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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이 진정, 그리스도인이... (행 11: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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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진정, 그리스도인이... (행 11:19∼26)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의 향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푸른 초원의 잔디가 풍기는 신선한 초향이 있습니다.  깊은 산 속 숲과 나무와 물과 바위가 어우러져 풍기는 신비의 향기가 있습니다.  흙이 풍기는 생명의 향기가 있습니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바다가 풍기는 강력한 향기가 있습니다.  잘 익은 온갖 과실들이 발산하는 신선한 향기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저마다의 독특한 향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향기를 잃어버리면 그때부터는 악취가 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에게도 저마다의 냄새가 있습니다.  젊고 씩씩한 젊은이들에게서 풍기는 생명의 채취가 있습니다.  잘 다듬어진 여인의 얼굴에서 풍기는 향수의 향기가 있습니다.  넉넉한 인품에서 밀려오는 그윽한 향수가 있습니다.  모름지기 사람은 술에 취하듯이 향기에 취합니다.  아름다운 향기는 음미하면서 그 냄새를 맡습니다.  맑은 향기는 기쁨과 감사와 존경을 줍니다.  그러나 악취는 코를 틀어막습니다.  악취가 나는 곳에는 사람들이 가지를 않습니다.  향기가 나는 곳에는 나비가 찾아오고 벌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악취가 나는 곳에는 똥파리만 날아들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는 모든 생명에는 저마다의 아름다운 냄새가 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믿음의 가정과 자녀는 향기로운 냄새가 나야만 합니다.  아름다운 냄새가 나야만 합니다.  생명의 냄새가 나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기쁨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거룩한 두려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악취가 나는 사람을 세상 사람들은 가볍게 취급할 것입니다.  거룩한 믿음의 향기가 없는 사람을 세상 사람들은 업신여기고 조롱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일어나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당신의 삶에서 거룩한 향기를 뿜어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제일 무서운 질병은 생각의 질병입니다.  이것은 고칠 약도 없고, 고칠 병원도 없고, 고칠 의사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이 병들지 않아야 합니다.  생각이 건강해야 합니다.  생각이 삐뚤어지면 안됩니다.  생각이 병들면 안됩니다.  생각이 병들면 자기만 힘든 것이 아니라 자기 주변의 사람들도 힘듭니다.  생각이 병들면 자기만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변의 사람들도 파괴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시간마다 때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자기 생각을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지켜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의 공통점은 힘들고 괴로운 입장에 놓이면 제일 먼저 생각이 위축된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무슨 이런 자격이나 능력이 있을까?" 하는 자격지심이 일어나면서 생각이 제일 먼저 위축됩니다.  움츠러들면 나라도, 백성도, 개인도 큰일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외쳐야 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움츠러들면 큰일입니다.  가난, 실패라는 말의 성경의 원뜻은 '포토코스'라는 말로 '움츠러들다'는 뜻입니다.  초원에 사는 동물들이 막 달리다가 힘이 들면 움츠러듭니다.  그러면 큰 동물이 달려들어 잡아먹어 버립니다.  우리도 움츠러들면 사탄의 밥이 됩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생육하고 번성하고 다스리고 뻗어나가야 됩니다.

먼저 그 생각이 뻗어나가야 됩니다.  움츠러들지 말고 높은 생각을 가지고 뻗어 나가십시오.  입을 크게 여십시오.  생각을 크게 가지십시오.  패배했다는 생각이 들 때, 다시 만군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다시 크게 생각하십시오.  크게 생각하는 사람이 큰 것을 이루는 것입니다.  크게 생각하는 사람은 웃는 것도 크게 웃습니다.  겸손한 자일수록 잘 웃고 잘 웃기는 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취급받습니다.  그런고로 늘 자기 생각의 질을 높이려고 애써야 됩니다.  사고 방식을 최고도로 가지려고 힘써야 됩니다.  언제나 바른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믿음은 모든 미완성을 수용하는 능력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모든 미완성을 하나님의 복된 미래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립니다.  자신을 향해 이렇게 외칩시오.  "아직도 내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생명의 성급한 판단을 뒤로 미루고 우선 해야 할 일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주 안에서 일어나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오늘 봉독한 말씀에 보면 안디옥이라는 곳에서 처음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흔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만, 그러나 초대교회 당시에 처음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워질 그때에는 그 의미가 지금과 같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간 초대교회 당시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의 삶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되돌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로,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어려움을 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계 2차 대전 때 태평양 한 가운데서 미 해군 함정 한 척이 적군의 포 사격을 받고 가라앉을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이 배가 가라앉지 않게 하려고 선원들은 배 안에 있는 모든 무거운 물건을 바다 속에 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자연히 우선 순위를 생각해서 덜 중요한 것부터 바다에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최후까지 던지지 않고 가지고 있었던 것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 하나는 먹어야 하는 양식이었습니다.  먹어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죽은 해군 병사의 수첩 속에는 그들의 애인의 사진이 최후까지 남아 있었던 유품 중에 하나였다고 합니다.  생명이 끝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이 붙들고 있기를 원했던 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영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는 고백을 할 수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분이신 까닭은 그분이 나의 구원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분이 나의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나의 소망이시고, 나의 능력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분은 나의 사랑이 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아보려면 그를 위해서 어떠한 어려움도 감당할 수 있는가를 물어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 어떠한 고난도 받으실 각오가 서 있습니까?
여러분은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교회를 위해서 땀 흘리는 수고를 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교회를 위해서 어떠한 희생도 감당할 수가 있습니까?

