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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빈 들의 체험 (호 2: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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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들의 체험 (호 2:14~20)


[“그러므로 이제 내가 그를 꾀어서, 빈 들로 데리고 가겠다. 거기에서 내가 그를 다정한 말로 달래 주겠다. 그런 다음에, 내가 거기에서 포도원을 그에게 되돌려 주고, 아골 평원이 희망의 문이 되게 하면, 그는 젊을 때처럼, 이집트 땅에서 올라올 때처럼, 거기에서 나를 기쁘게 대할 것이다. 그 날에 너는 나를 ‘나의 남편’이라고 부르고, 다시는 ‘나의 주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그 때에 나는 그의 입에서 바알 신들의 이름을 모두 없애고, 바알 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다시는 없도록 하겠다. 그 날에는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고,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벌레와 언약을 맺고, 활과 칼을 꺾어버리며 땅에서 전쟁을 없애어,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 놓고 살 수 있게 하겠다. 그 때에 내가 너를 영원히 아내로 맞아들이고, 너에게 정의와 공평으로 대하고, 너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을 보여 주고, 너를 아내로 삼겠다. 내가 너에게 성실한 마음으로 너와 결혼하겠다. 그러면 너는 나 주를 바로 알 것이다.”]


• 인생의 빈 들 

휴가철이 되어서 많은 이들이 휴양지를 찾아 떠납니다. 바다로, 산으로, 계곡으로, 혹은 농․어촌 체험 마을을 찾기도 합니다. 젖은 옷을 바람에 널어 말리듯, 마음에 배어든 삶의 習氣를 털어내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겁니다. 신문이나 잡지들은 뒤질세라 가볼만한 휴양지를 소개합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그냥 집에서 뒹굴거리며 지내겠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찰에서 하는 temple-stay에 가는 이들도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분주함 속에서 잃어버린 단순함을 되찾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겁니다. 오늘부터 유초등부 여름성경학교가 시작됩니다. 주제가 <샘 솟는 십자가>인데, 그 뜻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바닷가 마을에 가서 성경공부도 하고, 물놀이도 하고, 감자도 캐고, 친구들과 사귀면서 우리 아이들의 마음이 시원해져서 돌아오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이 오늘 저와 함께 가실 곳은 ‘빈 들’입니다. 빈 들에 서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나는 눈길을 사로잡을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광야 지대를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깊은 침묵에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 광야를 걸어보지 않고, 또 그 속에 머물러 보지 않고 광야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적절치는 않지만, 어렴풋이나마 제가 깨닫는 것은 광야는 잡다한 생각을 버리고 강인해지도록 우리를 가르치는 학교라는 사실입니다. 테오도르 모노는 <<사막의 순례자>>라는 책에서 사막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막은 어떤 나약함도 허용하지 않는 엄격한 교육자이다. 유목민은 그들 시선에 필적하는 예리함을 가지고 마음으로 인간을 느낀다……사막은 또한 ‘생략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한 사람에게 하루 2.5리터의 물, 간소한 음식, 몇 권의 책, 몇 마디 말이면 족하다……사막은 관대하지 않다. 사막은 영혼을 조각하고 육체를 단련시킨다. 낮의 강렬한 태양과 밤의 추위를 견뎌야 한다.”

어떤 이는 이런 곳에 가고 싶어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절대로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버티어도 결국에는 갈 수밖에 없는 인생살이의 ‘빈 들’이 있습니다. 그 빈 들의 이름은 실패, 질병, 고독, 우울, 무기력, 허무 등입니다.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거기에 직면하면 일상의 평온이 깨지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깊이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극한의 상황을 ‘한계상황’(Grenzsituation)이라 말했는데, 그가 들고 있는 한계상황은 ‘죽음, 투쟁, 죄책, 고난’ 등입니다. 한계상황에 직면한다는 것은 그렇게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한계상황은 자기의 삶을 찬찬히 돌아보게 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유입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고난이나 질병이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교만하게 살까요? 

