은 최고이시고 이 땅에 모든 이웃은 두 번째이며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을 하면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복이 될 것입니다. 주님이 그 고귀한 보혈의 피를 흘리심은 우리에게 이런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우리를 구속하시고 주님이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순간부터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고 이 후 우리의 인생은 주님의 사랑과 용서에 빚진 인생이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우리 힘만으로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매 순간 위로부터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의 사랑만이 우리가 고난의 삶을 이기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Ⅱ. 본성의 인내 

그러데 이 세상에는 아가페 사랑으로 말미암은 참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또 다른 종류의 인내도 있습니다. 바로 본성으로 인내함입니다. 물론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주님이 주신 힘이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감화인 은혜의 나타남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적인 본성으로 참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참음의 이유에서 많은 차이가 납니다. 

A. 더 큰 자기목표를 위한 인내 

본성의 인내는 예수 십자가의 사랑 때문이 아니라 자기에게 돌아올 더 큰 이익 때문에 참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나마 이러한 본성을 주셨기 때문에 모든 세계가 완전히 부서지지 않고 기본적인 도리를 지키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이 아무리 넓게 확장되더라도 결국 자기사랑의 확장이므로 하나님의 큰 사랑의 질서 안에서와 같이 진정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부모를 향한 효심, 자녀를 향한 헌신적인 모정, 부부간에 도리를 다하는 신의는 자연적 본성의 관점에서 보면 덕스럽고 그리스도 없이도 어느 정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성경의 오래 참는 사랑과는 다른 종류의 사랑입니다. 

B. 인내를 통한 성품의 굽음 

미우라 아야꼬의 소설 「빙점」을 아실 겁니다. 여기에서 빙점은 인간은 모든 인내의 참음의 한계를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빙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자기 속에 있는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고 내면화한 사람들이 한계에 다다르게 되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기도 하는데 바로 이 빙점을 넘었기 때문입니다. 빙점은 본성의 참음과 관련 있습니다. 본성으로 버텨야 하는데 본성에 한계가 올 때는 절망이 옵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마음이 굳어집니다. 마음이 굳어지면 두려운 것이 없고 소중히 사랑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억누르고 있었던 악한 본성들이 쓴 물처럼 확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 없이 자연적 본성으로만 참는 것은 항상 위험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본성만의 인내가 아니라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인내가 필요합니다. 


Ⅲ. 그리스도에게 배움 

사도는 복음을 전파할 때 자신을 핍박하려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만났지만 오래 참았습니다. 그 때마다 사도가 참을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도 주님을 몰랐을 때 예수의 오래 참음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고 또 한 가지는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에게 주어주시는 은혜가 날마다 새로웠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모든 참음을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배우는 길입니다. 영원에 계시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라는 존귀한 이름으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 분은 생명 주려하셨지만 사람들은 그분의 생명을 노렸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참으심으로 자기사랑의 질서로 하나님께 반역하는 인간들이 깨닫고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거두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은 참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 받은 이 사랑을 따라 깊이 사랑하고 용서하면서 살아야합니다. 다른 이의 허물과 약점을 보기 전에 그들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메말라 버린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해 보십시오. 참 하나님의 사랑은 크고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치를 알고 잘 따지는 사랑 없는 사람보다 사랑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사랑에 능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 사랑을 보여주려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자입니다. 

또 그 사랑의 보답 때문에 내가 살아도 내 것이 아니라 주님 것임을 깨닫고 주님의 은혜를 절실히 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용서 할 수 없는 많은 이를 용서하고 내게 고통을 주기 때문에 볼 수 없었던 많은 사람들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목마른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구하는 이유입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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