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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판하지 말라 (마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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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하지 말라 (마 7:1~6)


아마 비판 받아서 기분 좋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요즘은 인터넷 댓글이라는 것이 문제가 될 때가 많습니다. 점잖은 비판은 괜찮은데 비꼬는 듯한 비판과 타당하지 않은 비판을 받을 때는 견디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기분이 나쁩니다. 제가 『믿는 부모』란 책을 썼는데 그 책에 대한 서평들이 ‘예스 24’나 ‘교보문고’에 많이 실려 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제가 그 서평들을 제대로 읽은 것은 별로 안 됩니다. 서평 하나를 읽을라치면 긴장이 되고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다른 사람들로부터 판단 받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의적 댓글 때문에 재판을 걸거나 심한 경우 자살에까지 이르는 것이 일견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비판은 다시 되돌아온다(1-2)

주님은 우리에게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비판하지 말아야 할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먼저 언급한 이유는 너희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면 동일하게 비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절과 2절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이해합니다. 우리가 비판을 견디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희 자신을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검지 손가락으로 다른 사람을 지적하는 순간 나머지 세 손가락은 자신을 가리키며 비난하고 있다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탈무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남을 비방하는 것은 살인보다도 위험한 일이다. 살인은 한 사람밖에 죽이지 않지만 비방은 세 사람을 죽인다. 비방하는 사람 자신, 그것을 듣고 있는 사람, 그리고 비방 당하는 사람이다.” 

요즘 이명박 정부로 정권이 바뀌면서 그런 사례를 실제 목격하고 있습니다. 참여 정부를 향하여 코드 인사, 무능 정권이라 하며, 논문 표절과 적십자 회비까지 조사하며 퍼붓던 비난의 화살들을 자신들이 고스란히 맞고 있습니다. 언론들은 새 정부의 사람들이 옛날 야당시절 그들이 했던 비판들을 다시 끄집어내어 그들을 비판하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어디 정치뿐이겠습니까? 인간사에서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우리 자신은 소중합니다. 소중한 우리 자신이 판단 받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에 조심하여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의 판단을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을 향하여 가혹한 비판을 한 만큼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도 동일한 비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1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형제를 비판했던 가혹한 기준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판단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4장 4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우리가 비판하는 형제에게도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기 자식이 판단을 받을 때 기분이 나쁩니다. 자기 손으로 제 자식을 때릴지언정 다른 사람이 때리면 불쾌한 법입니다. 성경은 그 아버지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실지언정 우리는 형제를 판단할 자격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실 때 주님이 가장 먼저 머릿속에 그렸던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었을 것입니다. ‘바리새’라는 단어는 ‘구별되었다’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율법에 타락한 무리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사람으로 자부했습니다.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이들은 생활 속에서 율법을 실현하려 했던 평신도 운동가들입니다. 스스로도 평민들 속에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제사장 그룹을 형성했던 사두개인들이 민중들을 물질적으로 괴롭혔다면 바리새인들은 민중들을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괴롭혔던 사람들입니다. 날카로운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며 사람들을 판단하는 재판관의 역할을 자임했습니다. 

예수님과는 안식일 법이나 정결법 문제로 많이 충돌했습니다. 이들은 안식일에 예수님이 손 마른 사람을 고치고, 38년 된 병자를 일으키고, 18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치자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비판 의식이 강한 사람의 잘못중 하나는 곧잘 긍휼의 마음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생 동안 손이 말라 고생하거나, 앉은뱅이 신세로 지내며, 허리를 전혀 펴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한시라도 해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오직 메마른 율법만 보였습니다. 

비판을 잘하는 사람은 사람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의 기도에서 잘 엿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18:11) 사람에 대한 경멸은 비판보다 더 큰 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자기 기준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여 경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너희가 긍휼의 마음이 없이 사람을 판단하였은즉 하나님께서도 긍휼의 마음 없이 너희를 판단하실 것이다. 긍휼이 없는 하나님의 심판은 얼마나 끔찍할 것입니까? 그 앞에 의롭다하심을 받을 육체가 어디 있겠습니까?

남을 판단하고 흉을 보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성을 스스로 헤치는 자와 같습니다. 누가 우리 앞에서 어떤 사람에 대해서 흉을 보는 순간, 이 사람이 다른 곳에서는 또한 우리 흉을 볼 것이라 우리는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탈무드에 나와 있는 예화입니다. 세 자매를 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 자매는 모두 예뻤으나, 그들은 제각기 한 가지씩 결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큰딸은 게으름뱅이이고, 둘째딸은 훔치는 버릇이 있고, 셋째 딸은 험담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한편, 아들 삼 형제를 둔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세 딸을 모두 자기네 집으로 결혼시키지 않겠느냐고 청해 왔습니다. 세 자매의 아버지는 자기 딸들이 가지고 있는 결점을 그대로 말하자, 부자는 그런 점은 자기가 책임지고 그것을 고쳐가겠다고 장담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세 자매는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시아버지는 게으름뱅이 첫째 며느리에게는 여러 명의 하녀들을 고용해 주었고, 남의 것을 훔치는 버릇이 있는 둘째 며느리에게는 큰 창고의 열쇠를 주어 무엇이든지 갖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남을 헐뜯기를 좋아하는 셋째 며느리에게는 매일같이 오늘은 험담할 것이 없느냐고 하며 그 비판의 소리를 들어주었습니다. 

