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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돌아가서 기다리리라 (호 5:1~ 호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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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돌아가서 기다리리라 (호 5:1~ 호 6:3)


제가 학생이었던 시절에 당시 한창 전성기를 달리던 가수 송창식의 히트곡 중에 '한번쯤'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한번쯤 말을 걸겠지 언제쯤일까 언제쯤일까 /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붙여오겠지 / 시간은 자꾸 가는데 집에는 다 와 가는데 / 왜 이렇게 망설일까 나는 기다리는데 / 뒤돌아보고 싶지만 손짓도 하고 싶지만 /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려 봐야지'라는 가사의 노래입니다.
  
지금 분명히 자기를 좋아해서 뒤따라오는 사람이 왜 얼른 적극적인 자세로 다가와서 자기를 붙잡아 주지 않는지 속으로 애를 태우는 심정을 노래한 곡이며, 2절은 그렇게 따라가고 있는 쪽에서 '왜 한번쯤 뒤돌아서 자기 쪽을 보아 주지 않는지'를 또한 가슴 졸이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애정표현이 지나치게 저돌적인(?) 요즘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답답한 모습이겠지만, 옛날 우리 때에는 남녀관계에서 그처럼 수줍어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하여튼 이 노래에서 지금 앞서서 자기 집으로 가고 있는 쪽은 뒤를 따라오고 있는 쪽에서 볼 때에 계속 등을 돌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사람이 어떤 다른 사람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상태란 이별이나 절교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처럼 비록 몸은 등을 돌리고 있어도 그 마음은 오히려 자기 뒤쪽에 있는 사람 쪽으로 강하게 쏠려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의 속마음을 알아주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람을 '등에 달린 눈'으로 보면서 얼른 '말을 붙여 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 하나님께서도 바로 그와 같은 심정으로 죄인을 기다리고 계심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견 이스라엘의 면전으로부터 등을 돌리시고 떠나시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을 더욱 간절히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당신의 자녀들을 향하여 보여 주시는 깊고도 진실한 사랑 표현이 과연 어떤 과정으로 나타나게 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사람의 불신앙'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등을 돌리시게 만드는 원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그 교만이 극에 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꼴을 도무지 더 이상 두고 보지를 못하시는 까닭에 당신의 곳으로 일단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실을 본문 1절부터 7절에 기록하기를 "1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서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서 친 그물이 됨이라 2패역자가 살륙죄에 깊이 빠졌으매 내가 저희를 다 징책하노라 3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행음하였고 이스라엘이 이미 더러웠느니라 4저희의 행위가 저희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5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증거가 되나니 그 죄악을 인하여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저희와 한가지로 넘어지리라 6저희가 양떼와 소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 할 것은 이미 저희에게서 떠나셨음이라 7저희가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자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 달이 저희와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들으라," "깨달으라," "귀를 기울이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들과 "왕족"들이 듣기 이전에 먼저 소위 "제사장"이라는 자들부터 제대로 들으라고 외친 이유는 윗사람으로부터 아랫사람에 이르기까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같은 범죄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미스바"와 "다볼"에서 "올무"와 "그물"에 빠져 있었다고 했는데, 이 두 지명들은 당시 우상숭배의 중심지였고 그 중에서도 다볼산은 사람들이 그물을 쳐서 새를 많이 잡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미스바와 다볼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혼을 걸리게' 하고 죽게 만드는 곳이 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던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그들 스스로는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눈앞에서 결코 감출 수 없고 변명할 길도 없는 명백한 범죄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 죄는 "행음"한 자가 이미 "더러워진" 것과 같은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배우자 아닌 다른 사람과 간음을 저질렀을 때 그런 행위는 상대 배우자의 눈에는 오직 더럽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꼭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지금 저지른 죄 역시 이스라엘을 '아내처럼' 사랑하시던 하나님의 눈에는 여지없이 더럽기 짝이 없는 것으로 빤히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죄가 도대체 어떤 것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과 양심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을 정도로 더러웠던 죄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4절로 7절의 말씀은 그것이 바로 그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있는 "음란한 마음"과 "교만"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 '음란'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마치 간음한 여인처럼 하나님을 떠나 배교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게다가 '교만'은 그들의 마음을 가리어서 자기네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행음의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 마음 중심에 있는 그 교만스러운 불신앙을 정확하게 알고 계셨으며, 그 숨기지 못할 죄를 스스로 인정할 줄 모르는 바람에 이스라엘과 유다는 함께 넘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많은 "양떼와 소떼"로써 제사를 드린다 할지라도 이미 그들이 하나님과 진정으로 교제할 수 있는 길은 끊긴 상태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배교자들에게서 이미 등을 돌리시고 떠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조를 지키지 않고" 벌써 "사생자"까지 낳은 그들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그 곁에서 눈뜨고 보실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추악하고 더러울 뿐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교만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더럽고 역겨운 죄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만이란 '사람들 앞에서 좀 잘난 체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불신앙의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알지 못하면서 세상의 다른 사리에는 밝다고 자부하고, 하나님은 섬길 줄 모르면서 세상의 다른 먹고 사는 일에는 능력 있다고 자랑하는 인생이야말로 바로 그 지식과 그 능력이라는 우상이 스스로에게 올무가 되어 그 그물에 걸리고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우리 사람 사이에서도 별로 대단하지 않으면서도 '제 잘난 체'하는 사람은 정말 '꼴도 보기 싫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과 조금도 상대가 되지 못할 인생들이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잘난 체하고 교만하며 '하나님은 없다.'라고 감히 도발할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 얼마나 역겹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등을 돌리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불신앙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조차 스스로 인정할 줄 모르는 교만에 꽉 차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 '들으라, 깨달으라, 귀를 기울이라'고 간절히 외치는 선지와 사도를 통한 성령의 부르심을 정말 귀 기울여 들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성경 말씀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런 교만의 벽을 깨뜨리고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참 겸손과 참 지혜로 이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어도 하나님이 잘 안 믿어집니다."라고 하는 것은 바로 사탄이 우리 속에서 속삭이고 있는 꾐에 넘어가는 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능히" 우리로 하여금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바로 내 본성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이 가장 더럽고 악한 교만과 불신앙의 죄가 나 자신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결정적인 장애물인 것을 깨닫고 인정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인생의 환난'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는 동기가 됩니다. 

