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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갈 6: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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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갈 6:1~18)  
 

성도의 공동체도 죄와 허물은 있습니다. 이미 의인으로 칭함 받았으나 아직 성화가 완성되지 않은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허물없는 공동체나 사람을 찾아다니는 일이 아니라 허물이 드러난 현재의 공동체 속에서 참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태도를 취하는 일이 필요하겠지요.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성도들의 공동체라면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바울은 교회 내에 범죄가 없을 것을 가정하지 않고, 현저한 육체의 행위들이 드러날 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교훈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갈라디아서 6장 마지막의 “아멘”을 제외하면 헬라어 성경이 “형제들아”로 시작해서 “형제들아”로 끝난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윤리에 있어서 형제 의식은 핵심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범죄 한 일이 들어났을 때,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내 형제의 일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이라면 계속 죄를 범하고 있는 형제를 발견하고서도 모른 척 넘어가거나 무관심하지 않겠지요. 반대로 냉소적인 비난만 퍼붓거나 사람 잡을 듯이 정죄만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기도를 하든, 권면을 하든, 결국 신령한 사람이라면 “온유한 심령”으로 함께 회복할 길을 모색할 것입니다. 엄히 꾸짖을지라도 그 인격 자체를 멸시하지는 않을 것이고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으로 대할 것입니다. 이처럼 온유한 심령이 없이는 사람을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사람을 바로 잡기는커녕 사람 잡기 쉽겠지요.

형제를 바로잡은 다음에는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명령되었습니다. 형제의 죄를 발견할 때마다 폭발할 듯이 분노를 드러내는 사람이나 지나치게 가혹하게 꾸짖는 사람은 자신을 냉철하게 돌아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신도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 사람이며, 자신도 환경만 갖춰지면 동일한 죄에 빠질 수 있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깊이 인식하는 겸손한 사람이라 할 수 없겠지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린 배은망덕한 사람일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 명령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2). 요즘은 세상이 험악해서 남보다 못한 형제들도 많습니다만, 형제란 가족 공동체의 책임을 함께 지고 약한 형제의 짐까지 져주는 관계입니다. 사랑이 있는 가족이라면 서로 부담을 떠넘기려 하지 않고 자기가 부담을 떠안으려 할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통해 유익 얻는 일에는 재바르면서 짐 져야 할 일은 교묘히 피한다면, 서로 사랑하라 하신 그리스도의 법이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요 13:34). ‘각자 알아서 하자’ ‘알아서 하겠지’라는 말들이 다른 사람의 짐까지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의 표현이라면 깊이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거창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본문을 볼 때 말씀을 벗어난 삶에서 회복되도록 바로잡아 주는 것, 형제의 허물을 통해 자신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 형제가 공동체에 끼친 수치와 손해는 공동의 책임으로 여기고 함께 짐을 지는 것이겠지요. 성도들은 헛된 야망에 빠져서 서로 비교하며 경쟁하다가 격동하고 투기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짐을 져주는 관계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혼자만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형제의 허물을 보고도 무관심하거나 과도하게 분노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짐은 도무지 져주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3)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남에게 피해주지 않으면서 남의 도움 없어도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처럼 스스로 과대평가하는 사람입니다. 남보다 잘 난 줄로 착각하지요. 인생의 처지는 언제든지 역전될 수 있습니다. 오늘 내게 도움을 받는 사람에게 내일 내가 절절히 도움을 요청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성도는 한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간의 삶임을 겸손히 인정하고, 스스로 대단한 줄 착각하며 살지 않아야 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자기의 일을 살피라”(4)는 말씀을 성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자기 일을 살피다보면 자신의 약점과 허물뿐만 아니라 장점과 재능도 과대평가 하지 않고 정확하게 파악하겠지요. 그러한 장점과 재능들을 남에게 자랑할 거리로 여기지 않고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서 뿌듯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은사들을 통해 공동체 내에서 자신이 부담해야 할 짐이 무엇인가를 알고, 묵묵히 “자기의 짐을 질 것”(5)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은사를 자랑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 앞에서 감당해야 할 자기 사명과 책임을 감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의 삶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같은 성령의 열매가 보일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6)는 말씀을 배우는 자는 말씀 가르치는 자를 재정적으로 공급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는 교인들의 경건한 삶을 위해 말씀 연구와 가르침의 짐을 져주는 반면 교인들은 말씀 가르치는 자의 생계의 짐을 서로 져주는 셈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일관되게 가르치는 원리지만(눅 10:7, 고전 9:11, 딤전 5:17), 종종 마귀는 재정 문제를 통해서 목회자의 사기가 떨어지도록 만들거나 회중으로 교만에 빠지게 합니다. 이 구절을 남용하는 목회자로 탐욕에 빠지게도 하고, 이 구절을 남용하는 청중이 돈으로 목회자를 자기 구미에 맞게 조종하려는 권력욕에 빠지게도 합니다. 