히브리 시인은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나는 주님의 율례를 배웠습니다”(시119:71) 하고 노래합니다. ‘빈 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시는 곳이고, 우리의 마음에 말씀하시는 곳입니다.


• 일상의 루틴 깨기

하나님은 당신을 등진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마음이 아프십니다. 백성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이끌고, 좋은 선물을 주셨건만, 감사는 고사하고 배신으로 되갚음 당한 그 심정은 오쟁이 진 남편의 심정과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우상에게로 달려가기에 바쁘고, 제단이 늘어날수록 범죄도 늘어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이들을 보며 하나님은 징계를 내리겠다고 하십니다. 그 기세가 무섭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갑작스럽게 하나님은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징벌을 내리기보다는 그들을 달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빈 들로 데리고 가 다정한 말로 달래 주겠다고 하십니다. 왜 하필이면 빈 들입니까? ‘빈 들’은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첫 사랑의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주님만 의지했습니다. 주님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홍해 바다를 갈라 그 백성이 걷게 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주린 배를 채워주시고, 반석에서 샘물이 솟아나오게 하심으로 마른 목을 축이게 하셨습니다. 

문제는 삶이 편안하고 넉넉해지면, 신산스럽던 과거의 기억은 다 사라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게 사람입니다. 사람은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바꾸는 순간 신도 바꾸어버리고 만다는 말이 맞습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말도 맞습니다. 편안하고 안락해지면 변화를 싫어합니다. 이웃들을 배려하며 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불편한 말씀’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시들을 제거한 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가시를 제거한 말씀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1:18)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가리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롬9:33)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거칠거칠한 십자가보다는 매끈매끈한 십자가를 좋아합니다. 소유가 늘어날수록 십자가는 불편한 짐이 됩니다. 우리 눈길이 지상의 것들에 머물 때 하늘은 점점 우리에게서 멀어집니다. 섬 주민들이 준 ‘로터스’ 열매를 먹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던 오뒷세우스의 부하들처럼, 우리도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인생임을 잊고 삽니다. 인생의 ‘빈 들’ 체험은 그렇기에 은총입니다.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부름이니 말입니다. 


• 새로운 언약

‘빈 들’에서 주님은 그 백성에게 당신의 참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엄격한 사감선생님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사소한 잘못까지 지적하고, ‘하지 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분으로 말입니다. 규칙이 엄격할수록 반발심은 더욱 커집니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을 잘 믿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도덕적 일탈행위에 놀랄 때가 많습니다. 위선은 말할 것도 없고, 가정 폭력, 성적 일탈 등으로 구설에 오르는 이들은 유난히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쁜 생각은 누구나 합니다. 문제는 그것에 직면하여 극복하거나 해소시키지 않고 속으로 추방해 버리는 것입니다. 

융(K. G. Jung)은 우리가 그림자 속으로 추방하는 것은 무의식에서 부정적인 작용을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그런 마음을 솔직히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 내면을 치유하실 것입니다. 약함과 허물까지 용납하시고, 우리 속에 있는 나쁜 뿌리를 뽑아주시기 위해 애쓰시는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을 가혹한 주인처럼 대하지 않게 됩니다. 

“그 날에 너는 나를 ‘나의 남편’이라고 부르고, 다시는 ‘나의 주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16)

예수님은 제자들을 ‘내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눅12:4). 요한복음은 주님이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나눈 사이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뜻을 알아차리는 사람, 당신의 꿈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 되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신앙적 성숙입니다. 성숙한 이들은 이제 더 이상 ‘바알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를 유혹하는 바알들은 무엇입니까? 돈, 효율성, 연줄, 명성 따위일 것입니다. 돈은 은밀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숭배를 요구합니다. 돈을 위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효율성은 마땅히 추구해야 할 가치이지만, 그 과정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의 살 권리도 소중합니다. 혈연, 학연, 지연, 심지어는 교연(?)조차 큰 힘을 발휘하는 세상은 바알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알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또 그에게 무릎을 꿇지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새로운 세상을 여십니다.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고,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벌레와 언약을 맺고, 활과 칼을 꺾어버리며 땅에서 전쟁을 없애어,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 놓고 살 수 있게 하겠다.”(18)

