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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마 7:7~11) -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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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마 7:7~11)


여러분 앞에 멋진 차가 한 대 있습니다. 디자인이 훌륭하고 차 안은 넓고 아늑합니다. 모든 첨단 장비를 갖추고 있으며 더욱이 연비조차 1등급으로 기름 값이 적게 듭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름 탱크에 연료가 없다는 것입니다. 보기에는 좋은데 전혀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산상수훈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윤리는 얼마나 모범적이며, 그 지향하는 목표는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러나 그 이상이 아무리 훌륭할지라도 그것을 행할 힘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처지가 그렇다 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좋고 그렇게 살고도 싶지만 우리 육신이 연약하여 행할 힘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산상수훈의 동력실과 같다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멋진 차를 운전할 수 있는 동력을 공급하는 것이 우리가 읽은 이 말씀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주님께서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오른 편 뺨을 친 자에게 왼편 뺨마저 돌려 댈 수 있겠습니까? 먹을 것 입을 것에 대한 염려로 가득한 이 시대에 어떻게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눈의 들보보다는 다른 사람 눈의 티끌이 더 크게 보이는 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않는 태도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포기해야 할까요? 아무리 좋아도 실천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산상수훈이 마무리되어 가는 이 시점에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의 능력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는 이상처럼 보이지만 기도하는 자에게 주님께서는 이 이상을 성취할 수 있는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산상수훈의 말씀들은 기도를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

사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는 말씀은 기도의 ABC입니다. 간절히 기도하면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무엇이든지 구하면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는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들어주셨다는 기도의 간증을 많이 듣습니다. 또 설교 시간에도 이처럼 간절히 기도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도에서 무엇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은 기도의 내용입니다.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입니까? 아니면 자기 욕심을 구하는 기도입니까? 우리 기도를 한 번 분석해 보십시오. 우리들 기도의 대부분은 나와 우리 가족의 축복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배우자의 건강과 승진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자녀의 시험 합격과 취직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는 가정의 물질적 축복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한국교회는 얼마나 기도를 열심히 합니까? 새벽기도에 철야기도, 문제가 생길 때마다 성전에 와서 작정하며 기도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런 기도의 열심에 비해 한국교회의 윤리적 수준은 많이 떨어집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분들 중에는 간혹 인격적으로는 별로 존중받지 못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기도의 양이 적어서입니까? 아닙니다. 기도의 내용이 문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주님께서 기도에 대한 이 약속의 말씀을 산상수훈의 일부로서 말씀하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산상수훈은 기도의 방향을 지시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을 가르쳐줍니다. 기도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의 인격을 닮는 데 있습니다. 차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목적지를 향해서 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밤늦도록 일을 합니다. 그는 자신이 목표한 일을 하룻밤에 끝내지 못하면 다음날에 또다시 도전합니다. 그는 함께 일하는 동료의 모든 행동들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소중히 여깁니다. 그는 적은 소득에도 목숨을 걸고 일을 합니다. 그는 아주 값진 물건도 단 몇 푼에 팔아버릴 수 있는 너그러움이 있습니다. 그는 위기와 시련도 잘 견뎌냅니다. 그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무슨 일인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인 줄 아십니까? 그는 불행히도 도둑입니다. 이것은 중세 어떤 랍비가 쓴 “도둑에게서 배울 점”이라는 글입니다. 방향이 잘못되면 아무리 능력 있어서도 오히려 없느니만 못합니다. 잘못된 사람에게 탁월한 능력이 주어지면 그것은 더 큰 독이 됩니다. 우리는 산상수훈의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 기도의 방향과 내용을 정립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또 산상수훈 말씀들을 묵상하며 우리 기도 내용들을 전검해야 합니다. 우리가 간구하는 것들 중에는 정말 쓸모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땅에 것이 너무 많습니다. 산상수훈은 우리 기도들 중 쓸모없는 것들을 내려놓게 합니다. 

