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두움에서 빛으로 (막 10:46~52)

  • 잡초 잡초
  • 381
  • 0

첨부 1


어두움에서 빛으로 (막 10:46~52) 


오늘 본문의 주인공 바디매오는 나면서부터 시각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단 한 가지 장애, 볼 수 없다는 것으로 인해 그는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행복의 조건을 박탈 당하고 말았다. 그의 아버지도 소경이었기 때문에 아들에게 물려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태어난 아들이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 아버지는 땅을 치고 통곡했을 것이다. 

아버지도 소경, 아들도 소경, 아버지도 거지, 아들도 거지. 이런 비참한 인생이 또 어디있겠는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들이 사는 동네가 여리고였다는 것이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관문과 같은 곳이었다. 예루살렘에 비해 기후가 온화하고 땅이 비옥해서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이었다. 바디매오 같은 장애를 가진 거지들이 살기에도 좋은 곳이었다. 

(막 10:46)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어떻게 됐는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이 만남이 그의 생애를 뒤집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 인생의 가장 밑바닥, 어두움 속에서 불행한 삶을 살았던 거지 소경 바디매오의 인생 역전의 드라마를 살펴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여리고 방문은 그분의 생애 가운데 마지막 방문이었다. 무리들과 함께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려던 참이었다. 그날도 바디매오는 구걸하기 위해 길가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예수가 지나신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예수의 소문을 들음

(막 10: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그는 이미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알고 있었다. ‘나사렛 예수’란 소리가 들릴 때 동시에 반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만약 그가 예수에 대하여 몰랐다면, 사람들에게 물었을 것이다. 잘 기억이 안났다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했을 것이다. ‘그분이 누구지..?’

그러나 바디매오는 이미 마음 속으로 그를 사모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지체 없이 튀어나온 말이 무엇이었는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는 여기서 바디매오가 예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두 가지 요소가 준비되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1)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이렇게 질문한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니이까?” 이때 예수께서 이렇게 답변하셨다.

(마 11:4)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마 11: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난 적도 예수님에게 말씀을 들은 적도 없었다. 단지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예수님을 그는 이미 마음으로 믿고 있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52절에서 예수님이 바디매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녔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의 능력을 보았는데도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예수님에 대한 무지와 불신앙 때문이라 할 수 있다.

47절 말씀을 보면, 무리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다. 그러나 소경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불렀다. 무슨 차이인가? 고백의 차이이다. ‘나사렛 예수’란 말은 별 볼일 없는 동네에서 인재가 났다라는 뜻이고, ‘다윗의 자손 예수’란 말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왕으로서의 예수를 의미하는 것이다. 

믿음의 역사는 올바른 신앙고백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리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날더러 누구라 하느냐?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아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이 그를 칭찬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여러분! 무엇을 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주님께 대한 올바른 고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의 고민, 고통, 나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요청해야 한다.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 나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무지와 불신앙이 가장 큰 원인이다. 


2)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향하여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호소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이 불쌍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소경이요, 거지였다. 그의 아버지도 소경이었다. 2대를 걸쳐 이어진 불행한 현실을 알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에 얽힌 일화가 있다. 
어느날 강을 건너는데 이 철학자는 뱃가에 걸터 앉아 땀을 흘리며 노를 젓고 있는 사공에게 인생에 관해서 열심히 가르치고 있었다. 이때 배알이 뒤틀린 사공이 노를 반대 방향을 젓자 배가 흔들리면서 소크라테스가 물에 빠지고 말았다. 사공이 철학자를 물에서 건져낸 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남 가르치기 전에 당신 자신이나 잘 아슈.’ 그래서 생겨난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 ‘너 자신을 알라!’
인생의 불행은 자신을 잘 모르는데서 기인한다. 성경 계시록에 소아시아 7교회가 소개되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인 라오디게아 교회가 주께로부터 책망을 받았다.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자신을 모르는 것은 일종의 교만이다. 기도하지 않는 이유, 기도해도 부르짖지 않는 이유는 아직 내가 의지할 것이 많다고 교만한 생각 때문이다. 

창원의 양곡교회, 지용수목사님이 미국 보스톤에서 설교를 마친 후 기도회를 인도하는데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는 부부가 있었다. 집회를 마친 후 그 교회 목사님에게 물었다고 한다. 
- 왜 저 부부는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는가요? 

담임목사님이 집회 후에 설명해 주었는데, 부부가 서울공대 출신으로 교회에서 교만 거만을 떨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코암에 걸려 살 확률이 40%도 안된다는 선고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중보기도팀에 릴레이 기도를 하고 전교인이 기도를 해 주었는데 수술이 잘 되어 완치되었고 그 후부터 너무 감사해서 항상 바닥에 내려와 기도한다는 것이었다. 

성도 여러분! 자신의 실력이나, 재물, 지식을 의존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다. 쥐고 있는 것 다 내려 놓고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알고 바디매오처럼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을 때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장애물을 넘어서

(막 10: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바디매오를 꾸짖었다. 그에게 조롱과 멸시의 언사가 퍼부어 졌다. ‘소경 주제에, 조용히 하지 못해!’ 

