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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 당신께서 말씀하옵소서 (욥 3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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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께서 말씀하옵소서 (욥 32:1~10)
  

역사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과 <의미>입니다. 우선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사실들은 <자료>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 사실들이 오늘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의미는 어디서 얻는 것일까요? 의미는 <해석>에서 옵니다. 그래서 역사에서 해석학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그렇습니다. 우선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지, 그 내용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해석은 인생을 사는데도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해석에 대한 태도에 따라서 몇 종류의 사람을 생각하게 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인생의 해석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 자신에게 발생하는 일들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마음 움직이는 대로, 본능에 따라,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면 된다고 여깁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냥 편하게 살아!>하고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합니다. <왜 난 여기 있어야 하는가? 왜 난 이 일을 해야 하는가? 왜 난 이 사람과 살아야 하는가?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이런 문제를 심사숙고하고, 그 대답을 발견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을 결정할 때도 매우 신중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기 인생의 문제를 해석하려고 애쓸 때 어떤 때는 해석이 아주 쉬워서 별 문제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전에는 가난했는데, 지금은 부자가 되었다고 해 봅시다. 그런 일은 별로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 그 동안 열심히 일을 하더니 부자가 되었어>라든가, <그 사람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더니 하나님께서 들으신 게 틀림없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해석이 늘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도저히 해석이 안 되는 일들도 많습니다. 욥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욥은 어느 날 갑자기 재산도 잃고, 자녀도 잃고, 건강도 잃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하여 저마다 해석을 내 놓았습니다. 우선 욥 자신의 해석은 어떻습니까? 욥은 자신이 억울하다고 하소연합니다. <난 이런 큰 재앙을 만날 정도로 죄를 지은 일이 없어. 과거엔 내가 잘 살았는데, 지금은 이렇게 고통 중에 있어.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기 때문이야. 내가 어떻게 그 하나님께 대항하겠는가!> 이게 욥의 해석입니다.

그 다음으로 욥의 세 친구들의 해석입니다. 그들은 욥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남이 모르는 숨겨진 큰 죄로 인해 이런 무서운 결과가 왔으니, 지금이라도 하나님 앞에 회개하라>고 합니다. 

자, 이렇게 해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의 해석은 아무런 유익이 없었습니다. 서로 상처만 받았습니다. 그런 중에 제3의 해석자가 등장했는데, 오늘 본문에서 보는 <엘리후>입니다. 그는 나이가 적었기에 처음에는 끼어 들기 미안해서 듣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참지 못하고 자신의 해석을 이야기하게 된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말하리라> <내 말을 들으시오>라고 한 후, 37장까지 엘리후의 긴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특정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을 내놓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도 저마다 시대의 해석자임을 자처합니다. 사람들마다 <내 말을 들어 보라>고 합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도 열심히 의견과 해석을 내놓습니다. 

사람들에게만 <내 말을 들어보세요>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께도 <내 말을 들어보세요>라고 합니다. 기도할 때가 그럴 때입니다. <하나님, 내 말 좀 들어보세요. 나도 할 말 많습니다. 아직 안 들리십니까?> 이러면서 우리 생각을 더 열심히 쏟아 놓습니다. 이런 우리에 대해 하나님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실까요?

