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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제는 안심하라 (행 27: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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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안심하라 (행 27:20~26)  
 

오늘의 설교제목을 주보에 쓰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난주일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말씀드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기억하시나 물어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원고를 보내는 마지막 시간에 ‘이제는 안심하라’고 넣었습니다. 설교제목이 무엇이죠. 그렇습니다. ‘이제는 안심하십시오’

2002년 말에 미국에서 출간되어 온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진 아주 대표적인 베스트셀러 중에 ‘폰더씨의 위대한 하루’라는 책이 있습니다. 수많은 독자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별 다섯 개의 평점과 함께 ‘감동적이다, 눈물어린 책이다, 가슴 벅찬 감격의 책이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용기를 주었던 책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은 데이비드 폰더라고 하는 분입니다. 이 분이 직접 경험한 것을 여기 썼습니다. 폰더씨는 자기가 다니던 회사가 인수합병 되면서 졸지에 실직자가 되어 7개월이 지나가게 됩니다. 갚지 못한 자동차 할부금에 밀린 집세에 은행통장 잔고는 바닥이 나고 설상가상으로 사랑하는 딸이 병들어서 수술비를 마련해야 되는데 막연합니다. 남은 거라고는 본인생각에 거추장스러운 자기육체, 몸뚱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생명보험 들어 놓은게 있으니 내가 지금 죽으면 적어도 내 딸의 수술비는 마련할 수 있을 거다.’ 그래서 생명보험을 어떻게 하면 탈 수 있을까 궁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자동차를 몰고 가면서 자동차 페달을 힘껏 밟았습니다. 죽을 테면 죽으라고. 그러면서 크게 외쳤습니다. “하나님, 하필이면 왜 납니까? 나만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그러면서 그는 정신을 잃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 끝에서 역사여행을 하게 됩니다. 자기가 알고 있던 역사의 인물 중에 7명의 역사적인 인물들을 만나기 시작합니다. 그 중에서 네 번째로 만난 사람이 미국 대륙을 발견한 콜롬부스였습니다. 콜롬부스에 대해서 알고 있던 것, 책에서 읽었던 것이 전부 떠오릅니다. 그림처럼 지나갑니다. 콜롬부스가 항해를 합니다. 64일이 지났습니다. 이제 물도 다 떨어져가고 식량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폭풍에 시달리던 선원들이 지쳐서 폭동을 일으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항해를 얼마나 더 계속 할 것이냐, 되돌아가자, 이대로는 우리가 다 죽을 것이니 되돌아가자 하고 폭동을 일으켜 콜룸부스를 죽이려고 합니다. 바로 그런 시점에서 그는 그들을 설득하며 설명합니다. 

“우리의 남은 식량은 앞으로 열흘도 버티지 못할 정도밖에는 없습니다. 자, 여기까지 64일을 왔습니다. 되돌아간다면 양식은 열흘 분밖에 없으니까 되돌아 갈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는 계속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망설임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기적을 이루실 것을 방해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이루시려 해도 우리가 망설이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나타내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되돌아가는 일은 없습니다. 오직 앞으로만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 마침내 미대륙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두려움과 망설임은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결론짓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마음에도 두려움과 망설임이 가득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도 주시는 말씀으로 믿음의 용기와 소망을 다시 얻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성경에 276명이 탄 배 한 척이 미항을 떠나서 어느 항구로 가고 있습니까. 지난 시간 두 항구를 이야기했는데, 미항을 떠나 뵈닉스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지난주일 설교에 이어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당시의 상황을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풍랑이 너무 심해서 그들은 손을 놓고 말았습니다. 가지고 있던 그 많은 화물, 배에 실었던 물건을 다 바다에 스스로 버렸습니다. 이제는 바람이 부는대로 그냥 끌려갑니다. 어딘가 부딪히기라도 하면 죽는 것입니다. 손을 들었습니다. 인간의 한계에 왔습니다. 