이런 세상이 어디에 있는가 싶지요? 교회가 바로 그런 삶을 경험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독점이 아니라 나눔이,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 경쟁이 아니라 돌봄이 지배하는 세상이야말로 칼과 창이 꺾인 세상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각자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모두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많은 영혼과 그들의 결함을 창조하신 분’을 찬미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바칩니다. 이상하지요? 보통은 우리가 가진 것이나 우리의 재능에 대해 감사하지, 갖지 못한 것이나 결함에 대한 감사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든 걸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족적인 외톨이가 될 것입니다. (조너선 색스, <<차이의 존중>>, 175쪽 참조) 저마다 지고 가는 인생의 짐이 다르지만, 그래도 한 가지 공통점은 우리가 다 불완전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한 몸 공동체로 부르신 까닭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라는 것입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그런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천국의 삶을 연습하고 맛보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찌 세상을 변혁하는 누룩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익명성이 주는 안락함에서 벗어나 다른 이들과 연루되기를 주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 영적 혼수품

하나님은 ‘빈 들’에서 그 백성을 아내로 맞아들이면서 귀한 선물을 준비하셨습니다. 정의와 공평, 변함없는 사랑, 긍휼, 성실한 마음이 그것입니다. 이제 며칠 후면 결혼할 커플들도 이런 선물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정의라고 번역된 체데크(tseddeq)는 옳음을 독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나 좋을 대로 하지 않는 것이 의입니다. 공평으로 번역된 미슈파트(mishphat)는 똑같은 저울을 사용하는 것으로, 기분에 따라서 기준을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변함없는 사랑으로 번역된 헤세드(hesed)는 서로에 대한 신실함을 뜻합니다. 긍휼이라고 번역된 락하밈(rakhamim)은 자기 태를 찢고 나온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정 혹은 사랑을 뜻합니다. 성실한 마음으로 번역된 에무나(emuna)는 자기 속에 있는 영적인 능력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삶의 중심에 이런 가치들이 굳게 자리잡고 있는 이의 삶은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선물을 주십니다. 

가끔 결혼식장에서 본인이 작성한 서약서를 낭독하다가 눈물을 짓는 신랑/신부를 봅니다. 인생살이 가운데 그 순간보다 숭고하고 아름다운 때는 많지 않을 겁니다. 그 때만큼은 목석같은 제 마음에도 잔잔한 일렁임이 생깁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결혼 서약 앞에서야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많이 부족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사랑의 맹세는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일으켜 세우는 힘입니다. 

꾸지람을 통해서 사람을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다함없는 사랑이야말로 변화의 씨앗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낸 연애편지입니다. 그 편지를 받은 사람은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 안에서 살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속에 사시기를 갈망합니다. 그들은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조정합니다. 이것이 “나 주를 바로 알 것”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지금 인생의 ‘빈 들’에서 서성이는 이들이 계십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곳은 바로 하나님을 만나 뵐 자리입니다. 도시의 분잡 속에서 듣지 못했던 하나님의 음성을 가려듣게 되는 자리입니다. 그곳은 삶의 군더더기를 덜어내야 하는 곳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결혼 선물을 받는 자리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미 ‘빈 들’의 허허로움과 외로움을 경험했던 이들은 ‘빈 들’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이들 곁에 머물며 그들의 힘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이 무더운 여름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는 우리의 갈망이 깊어가기를 바랍니다. 그런 갈망이 깊어갈수록 우리를 짓누르는 인생의 무게는 줄어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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