프랑스 파리의 어느 수도원 입구에 큰 돌비석이 있는데, 그 비석의 비문에는 “aprés cela, aprés cela, aprés cela”(아쁘레 셀라)라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불어인데 그 의미는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그 다음은”입니다. 이 비문이 생긴 유래는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어느 법과대학 졸업반에 다니던 학생이 고학을 했는데 나머지 한 학기 등록금을 도무지 댈 수 없어서 한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학생의 도와달라는 호소에 신부님은 “마침 조금 전에 어떤 교인이 좋은 일에 써달라고 돈을 기부했는데 이 건 분명히 하나님께서 자네에게 주시는 것인 것 같군.” 하며 그 돈을 세어보지도 않고 한 줌 쥐어 주더랍니다. “감사합니다.”하고 그 청년이 돌아서려는데, 신부님이 “잠깐만”하고 그를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네 그 거 가지고 뭘 할 건가?” “등록금 내야지요.”
“그 다음은?” “열심히 공부해야지요.” 
“공부하고 나서는?” “졸업해야지요.”
“그 다음은?” “변호사가 되어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서 의로운 변호를 하겠습니다.”
“좋은 생각이구만, 그 다음은?” “돈을 좀 더 벌겠습니다.”
“그 다음은?” “장가가겠습니다.” 
“그 다음은?” “......”
심상치 않은 신부님의 질문에 청년은 더 이상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신부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다음은 내가 말하지. 자네도 죽어야 되네. 그 다음은 자네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일세. 알겠는가?” 청년이 “알겠습니다.”하고 나오는데 귓가를 떠나지 않고 계속 들리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아쁘레 셀라, 아쁘레 셀라, 아쁘레 셀라”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그다음은......” 견딜 수 없는 그 내면의 소리에 마침내 그는 그 돈을 내던지고 수도원으로 들어갔고, 훌륭한 수도사가 되어 한평생 귀한 일을 많이 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죽으며 그의 묘비에 썼던 묘비명이 바로 이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이 세 마디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닙니까? 그때는 필요한 것 같았는데 지나고 나면 기억에도 남지 않는 쓸데없는 이 세상의 것은 아니었습니까?

산상수훈대로 기도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육적인 건강보다 영적인 건강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육적인 필요보다는 이웃의 필요를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편의 승진보다 우리 남편이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 되라고 기도해야 않겠습니까? 자녀의 시험 합격보다 이 자녀가 이 시험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믿음의 종의 되기를 위해 간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가정의 물질적 축복보다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가정, 하나님 말씀과 가치관을 따라서 살려는 가정이 되도록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기도가 아닙니까? 주님은 그러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그 모든 것을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목회자들은 부흥을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이것은 혹시 자기 욕심은 아닙니까? 부흥이 아니라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교회가 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건강한 교회가 되도록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 눈물 뿌려 기도해 본적이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또 주님의 인격을 닮기 위한 기도는 얼마나 됩니까? 

분명 우리의 문제는 기도의 양이 적어서만은 아닙니다. 우리 기도의 내용이 자기 욕심을 간구하고, 이 땅의 것을 구하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데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우리 기도가 영원한 것을 향하도록 만듭니다. 모든 기도는 산상수훈이라는 용광로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불순물들이 빠지고 주님께서 받으실 만한 기도가 됩니다.  
 

기도의 간절함

산상수훈을 통해서 기도의 올바른 방향을 정한 사람에게는 기도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인간 사회의 비극은 악인들은 능력도 많고 집요한데, 옳은 사람은 능력도 적고 쉽게 포기하는 경향이 많다는 점입니다. 옳은 사람이 큰 능력을 행사할 때 사회가 옳은 길로 갑니다. 산상수훈의 용광로를 통과한 자들은 기도의 파워를 갖추어야 합니다.

