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천국 시민의 사명 (마 5:13~16)

  • 잡초 잡초
  • 258
  • 0

첨부 1


천국 시민의 사명 (마 5:13~16)
 

지난 주일까지 주님의 산상 보훈 중 팔복을 설교했습니다. 팔복은 매우 역설적이라고 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물질적으로 부유한 자보다 더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가 웃는 자보다 더 복이 있다” “온유한 자가 사납고 억척스러운 자보다 더 복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빵으로 배부른 자보다 더 복이 있다” 이렇게 팔복은 역설적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의 개념이 내적이요, 영적이고, 천적입니다. 구약의 축복 개념이 외적이고 현세적인 것이라면, 신약의 축복 개념은 팔복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내적이고 천적입니다. 지금까지 진정한 축복이 어떠한 것인지, 참된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사람인지, 누가 천국 시민의 자격이 있는가를 살펴보았으나, 이제 그리스도인이 그의 사람됨을 어떻게 나타내어야 하는 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고립해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한 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세상 안에 있습니다. 세상과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정신과 소망이 내세적이어야 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 밖으로 물러가야 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흔히 범하는 두 가지 오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속주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은둔주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두 가지를 똑같이 배격해야 합니다. 

세속주의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리스도인이 범할 수 있는 또 다른 한 가지는, 세상이 악하니까 그 세상을 멀리하고 숨어 버리자는 은둔주의입니다. 그러나 이는 중세 수도원 제도와 같은 또 다른 과오임을 알아야 합니다. 불교의 사상은 은둔주의입니다. 불교는 염세적이고 그래서 깊은 산 속으로 숨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수도원의 담을 헐어 버리고 세상 속으로 뛰어든,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생명력이 약동하는 종교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죄를 많이 짓지 않으려면 별수 없지,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이러한 소리를 가끔 듣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요 17:15에서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고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18절에는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셨다면, 이 세상은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장소요, 우리가 사명을 감당해야 할 일터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일터인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곧 천국 시민의 사명으로 주신 말씀인 것입니다.

13절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부패를 전제하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소금이 필요한 곳은 부패가 있는 곳, 또는 부패의 가능성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인본주의 철학과 휴머니즘의 진단을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19세기의 철학자들, 사상가들, 그들은 얼마나 안이하고 자신에 찬 낙관주의자들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생물학적 의미에서만 아니라 철학적 의미에서도 진화론에 기초를 두었습니다. 그 중심 되는 사상은 인류의 삶이 진화하여 발전하며 향상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쟁은 종식되고 질병은 치료되고 고통은 해결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대중은 교육을 통하여 음주와 음란과 갖은 악을 중단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대화를 통해서 전쟁을 막고, 사람들이 마침내 철이 들기 시작했으니까, 모든 문제는 법률과 국제회의를 통해서 해결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은 낙원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신병자일 것입니다. 전쟁은 그치지 않고, 지식, 교육, 학문의 발달과 함께 죄악은 더 발전하고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대한 어떠한 낙관론도 철저하게 비성경적이고, 그리고 그러한 낙관론은 역사에 의해 거짓으로 이미 판명이 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타락하고 사악하고 썩고 부패한 세상에서 소금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소금의 특성은 무엇입니까?

    1.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땅에서는 소금에 절인 물고기가 식용으로 아주 많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열대 지방에서 소금이 하는 역할은 가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고를 당하거나 병든 자들에게 병원에서 가장 먼저 공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링겔 주사액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름 아닌 식염수입니다. 이 세상 광물 중에 소금처럼 다용도로 쓰이는 자원도 없다고 합니다. 소금이 맛을 내는 식용으로 쓰이는 경우는 생산량의 10%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모두 공업용으로 쓰입니다. 놀랍게도 1980년도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당시 밝혀진 소금의 용도만도 무려 14.000여 곳이나 된다고 합니다. 소금이 안 들어가는 공산품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소금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사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 교회, 성직자들의 부패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 땅에 최후의 진실한 주의 종들, 최후의 진실한 그리스도인까지 사라져 버린 사회를 상상해 보십시오. 복음의 빛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세계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소름이 끼치는 무서운 악몽일 것입니다. 세상이 이만큼이라도 존속되는 것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서 죄악이 통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조미료 역할을 합니다.