여기서 다시 욥기로 돌아갑시다. 엘리후가 제3의 해석자로 등장하여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그로써 욥이 처한 상황이 모두 이해되고 논쟁이 종식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욥과 친구들, 그리고 상당히 논리적인 엘리후의 해석도 궁극적인 해결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말로 해결되지 못했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엘리후의 말이 끝난 후, 38장부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38장 1절 이하를 보십시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여기서 끼어 들듯이 나타나서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욥과 친구들, 엘리후가 하는 말들로서는 문제의 본질을 설명하고 해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많은 말을 한다고 해도 벽에 부딪히기 때문입니다.만약 그들의 말로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면, 굳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너희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하신 모든 일들을 알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낮과 밤을 정하실 때, 그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를 조성하실 때, 그 안에 생명을 가진 모든 동식물들을 살게 하실 때, 우주만물이 질서 있게 움직이게 하실 때, 그것을 보고 안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이는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태어나기 불과 일 분 전의 일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너희가 어떻게 세상의 모든 일, 인생의 모든 일, 하나님의 모든 일에 대하여 말할 수 있으며, 해석할 수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들은 입을 다물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자신들의 해석을 내 놓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해석은 멈추고, 하나님의 말씀만 선포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 번째 사람을 생각하게 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인생의 일들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해석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인생의 모든 일에 매우 심각한 생각을 하는 사람인데, 불행하게도 인생의 문제가 잘 해석되지 않을 때가 많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세 번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삶에 깊은 애착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본능에 따라 대충 살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첫 번째 사람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인생에 발생하는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하여 스스로 해석하길 정중하게 포기합니다. 그가 해석을 포기하는 이유는 아무리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해석을 해도, 그것으로는 문제를 이해할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해석을 다른 분, 곧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 제 인생을 해석해 주십시오. 저 스스로 해석하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저를 인도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손에 맡기나이다>라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스스로 해석하려고 애쓰는 두 번째 사람과 구별됩니다.

그런데 욥기를 죽 읽어보십시오. 욥은 점차 두 번째 사람에서 세 번째 사람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일에 대해 스스로 해석을 시도하면서 친구들과 맞섰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시작된 후, 스스로 해석자가 되려 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깨닫고, 스스로 해석하는 일을 포기합니다. 40장 1절 이하를 보세요.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의 의미를 스스로 해석하면서 조금도 지지 않으려던 욥이 이제는 마음을 비우고 해석자의 연단에서 내려왔습니다. 이게 바로 욥기가 전개되면서 욥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여기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욥이 더 이상 해석자가 되길 포기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그의 문제도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욥이 말하고, 하나님은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욥은 듣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끝났을 때, 42장에 보면 그가 당한 재앙은 물러갔고, 그의 인생은 전보다 더 아름답게 회복되었습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에 오늘 우리가 새겨야 할 은혜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발생하는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 제대로 해석이 되지 않는 아픔과 시련들, 이런 고통스런 문제들로부터 어떻게 벗어나시겠습니까?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해석자가 되길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석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해석하시는 말씀에 따라 무조건 순종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의 말씀에, 그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에 우리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은 순종을 가져오고, 참된 순종에는 질문이 없습니다. 학생은 질문을 잘 해야 합니다. 학생은 질문을 통해 성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실의 학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제단 앞에 무릎꿇은 신앙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질문이 필요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순종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어느 날 그의 전 생애를 바꾸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신 일이었습니다. 태어나서 자란 곳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간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왜 가라고 하시는가, 간다면 어디로 가게 되는가...>등의 의미를 스스로 해석하려고 하지 않았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순종하여 고향을 떠났습니다. 어떤 의미로 보면 그는 아무 대책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가장 강력한 대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떠나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미래를 준비하실 줄 믿었습니다. 이런 그의 모습을 히브리서 11장 8절은 말씀하기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라고 했습니다.

이 뿐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을 때도 그는 <왜 아들을 바치라고 하시는가, 그 후에 난 어찌되는가> 등>을 스스로 해석하려 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들과 함께 길을 떠났을 뿐입니다. 

그러나 아들 이삭은 달랐습니다. 아버지는 질문이 없지만, 이삭은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그 때 아브라함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준비하시리라>고만 대답합니다. 그는 <번제의 어린양은 바로 너다. 그렇지만 내가 잘 해결할 거다. 내가 너 없이 어찌 살겠느냐> 는 등의 말도 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 때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이 탐이 나서 바치라고 하시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나의 믿음이다> 그러기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자신을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의 심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얘, 어쩌면 네가 제물이 된다. 그러나 너 혼자 제물이 되는 게 아니다. 네가 아무 것도 모르는 이 시간, 이 애비는 이미 제물이 되어 있단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던 그 순간부터 이미 나는 나를 드리고 있다. 지금 산을 오르는 내 발걸음 하나 하나가 내 심장에 칼을 꽂아 그 분께 드리는 제사란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의 마음에 한 가지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그래서 그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그냥 맡긴 것입니다. 그 때 어떻게 되었나요? 하나님은 양 한 마리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 양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아브라함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순종 보다 더 강력한 대책은 없는 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삭을 쉽사리 내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왜 내가 이삭을 놓아야 하는지, 타당한 이유를 대 보시오>라고 요구합니다. 아니 적어도 스스로라도 그 해답을 발견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 해답을 얻으면 이삭을 내놓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신앙은 말의 영역에 있지 않고, 삶의 영역에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만 하십시요. 