그러나 바디매오는 그치지 않았다. 도리어 더 큰 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이 조롱하고 야단을 치면 칠 수록 더욱 소리를 질렀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장애를 배려해서 예수님께 나아가도록 도와주지 않았다. 귀찮은 존재로만 여겼을 뿐이다. 그곳에 모여 있던 무리들도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었지만 도리어 상처를 주었다. 그러나 모든 모욕을 당하면서도 그치지 않았다. 이 모습을 통해 우리는 예수께로 가까이 나아가고자 할 때, 기도하고자 할 때 장애물에 부딪힐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믿음으로 나온다고 즉각 즉각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청년이 음료수 자판기를 손을 때리고 발로 차고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볼멘 목소리로 동전을 넣었는데 자신이 원하는 음료수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종종 자신이 원하는대로 되지 않았다고 하나님을 손을 치고 발로 차는 교인들을 만나게 된다. 동전을 넣으면 음료수가 금방 튀어나오는 것처럼 즉각 즉각 문제를 해결받으려는 조급한 마음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급한 것은 급한대로 즉각 응답이 되고 문제가 해결되기도 하지만 어떤 것은 몇 년이 지나도록 전혀 응답이 없은 경우도 있다.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눅 18: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난한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매일 매일 찾아가서 귀찮게 했더니 결국 그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 18: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눅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장애물이 나타난다고 주저 앉아 불평하고 낙심하기 보다는 장애물을 극복하려는 용기와 인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예수님과의 감격적 만남

(막 10: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막 10:50)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막 10: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눅 10장,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 만나 거반 죽게 된 사람을 제사장이 보고도 그냥 지나갔다. 레위인도 보고 그냥 지나갔다. 사람들은 때때로 내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절실히 도움을 요청할 때 외면하고 그냥 지나갈 때가 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부르짖는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가던 길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를 불렀다. 바디매오는 겉옷을 버려둔체 뛰어 일어나 예수께로 나아갔다. 예수님께로 나아갈 때 믿음의 길로 나아갈 때 바디매오와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 어느 목사님의 조언 4가지를 기억해 둘 만하다. 
1)뒤돌아보지 말 것 2)곁눈질하지 말 것 3)중단하지 말 것 4)최선을 다할 것.

이때 예수께서 바디매오에게 물으셨다. 
-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는 돈이나 양식을 구하지 않았다. 돈이나 양식은 사람들에게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줄 수 없는 것, 사람들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예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것 - 보는 것 -을 구했다. 

(막 10: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바디매오의 구한 것은 정확하고 간략했다. 그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을 구했다. 예수님은 그 소경의 소망을 즉시 이뤄 주셨다. 일반적으로 구하기는 많이 하는데 응답율이 저조한 이유는 무엇인가? 정확하게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활을 쏘는데 한 사람은 달을 보고 쏘고, 다른 한 사람은 과녁을 보고 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성공할 수 있는가? 

(약 4:2)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약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사람들에게 기도 제목을 물어보면 분명치가 않은 경우가 많다. 모호하기가 짝이 없다. 
예)건강하게 해 주세요. 공부 잘하게 해 주세요. 사업 잘 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예수님께 구할 만한 것을 구하지 않는다. 바디매오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도전적이다. 그의 간구는 간단하고도 분명했다. 만약 그가 예수님 앞에 양식이나 의복을 구했다면 예수님께서도 실망하셨을 것이다. 


소경에서 주를 따르는 제자로

(막 10: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마 20:34)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구속함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예수만 따라 간다. 다른 은혜를 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아마 그는 누구 못지 않은 신실한 주의 제자가 되었을 것이다.

절망 가운데 놓여 있던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복된 인생이 되었다. 주님의 손이 그를 만지시므로 육신의 눈도 뜨고 영적인 눈도 열려져 주님의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 마치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과 같은 놀라운 변화를 맞게 된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헬렌 켈러에게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앞을 보지 못하니 얼마나 답답하세요?
그러자 헬렌 켈러가 이렇게 답변했다고 한다.
-답답하지요. 그러나 두 눈을 뜨고도 내일을 보지 못하는 사람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정말 불행한 것은 물질의 어려움이 아니다. 육신의 질병이 아니다. 배움의 적고 많음이 아니다. 정말 불행한 것은 육신의 눈이 성한대도 주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 불행한 것이다. 


소경이었던 바디매오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

1)예수님을 바르게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진정한 구원자이며, 도움이 되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 들어야 한다. 지식적인 앎은 믿음을 발생시키지 못한다. 사모함이 있어야 한다. 

2)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의 눈 먼 것과 귀먹은 것, 불쌍한 모습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쥐고 있는 것 놓아야 한다. 놓지 않으면 자신의 불쌍한 것을 인정할 수 없게 된다.

3)장애물 앞에 뒤로 물러서지 않는 열심과 끈기 인내심이 필요하다.
장애물을 치고 넘어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4)구할 것을 바르게 확실하게 구하라는 것이다.
애매하게 구하면 애매하게 응답하신다. 

어느 날 히브리서를 읽는 중에 이 말씀에 마음에 와 닿았다. 그리고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래서 그 후로 내 마음에 담고 묵상하는 성경 구절이 있다.

(히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우리는 질그릇처럼 연약하고 볼품 없다. 그러나 우리 안에 보배로우신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주님과 함께 당당히 어두움을 비추며 새로운 믿음의 역사를 이루는 제자가 되길 바란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