교만한 인생을 떠나신 하나님께서는 그 때문에 사람과 완전히 절교하신 것이 아니라 환난이라는 것을 새로운 재결합의 징검다리로써 우리에게 제공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8절 이하 14절에 "8너희가 기브아에서 나팔을 불며 라마에서 호각을 불며 벧아웬에서 깨우쳐 소리하기를 베냐민아 네 뒤를 쫓는다 할지어다 9견책하는 날에 에브라임이 황무할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지파 중에 필연 있을 일을 보였노라 10유다 방백들은 지계표를 옮기는 자 같으니 내가 나의 진노를 저희에게 물같이 부으리라 11에브라임은 사람의 명령 좇기를 좋아하므로 학대를 받고 재판의 압제를 당하는도다 12그러므로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 13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저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14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나 곧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 낼 자가 없으리라"고 기록했습니다. 

"기브아"와 "라마"는 남조 유다에서, 그리고 "벧엘"은 북조 이스라엘에서 각각 그 지형상 어떤 신호를 주위 지역에 보내기에 적합한 곳이었는데, 거기에서 "나팔"과 "호각" 즉 전쟁의 위기를 알리는 신호소리가 울려 퍼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패전과 망국이라는 환난이 임하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후에 그 적군이 이어서 "베냐민의 뒤를 쫓을 것"이라고 한 것은 북조 이스라엘이 망하면 남조 유다에게도 똑같은 화가 곧 뒤따라오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9절과 10절이 바로 그런 내용을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에브라임" 즉 북조 이스라엘이 필연적으로 망하고 "황무"하게 될 것이며, 그 후 유다 역시 "지계표를 옮긴" 죄 즉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떠나간 죄로 "물 같은 진노"를 뒤이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북조 이스라엘과 유다는 이방 민족으로부터 "압제"와 "학대"를 받는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대신 "사람의 명령" 좇기를 더 즐겨하는 자에게 지극히 잘 어울리는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망국의 환난을 받으면서도 이스라엘과 유다는 또 "앗수르에게" 의지하며 그들에게 사람을 보내서 자기네 "병"과 "상처"를 치료받기를 원하겠지만 끝내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임하는 환난은 무슨 국제 정세나 타국의 주권자의 결정에 의하여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완전히 작정하시고 마음먹으신 대로 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람이나 앗수르나 바벨론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좀"과 "썩이는 것"같이 망하게 하시며, "사자"와 "젊은 사자"같이 다 빼앗아 가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그와 같은 극한 환난이 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다리고 계시는 방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처럼 엄중한 형벌을 내리신 직후에 바로 이어지는 15절에 보면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과 유다가 그처럼 무거운 징벌을 당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바로 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아직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으며 여전히 잊지 못하고 계신다는 증거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예와 이런 말씀을 여러 군데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택자가 때로는 제멋대로 살도록 그냥 버려두십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불신자들이 마음대로 죄를 짓고 살아도 아무 일 없이 그저 평안하고 잘 되기만 하는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을 조금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복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버린 자식' 취급을 당하고 있는, 진짜 저주 받은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꼭 구원하시기로 작정되어 있는 택자는 비록 매서운 매를 동원해서라도 끝내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도록 만드십니다.
그리고 하늘 아버지께서 그런 이유로 당신의 자녀를 치실 때는 정말 아프게 때리십니다.
때로는 마치 우리 인생을 '좀'먹이며 완전히 '썩여' 버리실 것 같은 기세로 대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마치 '굶주린 사자'와 '젊은 사자'처럼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을 싹 빼앗아 가버리실 때도 있는 법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오늘도 오직 당신에게 속한 친자녀가 당신께로 돌아오도록 유도하시는 방법입니다.
  