오늘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를 보며 저는 무엇보다 거지가 떠올랐습니다. 기도는 거지 같이 해야 합니다. 거지는 오늘 한 끼 밥을 얻어먹지 못하면 굶어야 합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갑니다. 먹을 만한 것이 어디 있나 찾습니다. 온톤 그의 생각에는 먹을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구걸하러 가서는 주인이 귀찮을 정도로 문을 두드립니다. “밥 주시오.” 그러면 주인은 귀찮아서라도 그에게 밥을 줍니다. 여러분 하나님에게도 이렇게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도와 주세요.” 하나님을 귀찮게 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서 이런 거지같은 간절한 기도에 대해서 교훈하셨습니다. 어떤 벗이 찾아 왔는데 자기 집에 먹일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밤중에 이웃 친구집을 찾아갔습니다. 그 집의 문을 두드리며 떡 세 덩이만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친구 집은 이미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밤중에 찾아온 벗에게 지금 문이 닫혔고 우리 아이들이 다 누워 자기 때문에 일어날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그렇지만 이 친구는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며 떡 세 덩이만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주인은 어떻게 합니까? 귀찮아서라도 주지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눅11:8)

여러분이 지금 떡 세 덩어리가 필요한 사람이고 하나님은 지금 불 끄고 잠들어 계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 하나님 보좌를 흔드는 기도가 바로 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귀찮아서라도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또 한 번은 주님은 이런 비유를 전해 주셨습니다. 어느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불의한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마침 이 불의한 재판관 관할에 한 과부가 있었는데 그녀가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이 과부가 그 재판관 앞에 나와 “원통합니다 내 억울함을 풀여주소서” 하며 날마다 하소연을 합니다. 처음에는 빽도 없고 돈도 없는 과부이기에 이 재판관은 무시를 했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귀찮게 하니 재판관의 생각이 바뀌고 말았습니다. 재판관은 속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눅18:4-5) 하고는 그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고 맙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마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18:7) 

기도는 힘도 없고 빽도 없는 무력한 과부의 심정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억울한 일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불의한 재판관처럼 인정사정없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정도로 인색해 보입니다. 이럴 때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당신이 돕지 않으시면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이것이 무례한 기도입니까? 아닙니다. 실상 이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자이심을 믿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짖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되면 좋고요. 아니면 하나님 뜻대로 해주세요.”라는 기도처럼 믿음 없는 기도도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없습니다. 기도의 수고를 하기 싫어 핑계처럼 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게으른 자의 기도입니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간절히 기도하는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땀이 핏방울이 되어 떨어지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알았고, 그 뜻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부르짖는 기도를 더 기뻐하십니다. “얘가 나를 인정해 주는구나.”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열정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하여 자기 뜻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행동하는 기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단순히 기도의 교훈과 관련된 것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삶의 태도가 어떠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자기가 소원하는 것을 찾아 나서는 적극적인 행동과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리는 끈질김을 가르쳐주시는 말씀입니다. 마치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값진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은 태도입니다. 상인은 값진 진주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곳이 어디든 달려갑니다. 달려가서는 정말 귀한 진주이면 자기 전 소유를 팔아 이 진주를 삽니다. 이처럼 찾고자 하는 갈망이 있으면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는 행동입니다.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행동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기도는 기도하는 자로 은밀한 곳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기도할수록 우리는 수동적인 사람이 아니라 행동하는 능동적인 사람이 됩니다. 강원도 태백에 가면 예수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인상적인 글귀가 있습니다.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이다.” 이것은 가만히 앉아서 기도하는 것 못지않게 나가서 일하는 노동의 소중함을 강조합니다. 기도만 해서도 안 되고 노동만 해서도 안 됩니다. 기도와 노동은 함께 해야 우리의 신앙이나 인격이 건전해집니다. 저는 이것을 ‘기도는 행함이다’ 라고 바꾸고 싶습니다. 하나님 앞에 오래 무릎을 꿇은 사람일수록 행동파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삶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으로 영국의 개혁가 윌버포스를 들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어메이징 그레이스”로 영화화되기도 했습니다. 윌버포스는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활약했던 영국의 복음적인 정치인이었습니다. 프랑스가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혁명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면 영국은 윌버포스와 같은 신앙의 사람이 있었기에 유혈 혁명 없이 사회를 개혁할 수 있었습니다. 

1787년 10월 28일, 28세의 영국의 젊은 하원의원이었던 윌리엄 윌버포스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내 앞에 두 가지의 큰 목표를 두셨다. 하나는 노예 무역을 폐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의 잘못된 인습들을 혁파하는 것이다.” 그는 노예제도 폐지와 잘못된 인습 타파를 정치인으로서 부르신 하나님의 뜻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서 열정적으로 일했습니다. 당시에는 노예 무역은 영국의 주 수입원이었습니다. 영국 무역의 삼분의 일에 해당할 정도로 그 규모가 엄청났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영국은 아프리카로부터 약 3백만 명의 흑인 노예들을 잡아 아메리카 대륙에 팔았다고 합니다. 