성도들은 재정 문제로 “스스로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목회자는 이 구절도 성경의 명령임을 분명하게 가르쳐야 하지만 탐욕스런 마음으로 하지 않아야 합니다.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직하고 성실하게 말씀으로 섬기며 검소한 삶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반면 성도는 재정을 목회자 길들이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가르치는 자를 존중하여 인색한 마음을 버리고 모든 좋은 것으로 섬기기를 기뻐해야 하겠지요. 하나님께서는 조롱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아무리 겉으로 그럴싸한 핑계를 말할지라도 각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심었는지 정확히 아시는 분이십니다. 날마다 육적인 마음을 심으면서 거룩함을 거두려는 태도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7). 

신앙을 탐욕이나 권력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입니다. 그러한 자는 그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둘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영원한 파멸을 거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가 그 영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과 대조됩니다(8). 부패한 인간의 심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조차도 자기 책임을 깨달아 그것을 묵묵히 지기보다 다른 사람의 책임을 알아서 그것을 지도록 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손해를 보고 더 많은 짐을 져야 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지치기 쉽지요.

갈라디아 성도들도 출발을 잘했는데 오래참지 못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성령을 좇아 행하려는 열정은 식었고 충성심은 변했습니다. 그 결과 육체의 일들이 공동체에 많이 드러났습니다. 그들을 향해 바울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9)고 권면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10)고 말합니다.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나중으로 미루어 두었다가 한꺼번에 왕창 착한 일을 하려는 사람은 스스로 속이는 사람입니다. 또한 심은 그날에 당장 추수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성도는 줄 수 있을 때 주고 베풀 수 있을 때 베푸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한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거두게 하실 때를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아무것도 줄 수 없을 만큼 전혀 가지지 않은 사람도 없고, 아무것도 받을 필요가 없을 만큼 몽땅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돈이 없으면 시간을 내어 줄 수도 있습니다. 지식과 재능으로 도울 수도 있습니다. 주고 베푸는 것은 없어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심는 일입니다. 성령을 따라 심으면 영원히 가치 있는 것들을 거둘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도라면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로 점차 선을 행할 범위를 확대할 것이고, 우선적으로는 한 형제인 믿음의 가정들을 돌아볼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는 결론부분에서 인사말을 생략하고 대신에 직접 큰 글씨로 그의 교훈들을 요약합니다(11). 먼저 거짓 교사들이 할례를 고집하는 동기는 복음을 전하면서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며 스스로도 지키지 않는 율법을 강요하는 것은 “육체로 자랑하려 함”임을 폭로합니다(12-13). 반면에 자신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음을 밝힙니다. 그는 세상의 어떤 것도 자랑거리로 여기지 않고 그것에 미련을 두어 집착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그에 대하여, 그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여깁니다(14). 

할례나 무할례도 자랑할 만한 어떤 것이 못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만이 자랑할 수 있는 어떤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공로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15). 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새 창조의 “규례”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서 행하는 자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그들 위에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이 있을 것입니다(16). 바울은 십자가 때문에 세상에서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십자가만 자랑하고 십자가 복음을 고수하기 위해서 “예수의 흔적”이라 말할 수 있는 수많은 고난과 핍박들을 많이 받았습니다(17). 

‘예수의 흔적’은 세상 관점에서 볼 때는 자랑거리가 못 되고, 오히려 수치스런 조롱거리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것을 세상의 어떤 명예와 영광보다 소중하게 여깁니다. 우리 삶에 남아있는 예수의 흔적도 주님께서 알아주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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