사랑에는 수고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수고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 수고하는 것을 사양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힘들고 어렵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의 수고가 얼마나 큽니까?  그러나 이 수고, 이 고생을 짜증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그 수고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본문 1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9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죄 아닌 죄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순교 이후 수많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박해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성도들은 핍박이 일어나자 흩어져서 안디옥에까지 내려가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정착하게 됩니다.  안디옥에서 교회를 세우고 함께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림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상한 것은 그들이 그렇게 어려움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러 곳으로 뿔뿔이 흩어져 피난을 가면서도 주님을 더욱 힘써 전하는 복음의 전도자로 변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하면 그 어려움의 원인에서 도피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정반대의 현상이 얼어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무엇을 위하여, 또는 누구를 위하여 어려움을 겪을 때 거기에서 도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의 원인에 대해서 더 강한 애착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모성애라는 말을 씁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보다 어머니의 사랑이 더 강하다고 말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무래도 어머니는 자녀를 낳기 위해 피를 흘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더 많은 수고를 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자녀를 위해서 더 많은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자녀가 어머니에 대해서 더 강한 애정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위해서 수고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교회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교회를 위해서 땀을 흘리고 교회 때문에 어려운 일을 당해 보십시오.

혹자 어떤 사람은 교회에 정이 가지 않는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교회를 위해서 수고를 해 본 경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런가하면 또 어떤 사람은 교회에 사랑이 없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위해서 진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사랑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은 결코 교회가 사랑이 없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에 관계해서 주님의 일을 나누는 수고에 동참하여 보십시오.  우리는 교회를 위해서 시간도 들여야 합니다.  땀도 흘리셔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셔야 합니다.  지금까지 교회를 섬겨 오면서 제 나름대로 경험한 바에 의하면, 정말로 교회에 깊숙이 헌신하여 주님을 섬기지 않고서 신앙이 자란 사람을 본 일은 없습니다.

물론 때로는 어떤 분은 교회에 깊이 관계해서 일을 하시다가 시험을 받고 "교회 일에 관여하면 골치가 아프다"라고 말하는 분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은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교회 일에 관계하지 않습니다.  그런 분들은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고작이고, 축도가 끝나자마자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현명한 신앙생활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되니까 교회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가 없게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에 대한 사랑을 베풀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나마 가지고 있던 신앙까지도 다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내가 사랑하고 싶은 대상을 위해서 땀을 흘리고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는 수고가 없이 우리는 그 대상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초대 교회 성도들이 주님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더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이 놀라운 역설을 보십시오.  이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  로마 시대 당시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받았던 박해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로마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에게 찢겨 죽임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불에 태워져 죽임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어려움을 당했지만 예수 믿는 성도들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은 더 늘어갔고 결국에는 그렇게 박해를 하던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에게 붙여준 별명입니다.

