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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 평화의 길 (눅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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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평화의 길 (눅 17:1~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들이 생기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러한 일들을 일으키는 사람은 화가 있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기 목에 큰 맷돌을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나을 것이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믿음의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 주어라. 그가 네게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서 ‘회개하오’ 하면, 너는 용서해 주어야 한다.”]

• 거짓 행복

며칠 전(8월 4일) 러시아의 문호인 솔제니친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는 그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펼쳐놓고 그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책은 스탈린 시대의 소련에서 뚜렷한 죄목조차 없이 지배논리의 희생물이 되어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은 대개 자신이 존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조차 잃어버린 채, 그냥 그 상황에 익숙해진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고기능이 거의 중단된 것이지요. 물론 수용소 안에서도 선한 것을 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침례교도인 알료쉬카는 “남이 도와달라고 청하는데, 어찌 도와주지 않을 수 있느냐”고 말하며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대대수의 사람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도 예외는 아닙니다. 수용소에서 슈호프가 추구하는 행복은 지극히 사소하고 이기적입니다. 영창에 들어가지 않는 것, 힘든 노동에 동원되지 않는 것, 남을 속여 죽 한 그릇을 더 먹는 것, 잎담배를 구하는 것 등입니다. 사람이 이만큼 작아질 수 있음을 솔제니친은 아주 적실하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구하는 것도 슈호프의 이런 사소한 행복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습니다. 수용소에 갇히지만 않았다 뿐이지, 우리도 욕망의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나를 지키고, 내 편안함을 구하다보니 늘 남과 경쟁하게 됩니다. 삶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느긋함은 사라지고, 다른 이를 위한 마음의 여백은 점점 줄어들고, 늘 자신에게만 집중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무표정한 얼굴, 부루퉁한 얼굴, 수심에 찬 얼굴, 언제라도 화를 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사는 듯 보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슬퍼집니다. 다른 이들과 관계 맺을 줄 아는 능력이 줄어드니, 소외감이 커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 조심 또 조심

삶이란 누군가의 영향을 받음이고, 또 누군가에게 영향을 입힘입니다. 우리에게 다소라도 아름다운 구석이 있다면 살아오는 동안 만난 여러 사람들의 좋은 영향을 받은 덕분입니다. 그 반대도 역시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며 살고 있습니까?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에도 향을 나누어줍니다.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납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향기를 다른 이들에게 주고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두려움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들이 생기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러한 일들을 일으키는 사람은 화가 있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기 목에 큰 맷돌을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나을 것이다.”(1b-2)

남을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요? 누군가가 나의 말과 행동에 걸려 넘어졌다고 할 때, 그것이 나의 의도나 본의에 관계없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이 떳떳하다 해도, 그것이 만드는 그늘이 없는가를 늘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남의 속사정까지 헤아리며 살 여유가 없으니 말입니다. 대개 걸려 넘어지는 이들은 내적으로 든든하지 못한 사람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삶이 너무 각박하고, 늘 피해를 입으며 살아온 사람들 말입니다. 

예수님은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을 ‘이 작은 사람들’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인격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서있는 자리의 열악함을 지칭하는 말일 겁니다. 나의 자유로운 말과 행동이 사회적 약자, 영적으로 연약한 이들을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 일입니다.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나, 무심한 대꾸가 우리 형제자매들을 넘어뜨리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칼에 찔려 살해된 사람의 피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만, 미움에 찔려 흘리는 마음의 피는 하나님이 보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나 좋을 대로’가 아니라 형제자매를 배려하며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윤리를 나타내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배려이고, 다른 하나는 권리의 포기입니다. 둘 모두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태도입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형제자매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고전8:1b). 바울 사도의 권고를 들어보십시오.

“형제자매 앞에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십시오.”(롬14:13)
“여러분에게 있는 이 자유가 약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고전8:9)

주님은 ‘작은 자’ 하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목에 큰 맷돌을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형제자매들에 대한 진실한 사랑 때문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세상은 한결 살만한 곳으로 변할 겁니다.

• 꾸짖을 수 있는 자격

하지만 신앙 공동체 속에도 갈등은 있게 마련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교회를 가리켜 ‘거룩한 창녀’(holy prostitute)라 했습니다. 성도는 ‘거룩함’을 지향하지만, 그는 여전히 옛 삶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일 겁니다. 교회는 의인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들 가운데는 교인들의 행태에 상처를 받았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참 할 말이 없어집니다. 스스로 죄인이 되어 만수받이가 될 수밖에요. 하지만 어떤 사람이 공동체의 일치나 지향에 해를 끼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처방은 소박합니다.

“믿음의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 주어라.”(3)

간단합니다. 하지만 이게 말처럼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형제자매의 잘못을 보면 못 본 척할 때가 많습니다. 너그러워서가 아니라 그와 감정적으로 불편해지는 것이 싫어서입니다. 만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으며 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의 앙금은 점점 짙어집니다. 마태복음은 형제가 죄를 지으면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충고하라고 권합니다.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말하라고 합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권고도 듣지 않으면 그를 외인처럼 대하라고 합니다(마18:15-20). 