지식도, 경험도, 노력도, 자본도, 권세도 이 시간에는 다 소용없습니다. 다 무용지물로 돌아갔습니다. 아무도 여기서 소망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그대로 완전히 무너지는 시간입니다. 다 포기했습니다. 철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궁극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되는 것이다.’ 인간 능력의 한계가 오고 그것이 넘어선 다음에야 오늘 본문대로 이 죄수 한 사람 사도 바울의 말을 저들이 듣기 시작합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인간의 능력이, 어떤 가능성이 있었다면 바울의 말을 들을 리가 없지요. 어림도 없습니다. 쇠고랑을 찬 죄수의 말을 들을 백부장이 어디 있으며 어느 선원이 어느 선장이 그의 말을 듣겠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안들을 수 없는 한계에 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사해(死海)라고 하는 바다가 있습니다. 거기에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누가 사해에서 수영을 하다가 그만 기진맥진해서 살려달라고 SOS를 외쳤습니다. 나 빠져죽는다, 아이고 살려줘, 살려줘 - 자꾸 소리지르는데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돌아볼 생각도 안하고 도와주려고도 안합니다.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물가에서 놀다가 이런 경우를 당해보셨습니까. 혹시 물에서 놀다가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시작하면 모두 당황하여 뛰어들지도 못하고 어쩔줄 몰라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이사람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이 사람 혼자서 소리지르고 살려달라고 할 뿐입니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한참 소리지르다가 기진맥진해서 온 몸에 힘을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붕 뜬단말입니다. 사해는 염분이 많아서 손만 들면 저절로 뜹니다. 그걸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제발 버둥거리지 말어’하는 마음으로 쳐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손을 들어야 됩니다. 우리의 노력을 일단 모두 중단해야 됩니다. 모든 가치를 다 부정해버려야 됩니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상상해보십시오. 276명이 탄 이 배가 이제는 여망이 없습니다. 선장도 할 말 없고 선원들도 손을 놓고 말았습니다. 이젠 그야말로 죽으면 죽는 것입니다. 부딪히면 깨지는 것입니다. 이러고 그대로 바람 부는대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이때에, 바로 이 순간에 죄수 한 사람 사도 바울이 나서서 저들에게 말합니다.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옳은 말이지요. 내가 떠나지 말라 했을 때 왜 떠났느냐 그 말입니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듣고 또 많은 사람이 가자, 아무쪼록 뵈닉스까지 가자하고 떠났는데 봐라, 내 뭐라 하더냐, 떠나지 말라 했는데 왜 떠났느냐, 안 떠났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말은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과거를 물어서 어쩌자는 것입니까. 이미 떠난 것을요. 무슨 소용입니까. 우리는 너무 과거에 매입니다.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과거에 매이지는 말아야 합니다. 

바울이 지난 일을 책망하는 듯 하지만, 그러나 이제 그 다음말씀이 중요합니다. “이제는 안심하라.” 귀한 말씀입니다. “이제는 안심하라.” 무슨 말씀입니까. 깊고 오묘한 말씀입니다. 실수한 것도 사실이요 죽어도 마땅한 것 사실이요 못할 짓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도 안심하라 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인간대로 실수했지마는 하나님께서는 초연하십니다. 그 실수를 넘어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경륜이 있기 때문에 이제는 안심하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버리시지 않았다 -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걸 보니까 아직도 우릴 버리시지 않았다. 말씀의 역사가 여기 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지 않았다. 그런고로 안심하라.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귀를 기울이라.’ 이런 말씀입니다. 

말씀이 들려온다고 하는 것은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이제는 안심하라고 말씀합니다. 참 너무나 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길을 갔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시지 않았다. 우리가 엄청난 실수를 하고 있지만 이 속에도 하나님의 큰 뜻이 있었다. 안심하라.’ 