환난을 당하고 있을 때에는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완전히 돌아서 계신 것처럼 여겨질 수 있겠지만, 사실은 그 매를 통하여 우리를 정말 간절히 기다려 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아버지치고 자기 자식이 미워서, 혹은 그 자식을 쫓아내려고 매를 드는 아버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로 그런 하나님의 매가 떨어질 때, 그런 환난의 아픈 것들이 자기 인생에 닥쳐올 때, '사생자'와 '적자'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게 됩니다.
  
신자 같지만 실상은 영적 사생자인 교인은 그런 하나님의 매를 원망하고 완전히 돌아서고 말지만, 하나님의 진짜 '양자' 된 신자는 그 하늘 아버지의 참된 뜻을 오히려 그 매 가운데서 발견하고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라고, 그야말로 두 손 번쩍 들고 겸손하게 자복하면서 더욱 하나님 쪽으로 가까이 나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매가 아프면 아플수록, '아 하나님께서 아직도 여전히 날 사랑하고 계시는구나.'라고 깨달을 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참된 자녀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벌은 결코 우리를 미워하시고 등을 돌리고 서 계시는 표시가 아니라 정반대로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려주고 계시는 증거임을 깨닫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3. '죄인의 회개'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 주는 해결책입니다. 

5장 15절로부터 6장 3절까지의 말씀에 보면 "15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1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6장에 기록된 말씀은 지금 현재 이스라엘 백성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할 때 어떤 자세로, 어떤 마음으로, 어떤 말로 회개하게 될지를 미리 말씀하고 계시는 내용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서 원하시는 회개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런 환난을 당하게 됨으로써 참된 하나님의 자녀는 어떤 모습으로 회개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까?
그것은 우선 그 고난을 내려 주신 하나님만이 자신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분인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도로 낫게 해 주실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를 싸매어 주실 것이라"는 고백대로, 그처럼 자신을 찢으시고 치신 분이 바로 여호와이심을 우선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회개하는 자는 바로 이와 같은 자각을 꼭 가져야만 합니다.
자기가 당한 일이 재수 없어서 된 일도 아니고 다른 사람 때문에 일어난 일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를 돌이키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러니 오직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함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회개란 그저 죄책감만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고행을 해서 죄값을 갚아야 하겠다는 것도 결코 아니라, 오직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하겠다.'라는 마음이 가장 중요한 첫째 단계가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자의 두 번째 자세는 자기를 용서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그 모든 과정과 기간 역시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자세입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라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살리시고 일으켜 주실 날이 언제가 될지 그것은 회개하는 사람의 편에 달린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와도, 하나님께서 그 당하고 있던 환난에서 완전히 건져 주실 시간은 이틀이 될지 삼일이 될지 사람 편에서는 모르는 것이며, 또한 언제까지는 모든 것을 꼭 다 회복시켜 달라고 요청할 자격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회개하는 사람 편에서 알 수 있고 또 확신해야만 하는 것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어쨌든 자기는 "그 앞에서 살게 될 것"만은 분명하다는 사실 뿐인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이런 자세에 있어서 결코 착오를 범해서는 아니 됩니다.
"내가 회개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좋게 돌아가도록 왜 당장 바꾸어 주시지 않는가?"라는 자세를 가져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영적 간음이라는 중범죄를 저질렀던 자로서는 너무나도 뻔뻔스러운 말이기 때문입니다.
용서해 달라고 빌러 오는 사람이, 나를 어떻게 용서해 달라고 요구하며 나아온다는 것이 말이나 되겠습니까?
  
정말 당치도 않은 소리입니다.
우리는 오직 한 가지 확신, 죄 회개하는 자를 꼭 살려 주고야 마실 것이라는 이 확신만 가지고 나머지는 모두 주님께 맡기며 그야말로 '무조건 항복'하는 자세로 회개해야 할 따름입니다.