제가 부산에 부임해 올 때도 그러했습니다. 저를 청빙했을 때, 많은 분들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더. 그 분들은 하나같이 반대했습니다. <부산은 복음화율이 낮고, 목회가 잘 안 된다. 네가 무엇 때문에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으로 가겠느냐>고 했습니다. 그 때 유일하게 아버님만이 순종하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지금까지 제일 먼저 연결되는 곳에 무조건 가겠다고 기도하지 않았느냐? 기도했으면 순종하면 되는 것이지, 무엇 때문에 자문을 구하느냐? 기도는 뭐하러 했느냐?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무조건 인도하시는 대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때 아버님의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그 후로도 <왜 내가 부산에 살아야 하는지, 왜 본 교회의 목사로 살아야 하는지, 이 지역을 복음화하려면 잘 도와줄 이런 저런 일군들과 넉넉한 환경이 필요한데, 누가 그것을 채울 것인가, ....> 하는 등등의 많은 질문이 제기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제 나름의 해석을 시도하고, 하나님을 통해 그 해답을 명확히 알고 싶은 욕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그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뿐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모든 이유를 명확히 알기 때문에 머물거나, 모르기 때문에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뿐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아름다운 승리의 날로 인도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가끔 인생의 모든 숨겨진 면들을 다 명확히 알고 사는 듯이 말씀하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분들은 이런 식으로 간증합니다. <그 때 난 하나님께 물었지요. 왜 그렇게 되었느냐구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난 그 때 분명히 보았습니다. 알았습니다.....> 참 확신으로 가득한 듣기 좋은 이야기지요. 부럽습니다. 그러나 한 면으로 걱정도 됩니다. <만약 앞으로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면 어떻게 하는가? 욥에게 아무 말씀도 없이 재앙이 임한 것처럼 하나님의 대답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을 때, 어떤 해석도 불가능한 순간이 올 때, 그래도 변함 없이 하나님을 따를 수 있을까?.....>

요한복음 21장 21절 이하를 보세요. 주님은 베드로의 질문에 대답하시는 대신 순종만 요구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주님은 그저 <너는 나를 따르라>고만 하셨습니다. 믿음의 순종만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이것저것 모두 다 명확히 알아야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수께끼를 모두 정확히 알고 싶은 충동에 빠지는 사람들이 점쟁이를 찾게 됩니다. 그러나 그 점쟁이도 자신이 점쟁이로 살 줄 알지 못한 인생에 불과합니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입니까? 

저는 믿습니다. 우리 인생에 많은 의문이 있고,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도 많지만, <한 번도 우리를 실망시킨 적이 없으신 하나님께> 우리 삶의 모든 해석을 맡기고, 미래를 맡길 때,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아름답게 인도하실 줄로 믿습니다. 

언젠가 <부산과 경남이 왜 잘 복음화되지 않는가>를 두고 세미나가 열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패널로 참석하여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것은 세미나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세미나는 말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부산의 복음화는 말로써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입을 다물도록 합시다. 우리의 입이 다물어질 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것입니다. <말하는 기도>가 멈추고, <듣는 기도>가 시작될 때, 그리고 질문 없이 무조건 순종하기 시작할 때, 그 손길에 우리 인생을 맡길 때, 하나님은 일하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엘리후가 되려고 시도하지 마십시오. 이 시대의 해석자로 자처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모든 일의 이치를 정확히 알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고, 그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체험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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