저들은 비로소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말씀을 더 자세히 보면 주신 말씀의 핵심이 이것입니다. ‘네가 가이사 앞에, 로마황제 앞에 서야 되겠다, 복음증거를 위해서.’ 그러면 바울은 로마까지 가야 됩니다. 바울이 가면 다른 사람들도 따라가게 되어 있지요. 바울이 무사하면 저들도 무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야 한다는 역사적이고 엄청난 선교적 경륜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까짓 풍랑 때문에 하나님의 사업이 망가질 수 없습니다. 좀더 말씀을 드리면 이들의 반항도 있고 잘못된 행동이 있었지만 좋아요. 그래도 하나님의 경륜이 여기서 묵살될 수 없습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이사 앞에 서야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더 앞서있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기까지는 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명언입니다. 그는 88세까지 살았으며 죽기 전날까지 말씀을 전했습니다. 할 일 있는 사람은 절대 데려가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는 죽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가 비록 서른세 살이지만 뭐라고 하십니까. “다 이루었다” 하십니다. 귀한 말씀입니다. 서른세 살이지만 다 이루신 것입니다. 다 이루었기에 간 것이지 할 일이 태산 같은데 하나님이 그만하시고 데려가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신앙이 아닙니다. 다 이루었습니다. 그런고로 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딤후 4:7-8). ‘나는 달려 갈 길을 다 갔다. 그리고 믿음을 지켰다. 내가 해야 할 일 다했다. 그런고로 내 앞에 생명의 면류관이 있다.’ 여러분 이 종말론적 신앙을 확실하게 가져야 합니다. 할 일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데려가시지 않습니다. 죽을 리가 없습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살아있는 나에게는 반드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풍랑을 만나실 때가 있었지요. 배에 타고 계시는데 풍랑이 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면서 ‘우리 다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왜 안돌아보십니까’ 하지요. 이런 제자들 영 마음에 안듭니다. 아니, 자기들 죽으면 예수님도 죽으시지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이라니요. 어쨌든 예수님 일어나셔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적게 믿는 자여 어찌 근심하느냐.” 그 말씀 속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이렇게 있는데 왜 죽느냐, 할 일이 있는 우리가 이까짓 풍랑 속에서 죽을 사람들이냐, 이런 멍청한 인간들아 안 그렇습니까? 그냥 죽을 사람들이 아니지요.


오늘 본문의 사건은 참 놀랐습니다.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가이사 앞에 꼭 가야겠다, 가이사 황제에게 복음을 전해야 겠다, 그것이 네 사명이다, 그런고로 너는 안죽어, 또 “다 네게 주셨다”합니다. 여기 있는 276명을 다 네게 주었다, 너 하나 살아야 하므로 다른 사람들도 더불어 살아야겠다, 그들도 덤으로 살아야겠다는 뜻입니다. 사실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서 복음 증거할 때 이 사람들이 전부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끝에 가서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바다에서 보았습니다. 우리가 풍랑당할 때 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죄수가 아닙니다.’ 이렇게 이 사람들이 증인이 됩니다. 이런 역할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그거 하나 위해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런고로 산다, 그 말입니다. “다 네게 주셨다” 하셨으니 그런고로 안심하라, 나는 반드시 가이사 앞에 서야 될 것이고 당신들도 들러리로 가야 될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배는 깨질 것이다, 그러나 생명은 보전할 것이다, 손상되는 것은 오직 배뿐이다 합니다. 그 다음말씀 보십시오. ‘그런고로 이제는 먹으라. 안심하고 먹어 용기를 내어라. 힘을 얻어야 될 것이 아니냐.’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34,35절).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의 현실을 우리는 생각합니다. 잘못한 거 사실입니다. 고통당해 마땅합니다. 망해서 마땅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는 짓을 보면 망해 쌉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이 혼란과 이 고통, 이 모순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심판같지만 그 속에 긍휼히 있고, 모든 것이 망하는 것 같으나 그게 흥하는 것이고,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으나 그 속에 시작이 있습니다. 완전히 버려진, 저주받은 세상 같지만 그러나 이 속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실패 할 수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 일에 여러분이 동참하고 협력하고 이 역사에 함께하게 될 때 영광의 미래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를 잊지 마십시오. 더는 과거에 매이지 맙시다. 그 많은 모순과 부조리, 그대로 버려진 과거가 아닙니다. 저주받은 현실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외침을 다시 한번 들어보십시오. ‘이제는 안심하라. 내가 가이사 앞에 서야 될 것이다. 그런고로 너희도 살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되겠기에 이 일에 따르고 이 일에 순종하고 이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함께 살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위한 어떤 역할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과거에 매이거나 현실의 염려에 매이지 마십시오. 이제는 안심하십시오! 다만 내게 주어진 일이 무엇인지? 그 사명 다하고 주님 앞에 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죽지 않고 지금 살아있는 것은 무엇인가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펼쳐지는 현실에 너무 두려워마시고 실망도 마십시오. 안심하십시오. 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를 통하여 나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 믿음으로 궂궂이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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