  
셋째로, 진심으로 회개하는 성도는 자신의 죄 용서받음의 체험을 통하여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뜨겁고 진하게 체험할 줄 아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모르던 교만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한다면 그 사람은 이제 그 하나님을 더 잘 알고자 노력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자세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을 더 잘 아는 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죄 용서함을 받는 체험을 통해서입니다.
아니 이 체험을 거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제대로 알았다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체험이 있어야만 하나님은 착하고 보기 좋은 사람을 사랑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악하고 더러운 죄인이었을 때부터 사랑해 주신 분임을 진짜로 알게 됩니다.
이 체험이 있어야만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향하여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분이신지 그 인내와 관용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체험이 있어야만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친구가 되시며, 아니 그 죄인을 구원하여 당신의 양자의 자리까지 끌어올려 주시는 실로 한량없는 인애의 아버지이심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들이 바로 그와 같이 하나님을 알게 된 자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죄인을 찾아와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마치 새벽빛이 일정하게 찾아오고 일단 그 빛이 임하면 어두움이 물러가지 않을 도리가 없듯이, 죄로 상처투성이가 된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임하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으로 죄인에게 임하여서, 일단 그 은혜의 빛이 비취기 시작하면 마치 떠오르는 햇빛을 피할 길 없이 받듯이 그 은혜에 온통 잠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부어 주시는 은혜야말로 사람에게 있어서는 가뭄에 한 방울의 비와 같이 달디 단 것입니다.
  
"비" 특히 "땅을 적시는 늦은 비"는 농사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비는 정말이지 우리 인생에게 없어서는 아니 될 가장 귀중한 물방울이 아니겠습니까?

부모에게 꾸중을 듣거나 벌을 받고 나면 누구다 다 일단은 서먹서먹하게 됩니다.
또 어떤 자식은 그 정도가 아니라 부모에 대하여 화를 내고 감정의 앙금이 깊이 쌓이게 됩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빨리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에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일입니다.
  
일단 그렇게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빌기만 하면 그처럼 어색하던 감정이 다 사라지고 순식간에 마음이 풀리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도 바로 그런 것을 속속들이 체험하게 됩니다.
회개는 일단 하나님 앞에 무조건 돌아가는 것인 줄을 알고, 그 용서해 주시는 과정과 시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복하며, 그 회개의 체험을 통하여 자신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더 큰 은혜에 잠기게 되는 것을 '맛보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진실한 회개를 통하여 짐짓 우리에게 등을 돌리셨던 하나님께서 우리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리시게 되고 우리는 그 사랑의 품에 다시 안기게 됨으로써,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구원주이신 하늘 아버지를 이전보다 더 깊이 알고 더 뜨겁게 사귀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연인이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할 때 그 앞에서 눈물을 감추며 돌아설지라도 실제로는 지금이라도 자기를 붙잡아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부모가 말 안 듣는 자식 때문에 속을 썩이면서 돌아앉게 되어도 그 진심은 여전히 그 자녀에 대한 사랑의 염려로만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꼭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이처럼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일단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당신의 곳으로 돌아가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하나님의 진정한 본성은 여전히 죄인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자신이 자기도 모르는 교만 가운데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아니 하나님께서 눈뜨고 보실 수 없어서 돌아앉으실 만큼 지독한 죄인 것을 먼저 인정하고 고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환난의 매를 내리심으로써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며, 그런 까닭에 신자가 이 땅에서 받는 환난은 결코 하나님께서 완전히 버리신 표시가 아니라 정반대로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하고 계시는 증거인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하나님께서는 약간의 양심의 가책을 느낌으로써 끝나는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가고자 하는 회개, 용서받는 법을 제멋대로 요구하는 주객전도의 회개가 아니라 모든 처분을 오직 하나님께만 온전히 맡기는 참된 회개, 그리고 그 용서받음을 통하여 정말 알아야 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진하게 체험하는 참된 회개가 저와 여러분에게서 나오도록 지금도 기다려 주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를 기다리리라'고 하시는 하나님은 비록 우리 쪽으로 등을 돌리고 계시는 것 같지만, 그 진심은 결코 포기나 무관심이 아니라 사실은 저와 여러분이 '회개의 말'을 붙여 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픈 매까지 드시면서 우리를 미워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사실은 당신의 모든 관심과 사랑을 더욱 저와 여러분 쪽에 집중시키시면서 우리의 발걸음의 소리가 당신 쪽으로 점점 더 가까이 들리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여전히 기다려 주실 때, 아직은 '은혜의 때'와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고 있을 때에 손들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 앞으로 돌아와서 그 주님을 다시 만나며 이전보다 더 사랑하며 교제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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