우리가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그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굴욕감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꾸짖는 이의 태도입니다. 그의 말이 구구절절 옳아도, 그가 은근히 도덕적 우월감을 드러내 보인다거나, 정죄하는 태도일 때 사람은 누구나 방어적이 됩니다. 그런 경우 그들 사이에 남는 것은 불쾌감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꾸짖어야 하나요? 바울 사도가 그 길을 제시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인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갈6:1)

온유한 마음과 삼가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런 마음의 바탕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바로 꾸짖을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하면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는 그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똑같은 잘못이 반복된다 해도, 그의 참회가 진정이라면 그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 데 이현주 목사님이 보내신 소포를 받았습니다. 성구에 대한 간단한 묵상과 짧은 기도를 덧붙인 글을 모아놓은 <<보는 것을 보는 눈이 행복하다>>라는 책과 음반 하나였습니다. 책을 뒤적이다가 마침 오늘의 본문도 다루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 목사님은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거든 꾸짖고 뉘우치거든 용서하라는 말씀은, 마음을 거울같이 쓰라[用心若鏡]는 말씀”이라고 풀었습니다. 사물이 제 앞에 서기 전에는 그 모습을 비춰주지 않고 사물이 떠난 뒤에는 그 모습을 간직하지 않는 거울처럼 마음을 쓸 때 비로소 예수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 참회와 용서

사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잘못을 시인하는 순간, 그는 약점을 잡힌 사람이 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남 탓(blame)과 수치심(shame)’의 감옥에 갇힌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탓하는 일에 익숙하고, 잘못을 저지르고도 수치심 때문에 그것을 시인하지 못합니다. 인류의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하와 탓이라고 말하고, 하와는 뱀 탓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 잘못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화해의 시작입니다.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으로 가뜩이나 경색되었던 남북 관계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정말 그 사건이 초병에 의해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면 북한은 사정이 이러하다고 말하고, 공동 조사에 응하고 적절한 유감이라도 표명했더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잘못을 시인할 생각이 없습니다. 일본의 독도 망언에 우리 국민들이 분노하는 것은 일본이 한 번도 자신들의 잘못을 속 시원하게 시인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이나 독일이나 2차 세계대전의 전범인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일본의 태도는 독일의 태도와 크게 대비가 됩니다. 독일은 자기 잘못을 참회하고 책임질 일은 끝까지 책임을 지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일본은 오히려 아시아인들에게 저지른 만행을 흔쾌히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집회를 갖는 정신대 할머니들의 피맺힌 음성은 어쩌면 아벨의 피를 마신 땅이 신원을 요구하며 내지르는 함성인지도 모릅니다.

몇 달 전 대통령은 일본에 가서 더 이상 과거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가게 내버려두자(Let bygones be bygones)”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결코 그저 지나가지 않습니다. 부부 싸움을 한 이튿날, 남편이 아내에게 장미꽃을 보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싸운 이유가 무엇이든 그 문제에 함께 직면하고, 대화하고,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해야 문제는 풀립니다. 적절하게 해결되지 않은 쓰라림은 반드시 다시 떠오르게 마련입니다.

• 회복된 삶

참회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선언하는 것처럼 허망한 노릇이 없습니다. 나쁜 의도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누군가에게 불온의 낙인을 찍고, 거짓말로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이들에게는 함부로 용서한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용서받을 것이 없다는 생각하는 이들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꾸짖음입니다. 하지만 그 꾸짖음의 바탕은 미움이나 멸시여서는 안 됩니다. 존중과 사랑과 이해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참회 없는 용서는 불가능한 것일까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당신을 처형하는 사람들, 조롱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용서하심으로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문을 열어주고 계십니다. 주님은 디베랴 바다로 돌아가 고기잡이를 하고 있던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을 위해 아침 식탁을 차리셨습니다. 그것은 몸으로 하는 용서의 선언이었습니다. 용서는 제자들을 새로운 삶으로 견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용서는 다른 말로 하면 ‘받아들임’입니다. 값없이 받아들여짐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이전의 삶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잘못을 저지른 형제자매들을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요? 그 사람 속에 있는 아픔을 보아야 합니다. 그의 아픔을 보는 순간 우리 마음에는 자비심이 태어나고, 더 이상 그를 적으로 간주할 수 없습니다. 애정에 찬 꾸짖음과 용서야말로 세상을 새롭게 하는 묘약입니다. 꾸지람이 꼭 말이나 제재일 필요는 없습니다. 때로는 값없이 베풀어지는 사랑이야말로 우리 가슴에 큰 꾸지람이 되기도 합니다.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를 그나마 지탱해준 것은 알료쉬카의 신앙적 낙관주의와 사랑이었습니다. 세상의 슈호프들은 알료쉬카와 만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이 그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 길만이 참 평화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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