소금은 원래 짠맛이지만 음식물 속에 들어가면 음식 맛을 내 줍니다. 맛이 없는 것을 맛있게 만들어 줍니다. 소금은 음식물 속에 들어가면 더욱 좋은 맛을 내줍니다. 소금의 맛은 짠데 떡에 들어가면 떡 맛을 내고, 김치에 들어가면 김치 맛을 내고, 음식의 맛을 더 돋구어 주는 촉매제 역할을 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소금처럼 맛을 내는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가정에 들어가면 더욱 화목한 가정을 만들고, 직장에 들어가면 더욱 좋은 직장을 만들고, 기술을 가진 자는 더 좋은 기술자가 되고, 공부하는 자는 더 좋은 실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살려 놓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신앙으로 가정을 살려 놓고, 남편을 살려 놓고, 자녀를 살려 놓고, 들어가는 곳마다 살려 놓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맛을 내는 사람들은 세상의 소금과 같습니다. 이와 반대로 살려 놓지 못하고 더 나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을 빼앗아 버리고, 마음에 상처를 내면서 마음을 어둡게 만들어 주는 부정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사소한 일에도 불평하고, 험담하고, 부정적인 분위기로 다른 사람들을 낙심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면 두 종류의 새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비둘기는 창공을 날며 평화를 노래하고,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며, 그 모습이 순결하고 깨끗한 음식을 먹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주인집 가까이 삽니다. 그러나 까마귀는 슬픈 소리를 지르면서 창공을 나릅니다. 용모가 어둡고 침침합니다. 더러운 것을 먹으려고 들 가운데 있습니다. 까마귀는 사람만 보면 도망칩니다. 예전에는 까마귀가 소리 지르면 동네에 초상난다고 불길한 새라고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비둘기 신자가 있고, 까마귀 신자가 있습니다. 비둘기 신자는 성령 받은 신자의 모습으로 평화를 창조하고, 순결하고, 하나님의 집에 드나들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까마귀 신자는 침침합니다. 웃음이 없습니다. 입을 열면 불평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은혜를 꺼 버립니다. 이상한 말만 듣고 다니며, 덕스럽지 못한 말로 다른 사람의 심령을 초상집으로 만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그리스도인은 어느 곳에  들어가든지 소금처럼 맛을 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 소금은 녹아 희생을 합니다.

소금이 제대로의 맛을 내기 위해서는 자체가 녹아질 때만 가능합니다. 녹지 않는 그리스도인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기 자신은 절대로 녹아지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자기 이름, 자기 견해, 자기주장, 자기 생각이, 혈기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맛 잃은 소금을 어디에 씁니까?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유대교인들은 타락했던 사람이 다시 회개하고 돌아오면, 회당 문 앞에서 사람들이 자기 위를 밟고 지나가면서 큰 소리로 “나는 맛 잃은 소금이니 나를 밟고 지나가시오”라고 했다 합니다. 우리 가운데 이렇게 말해야 좋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교도소 재소자들의 50%가 과거 교회에 다닌 경험이 있다 하고, 교도소에 수감된 지도자들의 60%가 기독교인이라 합니다. 이렇게 한국 교회의 모습은 자타가 인정할 정도로 부패하고 추합니다. 아름다운 꽃이 시들면 거름이 되고 퇴비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맛 잃은 소금은 아무 것에도 쓸데가 없습니다. 맛 잃은 소금 같은 신자는 교회와 세상을 위해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로이드 죤스 목사는 “명목상의 기독교인보다 철저하게 무용지물인 것이 하나님의 우주 속에 없다.”고 했습니다.

사회가 어둡고 부정부패가 극심하여도, 적은 수의 성도들이 세상과 사회에서 소금 역할 제대로 하면, 이 사회는 건강할 것입니다. 본래 소금이 부패를 방지하는데 많은 양의 소금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적은 양으로 많은 양의 부패를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의인 10사람이 없어서 망한 것은, 소금 역할을 할 의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닷물은 0.4%의 염분 때문에 항상 신선합니다. 그래서 육지의 오염된 더러운 물을 아무리 흘러 보내도, 그것을 다 정화해 냅니다. 그래도 바닷물은 결코 썩지 않습니다. 로마 사회의 지극히 적은 소수의 크리스천들은 로마 사회를 정화했습니다. 비록 비천한 노예들과 나약한 부녀자들이었지만, 당시 로마의 타락하고 부도덕한 사회를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말씀대로 세상의 소금이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말씀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이 말씀 역시 세상의 어두움을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이 어둡다니요? 전기가 얼마나 발달했습니까? 밤이면 도회지의 거리는 네온사인으로 휘황찬란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어둡다니요? 지식이 얼마나 발달했습니까? 문화가 얼마나 발달했습니까? 그러나 세상은 너무도 어둡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이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얼마나 어두운가를 직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 이 세상이 어둡습니까?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심이니” 그 때문에 세상은 어둡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신 주님은 그 자신이 빛이셨습니다. 요 1:9에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빛이 누구입니까? 요 8:12에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했고, 요 9:5에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고 했습니다. 빛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 참 빛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빛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빛이신 그리스도를 소유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반사하는 영광스러운 반사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엡 5:8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했습니다.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빛이라!’ 여러분에게 이 분명한 생의 전환점이 있습니까? 아프리카에 간 선교사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의 거룩한 선교의 사명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그 선교사님의 비문에 이렇게 썼습니다. “당신이 이 곳에 올 때에는 어두움이더니, 당신이 떠나간 지금 우리는 빛 가운데 있습니다.” 