어느 날 친정아버지는 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여 사돈집을 찾아갔습니다. 큰딸은 얼마든지 게으름을 피울 수 있어 즐겁다고 말했습니다. 둘째 딸은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어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셋째 딸은 시아버지가 자기에게 무엇이든 꼬치꼬치 캐물어서 괴롭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친정아버지는 자기 셋째 딸의 말만은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셋째 딸은 그 순간에도 자기 시아버지를 헐뜯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비판을 많이 하면 할수록 그것은 우리가 성숙해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은 성숙할수록 비판의식이 줄어듭니다. 젊었을 때는 비판의식이 강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불의나 고리타분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젊음의 특권이라 할 것입니다. 젊어서는 비판의식이 투철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것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영국 수상 처칠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젊어서 진보주의자가 되지 않으면 그것은 심장이 없다는 증거요. 나이 들어서 보수주의자가 되지 않으면 그것은 머리가 없다는 증거이다.”

나이가 들면 비판의식이 줄어듭니다. 그 이유는 단지 현실에 타협하기 때문이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성숙했기 때문입니다. 비판하지 않는 이유는 아무리 비판해도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판하지만 나도 비판한 그 기준만큼 살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가 주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라를 책임지고, 한 조직을 책임지고,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할 사람은 모든 사람의 비판을 끌어안고 화합하며 나아가야 할 사람이지, 자신이 판단하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전히 비판의식이 강하다면 그는 아직 주인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스스로에게 책임을 물어야지 누구를 판단하겠습니까? 

비판하기 잘하는 사람은 또한 불행한 사람입니다. 사람의 부정적인 면을 먼저 보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장미는 보지 못하고 그에 숨겨진 가시만 보는 사람입니다. 비판하지 않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단지 그가 비판을 받지 않는다는 실리적인 이익에만 있지 않습니다. 비판의 마음을 그치는 자에게는 무엇보다 평화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사물의 긍정적이며 아름다운 면을 보기 시작하면 우리 마음도 평화롭고 아름다워집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을 향한 비판을 그침으로 우리가 행복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비판할 자격이 없다(3-5)

주님이 우리에게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사실 우리가 비판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 5절의 티와 들보의 비유가 그 실상을 잘 보여줍니다. 주님은 비판하는 자에 대해서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만 잘 보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들보는 집을 만들 때 쓰는 기둥을 말합니다. 이에 비해 티끌은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는 냉혹합니다. 한 때 이런 말이 유행했었지요. “남이 하면 불륜이고 자기가 하면 로맨스다.” 남이 한 잘못은 돌이킬 수 없는 죄지만 자기가 한 잘못은 실수라는 태도입니다.  자기는 열 가지를 잘못해도 변명의 여지가 있지만 다른 사람의 한 가지 잘못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태도입니다.  

자기의 연약함을 아는 자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아니 판단할 수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큰 죄인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게 합니다. 나는 저보다 저 흉악한 죄인이었는데 어떻게 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한 눈은 결코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없는 눈이 됩니다. 그 눈은 긍휼의 마음으로 가득한 눈이 됩니다. 우리는 매일 십자가 앞에 서야 하고 그래야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예수님 앞에 끌려 왔습니다.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에 이러한 여자는 돌로 치라고 명하였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심판을 촉구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아무 말 없이 땅 위에 무슨 글자를 쓰시더니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그러자 어른들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들까지 한 사람씩 다 물러가 버렸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들보를 발견한 순간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 책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이 여자를 향하여 “나도 저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범죄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의 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재판관이 아닙니다. 그분은 자애로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 인간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입니다.

몇 년 전에 가톨릭에서 “제 탓입니다.”하는 운동이 있었습니다. 잘못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표어를 자기 차 안에다 붙인 것이 아니라 차 밖에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붙이고 다녔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당신들도 “제 탓입니다”하는 태도로 살라는 비판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태도가 신앙인들에게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처럼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무슨 사건이 터지면 다른 사람 탓을 하는데 너무 익숙해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그 직접 당사자나 환경을 비판합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면서 정작 자신에 대한 반성은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 ‘인재(人災)입니다.’ 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잘못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인재라고 할 때 자신의 잘못이나 반성은 빠진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만 있습니다. 그러니 똑같은 잘못이 매번 되풀이 됩니다. 누구 탓을 하기보다는 자기 잘못으로 인정하고 고치려할 때 진정한 변화는 거기서부터 일어납니다.