노예 제도는 그 자체가 비윤리적이지만 노예를 수송하고 거래하는 과정이 반 인륜적이었습니다. 평화롭게 살고 있는 아프리카 흑인들을 강제로 납치했습니다. 좁은 노예선에는 수백명의 노예들을 실었는데 그 내부 높이가 75cm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짐짝처럼 쟁여서 실은 것이지요. 불필요하면 바다에 던지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항해 도중 절반이 죽고 또 팔려가서는 약 3분의 1이 주인의 채찍에 죽고는 했습니다. 

윌버포스는 이 노예 제도와 노예 무역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라고 하여 폐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렇지만 국가 주 수입원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노예 무역을 폐지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암살의 위협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1787년부터 부지런히 폐지 법안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왜소한 체구의 윌버포스는 150번이나 되는 대(對) 의회 논쟁을 통해서 영국이 진정으로 위대한 나라가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기독교 국가를 자처하는 영국이 황금에 눈이 멀어 노예 제도를 고집하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 결과 1807년에 노예무역이 완전 폐지 되었고, 1833년에는 노예 제도 자체가 폐지되었습니다. 윌버포스가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운지 56년만에 이루어진 결실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의 삶의 태도라 생각합니다. 열릴 때까지 집요하게 두드리는 것이지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물러서지 않은 삶의 자세를 주님은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행동적 신앙의 배후에는 은밀한 기도가 뒷받침이 되었습니다. 윌버포스는 그의 글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무와 사람 만나는 일로 항상 바쁜 생활은 내 몸은 아니라도 내 영혼을 망치고 있다. 보다 이른 아침에 혼자만의 시간을 더 가져야겠다. 내가 경건 훈련과 기도와 묵상과 성경 읽기에 습관적으로 시간을 너무 적게 할애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약하고 차가우며 강퍅하다. 매일 두 시간이나 한 시간 정도를 할애하는 게 좋겠다. 나는 너무 늦게 자는 버릇이 있고, 따라서 아침에 허둥대며 30분의 시간을 갖는 게 고작이다. 모든 선한 사람들의 경험에 따르면 합당한 만큼의 개인 경건의 시간을 갖지 않고는 영혼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준다. 능력 있는 기도는 사랑 넘치는 진리이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기름부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라.”


좋은 것 주시는 하나님

예수님을 믿을 때 받는 축복 중에 하나는 우리 기도를 받으시는 분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 때 부르짖을 대상이 전혀 없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외치고 소리쳐도 아무도 듣지 않는다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세상에서는 그런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제도 보니까 촛불집회가 87 회째를 맞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아무리 대통령과 정부를 향하여 외쳐도 듣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백성들의 소리에 비록 그것이 자신의 생각과는 반하는 것일지라도 들어주거나 듣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이 대통령 아버지의 마음일 텐데 전혀 벽에 외치는 것만 같아 보입니다.

이럴 때 우리 안에는 분노가 쌓이는 것입니다. 정치뿐만 아니라 세상 일이나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벽처럼 전혀 응답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 직장 동료나 인간관계는 우리를 얼마나 답답하게 만듭니까?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소리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소리를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응답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자식이 떡을 달라고 하면 돌을 주는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생선을 달라고 하면 뱀을 줄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아마 생선하고 뱀이 모양이 비슷했던 모양입니다. 악한 자라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줍니다. 실제 우리 주변에서 악인이라고 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집을 한 번 가보십시오. 자기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끔찍한지 모릅니다. 세상의 아버지가 그런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어찌 너희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합니다. 

우리 기도의 든든함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열심히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간구하는 것에 가장 최상의 것을 주실 것입니다. 응답이 더딘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더 좋으신 것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응답이 없습니까? 응답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이미 좋은 것을 주셨는데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시며, 그분은 우리에게 가장 좋으신 것을 주실 것을 믿기에 우리는 기쁨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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