빛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태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학교에 가면 신학생들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신학교 1학년 때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2학년 때는 그 불이 깜박깜박 꺼지려 하고, 3학년이 되면 불은 이미 꺼지고 연기만 펄펄 난다는 경고문입니다. 빛이 되지 못하고 연기만 펄펄 내는 신자는, 많은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만 흘리게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은커녕, 다른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만 흘리게 하는 연기 같은 신자들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팔복을 소유한 성도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다른 사람까지 복되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참으로 하찮은 사람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물론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일깨워 주는 말씀이지만, 또한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칭찬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그리스도인에 대한 칭찬이라고 한다면, 이보다 더한 찬사가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리스도인은 소금과 빛의 중요성만큼이나, 이 세상에서 중요한 존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pliny는 “소금과 햇빛보다 더 유익한 것은 없다”고 했고, Rome 속담에는 “소금과 햇빛은 이 세상을 생기 있게 만들고 향기롭게 한다.”고 했으며, 플라톤은 “소금과 빛은 신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보배다”고 했습니다. 사실 소금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빛이 없으면 또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일 캄캄한 밤만 이 땅에 계속된다면, 초목에서 금수 인생에 이르기까지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빛은 우리의 삶에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필수품이고 보배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세상에서, 교회에서 소금과 빛처럼 없어서는 안 될 필요불가결한 사람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이 사회의 가공할 범죄와 악과 부패와 오염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사회 정의를 외치고 수백 수천 개의 플래카드를 걸고 캠페인을 해서 가능합니까? 음식이 썩을 때 소금으로 막는 것처럼, 이 세상이 썩을 때 막을 자는 참된 하나님의 자녀밖에 없습니다.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과 접촉하면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1)믿는 사람의 감화력에 의해서 믿지 않는 사람의 썩는 생활을 막던지 
2)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의 감화를 받아서 함께 썩고 함께 죄를 짓던지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맛 잃은 소금처럼 쓸데없는 소금, 짓밟히는 소금, 거추장스러운 소금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런데 소금이 맛을 잃는 것은 갑자기 잃는 것이 아니고, 점점 그렇게 되어지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혹은 기도가 게을러지고, 혹은 주일 예배 출석이 잦아지고, 주일 오후 예배, 수요 예배, 구역 예배를 소홀히 하고, 맡은 바 책임을 점점 잘 하지 않습니다. 점점 세상과는 가까워지고, 교회와는 점점 멀어집니다. 마지막에는 맛을 잃고 맙니다. 여러분, 이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한 자루의 촛불이 방안의 어두움을 밝히듯, 한 사람의 참된 신자가 복음의 빛을 발할 때 어두운 미신이 물러가고, 어두운 풍속, 어두운 사상, 어두운 습관, 어두운 생활이 점점 더 밝아집니다. 시골에서 예수 믿는 처녀가 버스 통학을 하다가 안 믿는 총각과 눈이 맞아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안 믿는 시아버지, 시어머니 뜻 맞추고 살기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더군다나 교회에 간다고 얼마나 구박을 하는지 나중에는 교회도 못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좋아서 결혼했지만 남편 된 사람도 부인을 구박하고, 술 먹고 오면 때리고, 시어머니는 남들 다 잘 낳는 아들도 못 낳고 딸만 낳는다고 얼마나 구박을 하는지 도저히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밤중에 목사님을 찾았습니다. 
“목사님, 이제는 제가 떠나야겠습니다. 이렇게 구박받느니 떠나야겠는데 친정으로는 못 가겠고 서울로 가야겠습니다.” 
“아이들은 어떻게 하고 떠난다는 것입니까?” 
“아이들은 할머니가 기르겠죠.” 
“서울에 가서 뭘 하시려고요.” 
“낮에는 일하고 야간에는 신학교를 다녀서 전도사를 하렵니다.” 
“여기에서도 못 사는 사람을 누가 전도사로 오라고 한답니까? 여기에서 잘해야 전도사도 하는 것이지, 여기에서도 못하는 사람이 무슨 전도사를 합니까? 당신이 여기에서 소금처럼 녹아지시오. 완전히 녹아져서 이 가문에 맛을 내고, 그때 나에게 와서 서울로 간다고 하면 내가 장학금을 주겠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된다고 했으니, 여기에서 완전히 죽었다 하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시오. 그리고 나를 만나러 오시오.” 

그 말을 듣고 그 여성도는 새벽마다 성전에 나와 기도하면서 자기 존재를 완전히 깨뜨렸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때리면 맞고, 시어머니가 뭐라고 구박하면 “어머니 마음을 불편하게 해서 죄송합니다.”하고 울면서 웃으면서 자기는 죽었다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1년 동안 이렇게 사니까 시어머니가 예수그리스도에 갈증을 느껴서 교회에 나왔고, 나중에는 시아버지와 남편까지도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맛을 잃지 않는 세상의 소금으로, 어두움을 밝히는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통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큰 영광과 찬송이 돌려지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세상의 빛이시고 참 빛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