하나님도 온 우주에 죄가 만연하고 폭력과 상처로 신음하는 이유를 인간 때문이라고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의 잘못이라 생각하여 세상의 짐을 자신이 지고 가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향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인간들을 판단하고 비판하기보다는 자신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보다는 스스로를 책하고 반성하였을 때 세상의 구원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비판은 소중하게 사용하라(6)

그렇다면 비판은 전혀 해서는 안 되는가? 저는 비판과 정의의 소리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개인이나 사람을 향하여는 비판할 때는 재삼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정의보다는 인간관계가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집단이나 지도자들을 향하여서는 정의의 소리를 분명히 외쳐야 할 때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인간관계보다 하나님의 정의가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정당한 비판은 우리의 잘못을 깨닫고 고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비판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많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만큼 비판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은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구약 시대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왕들과 지도층 사회의 잘못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이 비판의 소리를 듣기 싫어하고 또 그로 발생한 핍박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그만두려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의를 향한 열정 때문에 도무지 잠잠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소연 한 적도 있습니다.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20:8-9)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사회의 폭력성과 불법을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예레미야에게 부끄러움을 주었습니다. “너만 잘났냐?” “너만 하나님 말씀을 받았느냐?” 그렇지 않아도 비판적인 메시지를 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이런 핀잔들과 따돌림을 당하니 더 전하고 싶겠습니까? 그래서 침묵을 지키려고 하니 예레미야 심중에 임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의를 향한 열정이 가만 놔두질 않습니다. 이런 비판적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꼭 필요했던 존재들입니다.

현대 한국교회는 이런 비판자들이 없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이런 비판자들이 나오면 대부분의 교회들은 오늘 읽은 비판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며 무마시키려 합니다. 이렇게 비판자의 입을 막다보니 잘못을 해도 바꿀 수 없고, 쉬쉬 하다 결국 오늘날과 같이 한국 교회의 도덕성 위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할 수 있고, 그 때 잘못을 적절히 지적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실 예수님 또한 비판의 대가이셨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묵상했던 5장과 6장에서 바리새인에 대해서 외식하는 자라고 하며 얼마나 많은 비판을 하셨습니까? 주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는 “화있을 진저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아” 하면서 노골적으로 비판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희는 누구뇨?”(롬14:4) 하면서 판단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그렇게 판단하는 자를 판단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정당한 비판은 필요합니다. 정의의 소리는 개인적인 관계에서 벌어지는 비판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정당한 비판일지라도 조심해서 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6절의 말씀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개나 돼지는 거룩한 것이나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진주를 던지면 오히려 발로 밟고 상하게 하며, 쓸데없는 것을 주었다고 그 준 자를 물거나 받을지도 모릅니다.

이 6절이 1-5절의 비판 금지 말씀과 연관되는 것인지 아니면 독립적인 말씀인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이 1-5절과 연관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정당한 비판이라도 그것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할 때는 조심하라는 경고의 의미로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다윗과 같은 사람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사건에 대해 나단이 책망할 때 듣고 회개했습니다. 그는 거룩한 것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한 왕이었다면 그 나단을 죽이던지 해서 그 입을 막으려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건전한 비판을 들을 수 없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입니다. 주님은 자기 제자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바리새인들에게 전하다가는 오히려 해를 당할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그 대표자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전면에서 율법주의자들을 비판하다 항상 곤경에 처한 곤 했습니다. 그래서 들을 귀 없는 자들을 향할 때는 단 두 가지 선택만 가능합니다. 들을 귀 없는 자들을 비판할 때는 그들의 회개를 바라고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에 대한 심판의 선언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의 경고를 듣지 못했다는 변명을 하지 못하기 위함입니다. 예언자들의 외침이 주로 이러했다 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그들 앞에서는 침묵하는 것입니다. 괜히 건드려서 자기를 상하게 하기보다는 침묵함으로 자기를 지키는 일이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기도하면서 그들이 변화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더 현명합니다. 우리는 지금이 어떻게 행동을 취해야 하는 때인가를 아는 지혜로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비판을 하던 비판을 하지 않던 우리 마음속에는 미움은 없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그렇게 만듭니다. 미움을 가지고 하는 비판은 다른 사람을 죽이기 전에 자신을 먼저 죽입니다. 저는 오늘 주님의 말씀대로 될 수 있으면 비판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사회가 너무 지나치게 많은 갈등들을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판은 사람을 살리기보다 더 큰 갈등을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비판에 앞서 먼저 기도가 필요합니다. 남에 대해서 판단하기보다 자신의 허물을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 안에, 또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 가운데에 평화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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