"저들이 예수 때문에 저렇게 어려움을 당하고 흩어져 여기까지 왔으면서도 또 다시 소리 높여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을 보니 저들은 정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가 보다"
그래서 그들은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도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삶 속에 그리스도를 위해서 수고한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묻습니다.
당신은 진정 그리스도인입니까?  당신이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를 위해서 어려움을 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이 힘이 든다고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두 번째로,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본문 23절에 보면 안디옥 교회의 사역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바나바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 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3절을 함께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믿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그 당시 성도들에게 바나바가 외쳤던 하나님의 말씀은 "주께 붙어 있으라"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주님께 붙어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주님께 붙어서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초대 교회 당시 문서를 참고해 보면,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도 했는데,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또는 '작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로도 해석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이웃이 저와 여러분을 바라보면서 작은 그리스도를 느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입술을 여는 순간마다 증거되는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향기,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예수쟁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 말이 자신에게 붙여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은 '예수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이 소리가 듣기 싫어서 믿지 않는 사람과 섞일 때 예수 냄새를 지우려고 애쓰는 분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냄새를 안 피우고 어떤 냄새를 피우기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을 만나서 접촉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에게서 맡은 냄새가 어떤 냄새라고 생각하십니까?
돈 냄새입니까?  자존심의 냄새입니까?  명예의 냄새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를 접촉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생명의 주님을, 우리가 자랑하는 그리스도를, 우리가 생애를 걸고 닮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의 냄새를 맡는 그 신선한 충격, 그 거룩한 충격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만난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주님과 같은 이름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 작은 그리스도인"  이 말 속에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된 행실 때문에 오늘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모욕을 당하고,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일그러진 모습으로 내 이웃에게 전달되고 있다면 이 책임을 누가 져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습니다.  사랑으로 사람들을 품에 안으시고 그들을 고쳐주시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켜 주시던 그 주님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의 흔적과 냄새가 오늘 우리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러시아의 군인 하나가 나폴레옹의 군대에게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군대의 군사들이 포로로 잡은 러시아의 병사에게 이제는 그가 나폴레옹의 군대에 속하게 되었다는 표시로 그의 팔에 N자를 새겼다고 합니다.
이때 러시아 병사는 물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오?"
나폴레옹 군사가 대답합니다.
"그 N자는 네가 오늘부터 나폴레옹 대제에게 속했다는 표시야"
이 말을 듣자마자 러시아 군사는 칼을 뽑아 자기의 팔을 잘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기의 팔을 내던지면서 하는 말이
"내게는 한 주인만 있을 따름이요.  내게 두 주인은 없소.  나는 오직 러시아 대제에게만 속해 있을 따름이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셨다면 오늘의 우리는 누구에게 속해 있습니까?
과연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면 그 사실을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 나타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 가운데 예수는 믿지만 예수 믿는 것을 숨기려하고 주님을 부끄러워하는 분은 없습니까?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그렇게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어려움과 고통을 기쁨과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위해 땀 흘리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 분들 때문에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세 번째로,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말은 우리 마음의 거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 속에 반복되어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 조심해서 들어보십시오.  바로 그것이 그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일 것입니다.

본문 19절과 20절의 말씀을 다시 함께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이들은 예수님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더 이상 예루살렘에 있을 수가 없어서 멀고 낯선 도시로 피난을 왔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생각으로는 집을 장만하고 정착하는 일이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그들은 흩어져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삶의 우선 순위는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전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루살렘에서의 나의 주님은 안디옥에서도 나의 주님이셨습니다.  순경 속에서의 주님은 역경 속에서도 나의 주님이셨습니다.  젊은 날의 나의 주님은 인생의 석양 속에서도 변함없이 나의 주님이셨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더 뜨거워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애정으로 내 발걸음이 머무는 곳마다 전파했던 예수, 그 분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주 예수를 전파하니"  예수님이 그들의 구원이고 생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십니다."  이렇게 전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적절한 별명을 붙인 것입니다.  "저들은 그리스도인이구나"  그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가 최고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며 사람들을 구원하고 그들의 삶을 바꾸는 것이 최고의 관심이었습니다.

"저 그리스도인들을 보라."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온갖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사회에 아름다운 향기를 날리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성도들을 향하여 불렀던 외침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봉독한 본문의 말씀과 사도행전 26장 28절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26장 28절에 보면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전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의 전도를 받은 아그립바 왕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전도하는 사람'이라는 말과 일치될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생활이 변화된 체험을 간증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위해 생명을 던져주신 바로 그분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습니까?
 
묻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가 참으로 여러분을 위해서 죽으신 것을 믿으십니까?  그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잠잠할 수가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나 위해 죽은 사실을 몰라서 입니까?  아니면 이 사실을 믿지 않아서 입니까?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사실을 믿으십니까?  나 위해 주님이 보혈을 흘리신 사실을 믿으십니까?  주님이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음을 여러분은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예수를 외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까?  왜 침묵하십니까?  그 침묵은 비겁한 침묵이 아닙니까?  그 침묵은 부끄러운 침묵이 아닙니까?  그 침묵은 주님의 사랑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이 정말 나를 위해서 자신의 전부를 주시고, 그래서 그 분이 내 생명이 되셨다고 내가 고백할 수 있다면 나는 주님을 위해서 입술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에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 믿지 않는 사람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 등록하고 주일마다 교회에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전하지 아니하고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은 진정 그리스도인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를 위해서 어려움을 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싫어하지 않고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변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파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믿는 성도들이 붙여준 별명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신실하게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을 가리켜 붙여준 별명입니다.
"아무개는 그리스도인이다."
"아무개야 말로 누가 뭐래도 그는 분명한 그리스도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저들을 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박해의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안디옥에는 달콤한 유혹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거룩한 백성,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고자 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는 이와 같은 거룩한 자존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갖는 영광스러움을 회복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어느 높은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예수님의 참 제자입니까?  누가 진정 그리스도인입니까?
주의 손에 붙잡혀 성령 충만한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어려울 때 일 수록 더 주님의 일에 헌신하고 충성하는 사람이 진정 그리스도인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묻습니다.
당신은 진정, 그리스도인입니까?
당신이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정말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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